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월 30 일 이군요. 베트남 통일 36 주년 기념일 입니다. 어제 밤에 열린마당에 토마님이 올리신 ‘미국 역대 대통령 성격분석’을 읽고 덧글 올리다가 갑자기 내일(오늘)이 그 역사적인 날이라는 것이 문득 떠 올랐습니다. 열린마당에 올린 토마님의 글은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성공한 정치인들의 윤리수준은 일반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저열하다는 분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의외가 아니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정적을 물리치면서 산전수전 있는 대로 다 겪고 권력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착하고 훌륭한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입니다. 일반인들의 잣대로 보면 거의 하나같이 나쁜 놈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요. 왜 정치인들이 감시와 심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지는 이런 분석결과에서 보더라도 자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암튼 그건 그렇고 제 이야기로 돌아가서…… 베트남 인민 여러분들과 제국주의 강탈-분단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대한민국 출신으로서 통일 36 주년을 축하합니다. (공식적인 통일연도는 1976 년이니 전승 36 주년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지만 어쨌든......) 배트남 전쟁과 관련해서 대한민국은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군이 연인원 약 30 여 만 명이 참전하여 이 나라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이지요. 미국이 통킹만 매독스호 어뢰피격사건을 날조하여 전쟁을 확대한 이듬해인 1965 년부터 파리평화협정체결로 미국이 사실상의 패전선언을 한 1973 년까지의 일 입니다. 잘못 알려지기로는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가 한국의 박정희 정부를 강요하는 바람에 참전했다고 하지만, 역시 잘못 알려지기로는 경제개발자원조달을 위해 할 수 없이 이 전쟁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대한민국이 이 전쟁에 참가하게 된 진짜 원인은 좀 더 부끄럽고 어이없는 것이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씨의 좌익경력이 문제가 되자 미국으로 달려간 박정희 씨가 자신의 좌익혐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당시 J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국군 참전을 먼저 제의했던 것이 비극의 계기가 된 것 입니다.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신경군관학교 입학 당시 혈서 소동에 이어 두 번 째 충성맹세 소동을 벌인 셈입니다. 전자는 일본에 대한 충성맹세였다면 후자는 미국을 향한 '결백구걸'이었던 셈이지요. 전자는 개인으로서 벌인 소동이지만 후자는 최고권력자 (당시 직책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로서 조국의 젊은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잡고 벌인 소동이라는 점에서 훨씬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정희는 그 충성 결백 선언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한국군은 이 전쟁에서 약 5 천 여 명이 사망하고, 5 만 여 명이 불구를 수반하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현지인들에게 참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한민국은 비슷한 고난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베트남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셈 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제라도 베트남 인민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해야 할 것 입니다. 아직 남겨져 있는 전쟁의 흔적이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과 보상 역시 수행해야 할 것 입니다. 아래는 두 달 전쯤 제가 베트남 여행준비에 착수하면서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는데, 그 중 ‘그 날의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내용’ 일부를 가져왔습니다. (전략)…… 그 날 소년 sarnia는 서울 동교동 집에서 흑백텔레비젼을 통해 이 역사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1975 년 4 월 30 일이었다. 사이공이 함락되기 며칠 전 남베트남 대통령 구엔 반 티우는 금괴 2 톤을 비행기에 때려 싣고 일찌감치 대만으로 도주했다. 사이공 시내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전투를 벌였던 남베트남측 병력은 놀랍게도 앳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그들의 교장도 육군참모총장도 모두 가족들을 데리고 달러와 금괴를 챙겨 미국으로 도망간지 오래였다. 주월 한국대사는 자기 휘하에 있는 공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을 내팽개친 채 자기 혼자 미군 헬리콥터를 얻어 타고 잽싸게 사이공을 탈출했다. 그 날 새벽 3 시 45 분 주월 미국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대사관저에 남아 있었다. 그는 대사관 정문에 게양돼 있던 성조기를 상자 속에 집어 넣었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성조기가 담긴 상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꾸물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 탈출하라"”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다급한 육성명령을 받고 대사관 옥상에 대기하고 있는 헬리콥터에 올랐다. 마지막까지 남아 문서소각과 함께 탈출작전을 엄호하던 해병대 병력을 실은 헬리콥터가 대사관 옥상을 이륙했다. 