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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언급하기도 창피한 사람입니다
작성자 clipboard     게시물번호 4131 작성일 2011-06-02 16:57 조회수 3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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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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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에 간 제 조카’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주제라 그 창에 댓글로 달까 했는데, 전혀 다른 사안이므로 새 창을 엽니다.&nbsp;&nbsp;

제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장 어이없어 하는 순간이 있다면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라는 말과 등치 시키는 발언을 누군가로부터 듣는 순간일 것 입니다. 

가뜩이나 중세기적 권위주의가 물씬 풍기는 ‘지도자’라는 명사에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모델링으로 삼아 마땅한 인물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흔한 것 같지 않지만, 특히 정치적 과오 이전에 그 개인의 사고와 행동 윤리평점이 낙제 수준에 가까운 정치적 인물에 이런 가당찮은 찬양 수식어를 가져다 붙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nbsp;&nbsp;

박정희 논쟁이 느닷없이 불거진 것은 참여정부 이후 대한민국 진보-보수진영간의 이념대립의 산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이미 정치적 파산선고를 받은 박정희 군사독재로부터 뒤늦게 본받을 점이 새로 발견됐기 때문에 나온 논쟁이 아니라, 2002 년 겨울 두 번에 걸친 대선패배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돌입한 대한민국 수구세력이 자신들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문화권력이라도 우선 되찾기 위해 그 도구삼아 난데없이 박정희 논쟁을 촉발시켰기 때문에 이 지겨운 이야기가 시작된 것 입니다. 

1960 년대에 경제인프라가 구축된 것이 그의 집권시기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1949 년까지도 한반도를 방위선 안에 넣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이던 미 국방성과 국무성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반공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일본 외에도 방어선 최전방에 있는 남한을 공업국가로 만드는 플랜을 짜게 되는데 1961 년 5 월 16 일 새벽 발생한 군사쿠데타로 인해 그 담당자가 바뀐 것뿐 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박정희 군사정권 아니었어도 60 년대의 빠른 공업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있어서 그런 가정은 무의미할 뿐 만 아니라 오만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보수진영이 박정희 정권을 ‘대한민국 정통성’과 연결시켜 이 정권의 윤리적 가치까지 미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 입니다. 박정희 이야기 나올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헌정을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한 정권이 한 국가공동체의 윤리적 가치까지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일정한 공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륜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한 정치집단을 국가 정통성 모델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이거야 말로 넌센스죠. 왜 칠레 사람들이 피노체트 정권을 자랑하지 않고 필리핀 사람들이 마르코스 정권을 자랑하지 않으며 니카라구아 사람들이 소모사 정권을 내세우지 않는 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nbsp;&nbsp;

만일 독일에서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였는데, 다만 그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라는 발언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독일 현행법상 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모르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진 않았으니 기소되는 대신 수사관으로부터 훈계나 몇 마디 듣고 풀려날지도요. 그러나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 입니다. 

오늘은 그의 정치적 과오보다는 개인적인 품격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공인이니만큼 이런 평가도 중요한 것 입니다. 

박정희는 대중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개인적 기본윤리부터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인 (김호남)과 딸 (박재옥)이 엄연히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숨기고 여대생을 유혹해 결혼을 하자며 동거생활을 했는가 하면,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북 옥천의 거부 육종관의 딸 육영수와 결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복귀해서 근무할 당시 데리고 있던 소위 송재천의 이종사촌이 예쁠 뿐만 아니라 이모부 (송재천의 이모 이경령의 남편인 육종관)이 큰 부자라는 말에 송재천을 들쑤셔 이 결혼을 성사시킨 것 입니다. 비록 나이는 많지만 그래도 총각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처자식이 있는 작자였다는 걸 알게 된 장인 육종관은 당연히 노발대발했고 사위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1965 년 숨을 거둘 때 까지 일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한 것 입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

유명한 친일파 시인 중에 박목월이라는 작자가 있는데, 군사독재에 아부를 하느라고 육영수가 피살되자마자 모든 사실들을 개발새발 미화해서 엮어낸 '육영수 여사'라는 책에서조차도 이런 사실들을 추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nbsp;&nbsp;&nbsp;&nbsp;

1961 년 북한은 박정희가 어린 시절 따르고 존경하던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을 특사로 내려 보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김종필을 보내 대화를 시도하더니 미국이 이를 눈치채고 박정희의 좌익경력과 연계해 의심하기 시작하자 엄연한 대남특사인 형 친구를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맙니다. 그가 얼마나 치사하고도 몰인정한 인간이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지요. 

