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이 글에는 <스토리텔링> 기법을 가미하여 제가 임의로 상황을 재구성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보도된 자료들을 토대로 <사실>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연성을 최대한 고려하여 재구성했으나 관련자들의 <대사>나 디테일한 상황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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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년 7 월 26 일 아침,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소재하고 있는 동아일보 사옥 주차장에 험상궂게 생긴 사내들을 가득 태운 승용차 세 대와 미니 밴 한 대가 들이닥쳤다. 승용차와 미니 밴 안에서 쏟아져 나온 사내들이 본관 출입문을 향해 몰려오자 회사보안요원들이 급히 달려 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운 날씨인데도 가죽점퍼를 차려 입은 40 대 사내가 잠자코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안요원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이었다.
분당 샘물교회 선교단원 23 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사건 때문에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이 날, 서울중앙지검 공안 1 부 수사관들은 신동아 취재기자와 동아닷컴의 메일계정이 보관돼 있는 동아일보사 전산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하려다가 회사보안요원들로부터 연락을 받고 몰려나온 기자들과 신문사 직원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일단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검찰이 신문사를 수색하려 한 이유가 황당했다. 어떤 기사에 대한 취재원을 찾아내기 위해서 출동했다는 것이다. 두 달 전쯤 발간된 신동아 6 월호에 실린 <박근혜 X 파일>에 관한 기사가 문제였는데, 이 기사에는 박근혜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전 구국봉사단 명예총재에 대해 수사했던 수사책임자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려있었다.
sarnia 도 그 신동아 인터뷰 기사를 읽어봤지만 기사 내용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중 극히 일부를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빌려 기사화한 것뿐인데, 그나마 박근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고 최태민에 대한 정보도 하나마나 한 맥 빠진 소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왜 언론탄압이라는 말썽이 일어날 것을 무릅쓰고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 받아 동아일보사에 들이닥친 것일까? 더구나 당시는 참여정부가 집권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검찰은 <신동아> 6 월호에 나온 기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정보원 직원이 <박근혜 X 파일>과 관련된 수사기밀 중 일부를 그 기사를 쓴 신동아 기자에게 넘겨 준 정황을 포착하고 국가정보원 직원의 <기밀누설혐의>를 수사하기 위해 신문사 전산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려 한 것이었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신동아 기자에게 전달했다는 수사파일은 언제 작성된 것이고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긴 파일이길래 검찰이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전산실을 뒤지러 신문사까지 몰려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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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신동아> 압수수색을 시도한 그 날로부터 30 년 전인 1977 년 봄.
종앙정보부장실에 설치된 빨간색 경비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대기 시작했다. 빨간색 경비전화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연결된 직통전화였다.
“예, 각하! 김재규 전화 받았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는 전화이니 당연히 대통령일거라 생각하고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몹시 화가 난듯한 20 대 중반의 여자였다.
“부장님, 부장님이 뭔데 남의 <프라이버시>를 조사하고 다니는 거죠? 당장 그만두라고 지시하세요! 중앙정보부가 그렇게 할 일이 없나요?”
“이 봐요, 큰 영애! 나는 다만……”
다만 각하의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상대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상대가 자기 말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쏘아 부치고 전화를 끊어버린 데 대해 몹시 화가 난 김재규는 수화기를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뭐, 이런 X이 다 있어! 건방진 X”
그가 새삼스럽게 열이 뻗친 이유는 단지 방금 <큰 영애>로부터 얹잖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 영애>의 전화를 받기 십 여 분 전에 <지금 당장 안전국장을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받고 안전국장 백광현을 수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건설부 장관을 하다가 느닷없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을 받은 것은 작년 (1976 년) 이었다.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에게 부임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김재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민정수석비서관 박승규가 차나 한 잔 하자며 자기 방으로 불렀다. 민정수석실에는 경호실장 차지철이 먼저 와서 소파에 앉아있다가 “아이고 김 장관, 아니, 이제 김 부장이지요. 축하합니다” 하면서 앉은 채로 너스레를 떨었다.