이 ‘마지막 헬리콥터’ 는 공중으로 떠 올라 대사관 건물 상공 위에 한동안 머물다가 남중국해 해상에서 대기하고 있는 미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1975 년 4 월 30 일 오전 9 시 30 분이었다. 19 세기 제국주의의 침략과 강탈로부터 시작된 100 여 년에 걸친 기나 긴 아시아민족해방전쟁의 총성은 일단 이 날 이 시간에 멈춘 셈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전차부대를 앞세운 북베트남 정규군 선봉부대가 사이공 시내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연도에 몰려나온 사이공 시민들은 차도 한 가운데를 따라 차분하고도 질서정연하게 진주하는 이 해방군 선봉부대를 환성과 박수로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다. 36 년 이 지난 지금도 그 미국 대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 사이공 아가씨들이 환영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자 쑥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 해방군 소년병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후략) 이 사진은 얼마 전에 필비 님이 올린 적이 있습니다. 북베트남 정규군 제 2 군단 전차부대 소속 전차 한 대가 독립궁 (사이공 소재 대통령궁)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1975 년 4 월 30 일 오전 11 시 30 분 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였지요. 당시 전차소대장은 (이름은 기억이 안 남) 20 대 초반의 중위였습니다. 대통령 궁에서는 대만으로 도망간 티우를 대신해 부통령 이하 몇 몇 <사이공 정권>의 각료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항복문서를 내 놓으며 이 전차소대장을 향해 "자네를 기다렸네" 운운하며 체면을 차리려고 했지요. 이들은 아직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 젊은 전차소대장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항복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포로들일 뿐 입니다" 아래 사진과 글은 제가 작년 8 월에 다른 주제 (진실의 순간들을 프레임에 담아내기 위해 생명을 내던지는 포토저널리스트들 이야기)로 작성했던 내용 중 일부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뭐, 베트남 이야기 나올 때 마다 항상 등장하는 이 유명한 사진들은 다 유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사진들이 전쟁의 국면을 바꾸어 놓는데 종요한 역할들을 했기 때문이지요.
1968 년 음력 1 월 1 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을 비롯한 미군거점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무력공격을 감행합니다. 이 전투에서 미군측에서 약 5 천 여명, 북베트남군과 인민해방전선측에서 약 4 만 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합니다. 이 전투 중 체포돼 해병대원들에 의해 연행 중이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간부Nguyễn Văn Lém 를 당시 남베트남군 육군준장이자 국립경찰 책임자였던 Nguyễn Ngọc Loan이 불러 세워놓고 불문곡직 권총으로 사살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의 주인공 총잡이 구엔 능옥 씨는 미국으로 망명한 뒤 슈퍼마켓과 피자가게 등을 경영하다가 1998 년 7 월 14 일 미국 버지니아주의 Burke 라는 도시에서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Nguy%E1%BB%85n_Ng%E1%BB%8Dc_Loan
‘네이팜 소녀’ 입니다. 이 사진을 촬영한 포토저널리스트는 당시 스물 한 살의 나이로 AP 통신 소속 분쟁지역 사진기자 활동을 하고 있었던 동남아 출신 Nick Ut 입니다. Nick은 이 사진을 찍을 당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미-월 연합군간의 치열한 지상전이 전개되고 있던 Trang Bang 마을에서 그야말로 목숨을 건 취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2 년 6 월 어느 날, 미국-남베트남 연합군은 별 전과가 없는 지상전대신 아예 이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청야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합니다. 곧바로 남베트남 공군소속 A-1 스카이 레이더기 한 대가 이 소녀가 살고 있던 Trang Bang 마을 상공에 투입됩니다. 이 비행기는 마을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네이팜판을 투하했습니다. 순식간에 마을은 불바다가 됐고 당시 이 소녀는 두 어린 동생의 처참한 죽음을 뒤로 한 채 전신화상을 입고 마을을 탈출합니다. 사진기자는 촬영 후 곧바로 중화상으로 끔찍한 모습으로 기진해 있는 이 소녀를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합니다. 전신 중화상을 입은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던 소녀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네이팜 소녀 Kim Phuc은 현재 47 세의 중년부인이 되었습니다. 두 자녀의 어머니이자 반전평화운동가로 활동하며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살고 있고, 올해 59 세가 된 Nick Ut은 아직도 AP통신 사진기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두 장의 사진 (각각 1969 년, 1973 년 퓰리처상 수상작)은 베트남전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미 등을 돌린 세계여론에다 베트남전 확전의 결정적인 명분이었던 이른바 제 2 차 통킹만 사건 (미 해군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의 어뢰공격을 받았다는 스토리)이 미국 군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는 것이 New York Times에 의해 폭로되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미국 행정부는 1973 년 1 월 북베트남 정부와 파리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어 1975 년 4 월 30 일 사이공주재 미국대사관 옥상에서 철수작전을 엄호하던 미 해병대원들을 실은 마지막 헬리콥터가 이륙함으로써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됩니다. 오늘은 제가 잘 가는 베트남 국수집 (에드먼튼 차이나타운) 에 안 갈 겁니다. 주인이 중국계 베트남 사람인데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을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이라 오늘 같은 날은 서로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이로 봐서는 전쟁 이후 세대 같은데 가족과 관련된 개인사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