1948 년과 1949 년에 걸쳐 군부내의 좌익조직원들은 물론 좌익조직원으로 의심 받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체포되어 수 백 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데, 한마디로 박정희가 작성해 준 리스트에 근거해 백선엽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과 수사책임자 김창룡이 체포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정희 스스로가 조직을 배신하면서 만든 이 ‘박정희 리스트’에는 정통 조직원들뿐 아니라 사감과 통밥을 동원해 죽일 인원수를 최대한 늘린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렇게 의리도 없는데다 특이한 사생활 윤리관까지 가진 박정희 라는 인물은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말썽이 끊이지 않아 1960 년 대 말에는 정인숙이라는 20 대 초반의 여자를 사이에 두고 대통령, 국무총리, 경호실장, 위싱턴 한인회장 등이 서로 ‘말뚝동서’를 맺어오다, 아직도 그 배후가 묘연한 치정살인극을 벌이는가 하면, 1974 년 8 월 15 일 그의 와이프가 8.15 기념식장에서 의문의 비명횡사를 한 다음에는 아예 중앙정보부에 의전과라는 여자를 전문으로 수집하는 미인사냥부서를 창설하고 여대생과 모델, 유명탤런트들을 일주일에 서 너 번씩이나 불러들여 주색잡기 파티를 벌여오다 하필 바로 그 파티 현장에서 총을 맞고 죽는 바람에 세계 망신을 초래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위대한 지도자? 

아이들에게 언급하기도 창피한 사람입니다.&nbsp;&nbsp;

추신: 다만 지금 나오는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술 마시다 말고 서부활극을 벌인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 가수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차분했다고 합니다. “나는 괜찮아” 라며 자네들이야말로 빨리 피하게 하는 뉘앙스가 풍기는 눈짓을 보냈다고 하는군요.&nbsp;

박정희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 가수의 증언까지 끄집어 내 박정희는 역시 위대했다고 이야기하는 모양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고재봉이나 김대두 같은 인물들도 경건하고 차분했을 것 입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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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by  |  2011-06-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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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술 처먹다 총에 맞아 죽은건 그렇다 치고 육영수를 만나기전 약 3년간(48년-50년) 사실혼 관계에 있던 여자가 있었지요. 이현란이라고. 이 여자하고 사이에 아이도 있었는데 아이는 6개월만에 죽었고. 죽은 아이는 박정희 와 옆집에 살던 황엽 대위(당시 계급) 부인과 이현란씨가 같이 용산 뒷산에 암매장 했다고 하지요. 아이가 죽었을 때 박정희는 형무소 있었습니다. 남로당 프락치로 잡혀서

뭐 배꼽 아래 일이야 그렇다치고 남로당 사건으로 잡혔을 때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술술술술 장비 목에 술넘어 가듯 시원하게 다 불었습니다.
인간성 다시 느끼게 하는 장면인데...

그보다도 박정희가 가장 인간답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은 황태성 사건입니다. 인간적인 관계를 여러가지로 고려해서 내려보낸 사람 (형의 친구)를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나 살자고 남 죽이는 사람치고 끝이 좋은 사람 못 봤습니다.

토마  |  2011-06-0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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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정치인으로서의 박정희가 아니라 자연인 박정희로도 매우 저질의 인간이라는걸 눈치채고 있었지만, 클립보드님과 필비님의 글을 보구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로 더 잘 맞아 떨어집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성을 두루 두루 갗추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사치... 씀씀이등등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공개적으로는 서민적 생활을 강조하려고 했던거 같지만, 살해된날 정황으로 봐서는 결코 그런삶을 살었을거 같지는 않구 말이죠.

