우리나라의 냄비특성에 비춰보면 다소 시의를 지난 뉴스이긴 하지만
사실 이와 같은 사회적 반향을 크게 일으킨, 소위 센세이셔널한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적,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리뷰와 함께 많은 토론이 따라야 하고 적절한 대책 수립과 아울러 사회구성체의 진지한 방향전환이 모색되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가슴 아파는 하고 이런 저런 말은 쏟아내었지만 정작 주무부처인 문광부에서는 아무런 후속조처도 없을 뿐 아니라 관련이 있는 복지부에서조차 미봉책에 불과한 예술인 복지 개선책을 검토한 수준에 불과하지요. 신문에서야 멋진 기사거리니까 며칠 알맹이도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뉴스거리에 의해 완전히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민초 선생님께서는 작가시니까 아마도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끼셨는지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그야말로 액면그대로의 문제만 놓고 마음 아파하는 글을 올리셨습니다.
어쩌면 그 글을 읽은 사람들 중에는 '아니 언제적 이야기인데 이제서야. '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지 몰라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런 정도의 심각한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1년 아니 그 이상이라도 시간을 투자하여 문제의 원인과 근본에 대해 따져보고 사회적 교훈과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단순히 의학적으로 아사 또는 현대사회 무관심에 의한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보기에는 그 상징하는 바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는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최고수준으로 높게 나오는 나라인데 중학생들이 아파트에서 함께 뛰어내려도 언론에서나 뉴스거리로 하루나 이틀 정도 다룰 뿐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고 국가는 거의 손을 놓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발전이 제아무리 자랑스럽다할지언정 이런 류의 자살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 심지어 그런 끔찍한 사회적 사망 앞에서 국가가 아무런 대책을 내어 놓지도, 또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전 사회적인 노력조차가 보여지지 않는 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가 아직 야만국가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삶에 대해 아직 알지도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가 살아갈 희망을 뺏어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최고은 작가의 사망을 단순히 의학적으로 갑상선 기능 항진증을 앓아오고 있던 한 가난한 작가가 끼니를 잇지 못해 생긴 비극으로만 치부한다든가 또는 우리 사회가, 또는 이웃이 그를 방치한 현대사회 일반의 개인주의적인 무관심이 일으킨 비극으로만 본다면 이는 지극히 단편적인 시각이며 그녀의 죽음을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비극으로 몰고가는 음모이든가 심지어는 겉으로는 애도를 표하며 탄식하고 가슴아파하지만 전혀 알맹이는 없이 책임을 져야할 실체가 애매모호한 사회 일반에다가 책임을 전가해버리기에 결국은 아무런 달라지는 것이 없게 됩니다.
최고은 작가는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영화계의 많은 문제를 드러낸채 꽃다운 삶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그리 잘나가는 작가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재능의 그렇고 그런 작가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나리오는 이미 몇몇 영화사에 계약되어 있었고 그것은 제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단편영화 시나리오, 격정 소나타로 상까지 수상한 뒤였기에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시나리오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영화 산업이 매우 전 근대적이고 반사회적인 구조에 머물러 있음을 반영합니다.
