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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남침도 북침도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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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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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3839 |
작성일 2011-03-20 15:16 |
조회수 1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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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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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오토플레이 노래소리가 너무 크네요. 미안합니다.
이 글은 다른 사이트에서 ‘6.25 는 남침이다!’ 라면서 새삼스럽게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시는 어떤 분에게 드렸던 글 입니다. 누가 뭐라고 했나요?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글이니만큼 불필요한 부분은 빼거나 다시 써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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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월에는 아는 분들 생일도 많고, 여행도 다녀오고 해서 좀 분주했답니다. 오는 3 월 26 일은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1 주년이 되는 날 이네요. 공교롭게도 이 날은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킨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씨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되신 금양호 선원들과 한주호 준위, 그리고 해군장병들의 유가족들께 다시 한 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미궁에 빠져버린 천안함 사건의 원인과 책임소재는 하루속히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틀 정도 컨디션이 안 좋았어요. 조금 전 영화 한 편 보고 올라왔습니다. 한국영화였어요. 제목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오늘의 sarnia 생각 : '친절하게 살자'
재미있네요. 우선 어디서 누구한테 한국전쟁이 북침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요새 한국전쟁을 두고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별로 없거든요. 말씀하신 극우나 극좌 이외에는 말이죠.
정치적 선동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있어왔던 일이지만 대부분의 정보가 조회 가능한 오늘날에는 선동적인 발언 역시 조회 가능한 자료에 근거해야 합니다. 자료들을 근거로 자신의 의견을 수립해 나갈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얼마나 멋진 의견, 그럴싸한 결론을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라 그 의견수립에 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적합한 절차를 밟았느냐 하는 것 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울추 양쪽에다 이리저리 돌멩이를 올려놓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본질을 자료에 근거해 중립적으로 판단하려는 노력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스탈린-마오 문서가 기밀해제 돼 공개되기 전에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 입장 (조직적 남침유도설) 이 대세였지만 기밀문서 공개 이후에는 북한측의 선제공격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님께서 어디엔가에서 언급하신 '소련의 사주를 받고 남침' 운운은 어디서 들으신 말인지 모르지만 잘못된 정보 같습니다. 그런 말들은 자료를 근거로 적합한 의견수립절차를 밟아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정치적 선호도를 기준으로 자의적인 추리를 해서 만들어 낸 ‘구호’에 불과한 말이니까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세요.
미국이나 소련이나 당시에는 ‘조선’이라는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미국의 트루만이 한국에 대해 조언해 줄만한 전문가가 전혀 없이 삽질을 거듭 한데 비해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 같은 조선통으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전달 받을 수 있다는 게 좀 다르긴 했지요.
북한 수상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이 통일전쟁에 대한 소련의 의사를 타진했을 때 스탈린의 대답은 매우 애매했습니다. 소련은 1948 년 남북한 양국정부 수립 이후 38 도선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지적 군사적 충돌에 대해서도 계속 북한을 견제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이유는 미국과의 충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조선이 분단국으로 남건 통일을 하건 전혀 관심이 없었던 미국과는 달리, 조선 역사에 대해 정통한 슈티코프 팀의 조언을 받은 크렘린 지도부는 언젠가는 조선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돼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 이런 입장은 정치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조선역사에 대한 자기들 나름의 통찰을 기반으로 한 학문적인 결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다가 1949 년 소련 지도부의 입장 (통일전쟁에 대한) 을 다소 변화시킨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지요. 하나는 중국혁명의 성공으로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사건이고 또 하나는 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미국과의 군사력 비대칭이 해소된 사건 입니다. 게다가 그 해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선언을 합니다. 일종의 포기각서를 써 준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스탈린은 1950 년 3 월 지원을 요청하러 모스크바를 방문한 북한 수상 김일성과 부수상 박헌영에게 시원한 지원 약속을 하는 대신 중국과 협의해 보라며 확답을 주지 않은 채 그들을 돌려 보냅니다. 북한이 통일전쟁을 개시함에 있어 소련과 협의 했던 이유는 당시 코민테른 체제에서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공식적 동의가 필요했던 것 이외에도 군사적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인데 소련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완곡하게 거절하는 모양을 취하면서 실제적인 군사적 지원을 중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베이징의 마오쩌뚱에게 협조 공문을 보내주기는 합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당시 북한 지도부가 주도한 통일전쟁은 소련이나 중국의 사주를 받기는커녕 코민테른 체제의 완벽한 동의와 지지 조차 제대로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 있습니다.