사실 이런얘기를 아이들에게 많이 해 주어야 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너무 되도 않는 인물이 영웅이 되는건 너무 창피한 일이니까 말이죠. (근데 어떻게 그렇게 여자한테 인기가 좋았을까요? ㅋ)

재미뿐 아니라 정보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clipboard  |  2011-06-02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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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직후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수장으로 조직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장례식 (11 월 3 일)이 끝난 직후 청와대 집무실을 뒤졌는데 그 때 금고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찰 9 억 원이 나왔습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150 원이었고 지금은 4 천 5 백 원 이니까 짜장면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약 270 억 원이고요. 당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30 평형 가격이 2000 만 원 정도였는데 지금 10 억 원이라고 치면 아파트 화폐가치로는 약 450 억 원 정도되는 돈이 개인금고 한 군데에서만 나왔습니다. 가관인 것은 당시 전두환이 이 돈 중 6 억원 을 박근혜 씨에게 주고 나머지 3 억 원 중 절반을 자기가 떼어먹은 뒤 나머지 돈을 국방장관 노재현을 비롯한 3 군 총장에게 골고루 뿌렸다는 것 입니다. 국고로는 한 푼도 반납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씀씀이라고 하는 거야 자기가 내는 돈 아니고 국고를 마치 자기 주머니 돈인 줄 알고 그 돈으로 섹스파티에 불려 온 여자들 팁까지 뿌렸으니 더 말 할 게 없는데, 겉으로는 검소한 척 하느라고 오만가지 생쇼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기를 아낀다고 그 더운 여름에 청와대에 에어컨을 안틀고 창문을 열어놓는 바람에 실내가 모기 천지가 되어 직원들 업무능률이 형편없이 떨어졌다는 말도 있고, 수돗물을 아낀다고 변기 수조에 벽돌을 집어넣다가 수조가 깨지는 바람에 욕실을 물바다로 만든 적도 있다고 합니다.

1948 년부터 사실혼 관계에 있던 이현란은 여대생이었는데,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그 때 김호남이라는 엄연한 부인이 있었고 박재옥이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박재옥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한병기와 결혼을 시킨 후에는 자기가 대통령을 하는 동안 내내 해외 영사관과 대사관을 떠돌게 했지요. 1970 년대에는 한병기가 주로 뉴욕 총영사, 캐나다 대사를 하며 북미에서 지냈습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육영수는 비교적 심성이 모난데 없는 여자였지만 박정희가 끊임없이 여자문제를 일으키는 통에 청와대에서 치고 받는 부부싸움이 잦았고요. 청와대 직원들은 이 둘의 몸싸움을 육박전(陸朴戰)이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주먹과 자기 침실에 걸어놓은 검도용 죽도를 휘두르던 박정희는 급기야 재털이를 던지기 시작했고 재털이를 맞은 육영수의 얼굴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자기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 오죽한 인간이었겠습니까?

파리에서 김형욱을 잡아다 양계장 사료용 분쇄기에 집어넣을 정도가 잔혹한 인간…… 김재규가 그에게 총을 쏠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부마항쟁 때문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그보다 1 주일쯤 전에 일어난 김형욱 납치 살해공작을 명령에 따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던 불교신자로서의 자괴감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공포와 증오가 혼재하는 상대방…… 그래서 죽일 수 밖에 없었겠지요.

노짱  |  2011-06-03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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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그의 딸이 차기대선 1위 라는 것~ ;;;;

Pamoramas  |  2011-06-03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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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역대 대통령의 기여도 인기 투표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항상 1위를 찾이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사항입니다.
후세 역사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공과를 진실히 잘 판단하리라 믿읍니다.
그분에게는 민주주의를 말살한 큰 과오 있는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1-06-0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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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서 특정 개인에 대한 지지는 그 사회 구성원의 민주적 의식과 사회비평의식을 드러냅니다. 이명박님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훌륭한 정치인이 아니듯이, 박정희 지지가 높다고 해서 그가 훌륭한 대통령은 아닙니다. 파모라마스님께서 박근혜의 파퓰리즘을 혐오한다고 하셨는데 위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문민정부 이후에 들어서서 제대로 된 것들이었습니다. 앞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길고도 먼 길입니다. 그의 군사쿠데타의 legitimacy나 인권탄압, 사건조작 등 앞으로 발굴해 내야 할 일이 무한정 깔려 있습니다. 저는 김재규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측근 김재규의 박정희 제거는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후자에 더 손이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을 줄이는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김일성에 대한 평가도 그에 대한 일환이죠. 우리는 그 동안 남한에서 교과서에서만 배운대로 김일성의 독립운동은 가짜다 등등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는 당시 상당히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문제도 앞으로 계속 연구되어야 되며, 북한의 세습이나 파쇼적 경향도 진지하게 연구되어야 하고, 북한의 파쇼적 민족주의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에 대한 평가도 객관적으로 이뤄줘야 합니다.