일단 몇몇 거대 배급사가 영화판을 틀어 쥔채 제작에서부터 배포에 이르기까지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구조에서, 더군다나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스탭들이 제작사에 대해 일방적인
약자로 전혀 자신들의 권리를 확보해 나가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이미 최고은 작가와 같은 비극은 크고 작은 모습으로 수없이 존재해왔다는 것이지요. 수많은 스탭들이 노예처럼 부려지고 일하면서도 정당한 대우는 커녕 죽음으로까지 내몰릴 정도의 열악한 환경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녀가 그래도 괜찮은 지위에 있었던 작가였다는 점에서 받은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최고은 작가 사망은 우리 사회 곳곳에 전근대성과 반민주성이 남아 있는 한 우리 사회가 아직 완전한 탈근대 민주주의 사회로 자리매김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정권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주무부서인 문화 관광부 장관으로 누구보다도 영화판의 이같은 비리와 봉건적 노예구조의 후진성을 잘 알고 있는 자가 발탁이 되었음에도 그는 대한민국 1 % 를 위한 정권의 완장을 찬 채 고소영 강부자 정권의 이해를 충실하게 수행할 뿐, 영화판의 뿌리 깊은 개혁에는 아무런 관심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정권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고은 작가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탭들은 어느모로 보나 명백한 노동계급이지만 실제로는 자영업자로 분류되어 노동 3권 보장에서 제외되어 있고 건강보험 가입에도 불이익을 받으며 무엇보다 국가 복지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G20선진국타령은 고사하고서라도 적어도 국민들이 밥은 굶지않게 해주어야함에도 수도 서울 한 복판에서 어엿한 젊은 작가가 허기져 죽었다는 것은 이나라 복지 시스템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멀리 갈것도 없이 최근 오서울시장이 초등학교 무료 급식안을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하며 대부분의 복지예산을 깎은 채 2011년도 회계예산안을 통과 시켰던 현 정권의 반복지 정책에 맞장구를 친것만 보아도.
(요즘 밥 못먹는 아이들 거의 없으니 결식아동만 골라서 밥주자는 것은 그 아이들 가슴에 못을 박는 또다른 차별이자 학대입니다.)
영화스탭들은 일종의 비 정규직 노동자나 다름없는데 그들의 생존권이 복지 사각 지대에서 위태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눈뜨고 보면서
우리나라가 선진 복지국가로 진입하고 있다 말하면 이보다 더한 사기가 있을 까요. 최고은 작가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저급하기 짝이없는 복지정책이 나은 비극입니다.
끝으로 갑상선 기능항진증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며 먹어도 말라가는 대사항진 장애입니다. 대체로 극심한 스트레스와 영양불균형이 초래합니다. 따라서 최작가의 죽음을 놓고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그의 스승이라는 사람을 포함해서) 사람들의 그럴듯한 말들은 알량한 의학상식으로 그럴듯 하게 포장하여 최작가 죽음을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의 비극으로 치부한 채 그 죽음의 사회적 책임에서 부터 회피하려는 비겁한 음모와 술책의 결과입니다.
그러면서 그녀의 죽음이 단지 갑상선기능 항진으로 인한 죽음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를 단편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의 의학적인 이유의 하나는 될지언정 그녀의 죽음의 본질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난 다음 우리 사회는 영화계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희망이 사라져 왔습니다. 돈과 권력은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가진자의 세상이 되어왔습니다.
개인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살아남기를 강요받으며 사회 안전망은 점점 약화되어졌고 사람들은 더 극한 경쟁으로 내몰려 졌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소통의 끈이 무너져 각 개인은 철저히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최작가의 경우에도 부모가 있었음에도 서로 연락을 않고 살아갔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본이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사회 구성체의 각 개인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는 커녕 하루하루 살기가 버겁고 힘든 존재가 나를 포함해 주위에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밥먹고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지요.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 추구권은 단지 나혼자 잘먹고 잘사는 데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회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가 정녕 어깨걸고 함께 나아가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아무것도 모를 어린 청소년들이 쉽게 목숨을 버리는 것은 우리 사회에 이런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절망에 빠진 그들이 소통할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40분당 1명씩 자살하는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입니다. 서로 남이되어 살아가며 철저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가는 사회, 이런 사회는 1% 특권층에게는 천국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민중들에게는 희망이 사라진 사회입니다.
최고은 작가는 남긴쪽지에서 한 두달 후 받을 돈을 받으면 밀린 방세와 밥값을 치루겠다고 썼습니다. 그녀는 사실 이렇게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녀 역시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런 희망을 실제로 존재하는 실체로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장벽, 특히 소통과 복지의 장벽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의 순기능이 너무나도 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를 꿈꿀 수 없는 희망 부재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고은 작가의 죽음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 절망적인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