소련이 한국전쟁 초반 ‘신속한 진군’과 관련해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한 경우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입니다. 6 월 28 일 개전 3 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 이상의 진군을 하지 않고 3 일 정도 서울에 머뭅니다. 스탈린은 즉각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내 ‘서울에서 우물쭈물하지 말고 신속하게 병력을 전개하라’는 조언을 합니다.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기 전에 전쟁을 빨리 종결 지으라는 요구였지요.
당시 서울주재 북한측 최고위 인사는 서울시인민위원장 이승엽이었고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부대는 제 1 군단 예하 4 개 사단병력 (선봉사단은 제 6 사단, 사단장 방호산) 이었는데 이들의 ‘서울에서의 진군지연’이 전후 이들에 대한 책벌사항 중 하나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이승엽은 남로당계이고 방호산을 비롯한 서울 점령 군 간부 대부분이 중국의용군 출신인데 6.25 전쟁은 이런 쟁쟁한 혁명가들에 비해 그 지명도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양대 세력 (남로당과 연안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을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긴 이야기가 필요한데 오늘 주제는 아니니 여기서 접고……
중요한 것은 누가 사주를 했고 누가 먼저 군사적 선제공격을 했느냐 하는 것보다 이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지르기 쉬운 오류가 하나 있는데, 어느 시기의 역사를 해석할 때 당시의 시각이 아닌 오늘의 시각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가 그것 입니다. 1945 년부터 중국혁명이 완료된 1949 년까지의 시기를 가리켜 국공내전시기라고 부릅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마오의 홍군간의 전쟁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세력은 대체로 장제스의 도움을 받은 임정세력과 마오의 도움을 받은 조선의용군 세력으로 갈려 각각 남과 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중심세력으로 부상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은 결국 국공내전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투쟁의 노선분화로 인한 이론투쟁이 국내에서 군사적 충돌로 확대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남한의 경우 임정세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승만이 친일지주-관료 등 엉뚱깽뚱한 세력을 긁어 모아 일방적으로 단정을 수립하고 '양아치정부'를 출범시키는 바람에 이런 식의 내전은 더 확고하게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고요.
그렇다고 제 말을 통일전쟁이 정당했다는 말로 오해 하지는 말기 바랍니다. 다만 ‘먼저 쳐 들어왔으니까 무조건 나쁜 놈이다’ 이런 생각은 전쟁이 끝난 후 남한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전 발발 환경에 대한 이해는 그것대로 따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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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1-03-21 14:4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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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잘 읽었습니다. 커밍스가 약간의 역사적 가정을 한 것같은데요. 소련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어떤 형태로든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베트남이 어떤 형태로든 공산화된 것처럼요. 그렇다면 한국 또는 조선은 아마 현재의 중국 정도의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입니다. 한국전쟁은 없었겠죠. 혹시 어떤 분이 딴지 거실까봐---이것은 가치 평가가 배제된 가정입니다.
제가 말씀드릴려고 한 것은 위의 것이 아니고 클립보드님께서 \"스탈린-마오 문서가 기밀해제 돼 공개되기 전에는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 입장 (조직적 남침유도설) 이 대세였지만 기밀문서 공개 이후에는 북한측의 선제공격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수정주의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중심으로 논의된 것인지 아니면 커밍스가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냥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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