다시 박정희에게 돌아가서 그의 인권만행과 쿠데타, 그리고 독재 등등은 그의 경제적 공헌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 평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나 경험, 그리고 기억으론 되지 않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내야 하며, 다른 국제관계, 정세, 지정학적 맥락과 상황도 고려해야 하겠죠. 이제 서서히 박정희 신화가 벗겨지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는 프로파갠다를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직도 히틀러를 좋아하는 신나찌 또는 스킨 헤드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듯이요.

Pamoramas  |  2011-06-0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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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therless, 아무리 사생활이 문란하였고, 인권을 박해하였다 하드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민족의 \"빵문제\" 보리고개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한민족의 박력 있던 \"위대한 정치 지도자\"로서 저는 개인적으로 그분을 추앙하겠읍니다.

ocanada  |  2011-06-0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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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지 반세기동안 온 국민이 생명을 유지하기위해 음양으로 일본통치에 동조 내지 방관 할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는데 그때의 시대적인 배경을 무시하고 지금의 잣대로 친일이니 매국노다 라고 단정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 합니다. 이북이 처한 현실도 북에 사는 모든 백성이 용공분자라고 할 수 없드시 거기서 태어나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 제도에 순응 할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 행적을 크로즈업해서 그분의 공적을 상쇄할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통령은 성인의 기준으로 나라를 통치하는것이 아니고 모든사람이 다 만족하는 그런 정책을 만들수 있다면 더 할 나위없지만 어떤 목표나 정책을 세우면 희생하는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킬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통령의 기준은 애국심과 사명감, 목적의식과 선견지명 을 갖춘 박정희 전 대통령 같은 분이 진정 영웅이며 지도자라고 감히 말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1-06-05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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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캐나다님, 나찌의 전범 재판을 할 때, 전범들이 히틀러가 시켰다고 해서 법의 심판에서 면죄받지 않았습니다.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 했을 때 혐력한 프랑스인들도 하는 수 없이 동조했다는 변명때문에 처단에서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라는 동일한 상황에서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간 김준엽과 장준하는 탈출하여 독립군이 되었고, 박정희라는 자는 혈서까지 써가면서 군관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로보트나 마찬가집니다. 독립투사는 생명부지를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면서 독립운동을 했고, 어떤 자는 일본의 개가 되었습니다. 다까끼 마사오는 일본의 개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캐나다님의 위의 논리를 따른다면 박정희라는 인간이 애국심이나 사명감을 갖고 그 짓을 했을 가능성은 거의 0%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무리 사기꾼이라도 일관성이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오캐나다님은 박정희라는 자의 애국심과 사명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희생당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끼워주길 원하시는 모양이군요. 님과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파시스트 횡포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대의는 어느 누구도 정당한 법적 절차없이 희생당해서는 안된다는데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깡그리 뭉게버린 사람이 바로 박정희이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사람이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그는 그냥 친일분자였고 쿠데타 주동자였고, 독재자였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사람들이 갖는 의식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누군가 50년 후에 오캐나다님과 저의 의식을 비교하면서 님과 저의 의식이 그 당시에는 그랬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님과 저의 현재의 사고의 차이를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로 가보거나 모두 일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많고 차이도 거의 반복적인 pattern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반복컨대 우리는 로봇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이며, 그런 이성적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자기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정치권력의 선전에 압도되어 있는 상황이라도 인간의 이성이 사물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내재화시키는 것은 책임적 이성의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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