민정수석 박승규가 그에게 두툼한 노란 서류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최태민 파일>이었다. 1975 년 1 월경부터 어디서 <사기꾼 같은 목사 놈>이 하나 나타나 <큰 영애>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구국봉사단이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재벌들로부터 돈을 갈취하고 있는데 그 규모와 원성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기업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건사회부를 앞세워 여성단체 등 관변조직까지 틀어쥐고 전횡을 일삼는데 <큰 영애>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영감태기 목사>를 결사적으로 싸고도는 바람에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박승규의 결론인즉슨, 자기가 운영하는 경찰비선조직으로는 이 작자를 조사하고 견제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중앙정보부가 이 문제를 맡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큰 영애가 맹목적으로 싸고 돈다는 최태민을 조사해 온 기관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제 1 대였다.
치안본부 특수수사대는 제 1 대와 제 2 대 두 개의 조직이 있는데 제 1 대는 대통령 친인척관련 범죄를 수사하는 조직이고 제 2 대는 고위공직자들의 비위를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이 두 개의 특수수사대는 명목상 내무부 치안본부 형사국 소속으로 되어 있지만 치안본부 형사국장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의 지휘를 받으며, <제 2 대>는 사정담담비서관에게, <제 1 대>는 민정수석비서관에게 각각 직접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말이 경찰비선조직이지 대통령특명사건을 다루는 청와대 직속 암행어사 팀이나 다름없었다.
이 두 개의 조직 중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하고 감시하는 <제 1 대>는 종로구 사직동에 본부를 두고 있으므로 일명 <사직동팀>으로 통했다. 큰 영애와 최태민의 문제를 내사해 온 조직이 바로 이 <사직동팀>이었는데, 이 사직동팀을 지휘해 온 민정수석이 <큰 영애> 등쌀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그 동안 수집해 온 내사자료와 함께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신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서 떠 넘겨 버린 것이었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제 6 국장 (안전국장) 백광현에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부터 <최태민 파일>을 넘겨 받아 조사를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안전국장 백광현은 수사팀을 꾸린지 두 달도 안 돼 최태민에 대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의 비위혐의 목록을 작성해서 김재규에게 보고했다. 최태민 혐의: 횡령 14 건, 사기 1 건, 변호사법 위반 11 건, 권력형 비리(기업 등으로부터 금품갈취) 13 건, 이권개입 2 건, 융자간여(금융거래법 위반) 3 건 등 모두 44 건 외 성추문 12 건
최태민은 1912 년 5 월 5 일 생으로, 이 내사보고서가 작성된 1976 년 기준으로 64 세였다. 경력이 희한했는데, 조금 늦은 나인인 1926 년 보통학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년경부터 해방 당시까지 주재소 순사 (일본 경찰)를 했다. 해방 후에는 비공식 군부대 문관을 했는데, 그만 둔 이후에는 절에 들어가 스님행세도 했고, 대전에 가서 인근 점집 무당들의 존경을 받으며 <도사>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영생교를 창립해서 신도 300 여명을 모아놓고 교주 노릇을 하다가 슬그머니 목사로 전업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호적상 개명을 한 번 한 것을 비롯해서 모두 여섯 번에 걸쳐 이름을 바꾸었고, 결혼 역시 여섯 번 했다. 최태민은 1974 년 8 월 15 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가 저격 당해 사망하자 이듬해인 1975 년 1 월 <국모님이 꿈에 나타나 장래 나라에 큰 일을 할 큰 딸을 도와주라고 하셨다>며 <큰 영애>에게 편지를 연달아 세 통을 보냈는데 그 편지 세 통을 연달아 읽은 <큰 영애>가 감동을 받았는지 아니면 계시를 받았는지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들이더니 그때부터 둘이 함께 붙어 다니면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당시, 즉 1976 년 이미 대통령 박정희에게까지 보고됐다. 비위사실 중에는 <큰 영애>의 파워를 빌린 최태민이 국세청에 압력을 넣어 <구국봉사단 성금납부>에 비협조적인 기업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는 내용과 그런 기업들 중의 하나인 대한농산(주)의 양곡도입권을 박탈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보고들이 올라왔을 때만해도 박정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중앙정보부가 그런 것까지 조사하느냐> 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1977 년 봄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백광현 조사팀>은 <큰 영애>와 최태민의 권력남용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정 내사팀은 사직동팀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서 새로운 보고서를 작성해 올린 게 분명했다.
박정희는 그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격노했고, <큰 영애>를 보좌하고 있는 청와대 제 2 부속실장에게 엄명을 내려 지금 당장 <큰 영애>를 데려오라고 호령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도 전화해서 지금 당장 조사책임자인 안전국장 백광현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올라오라고 지시했다.
<큰 영애>는 청와대 제 2 부속실장으로부터 사태의 전말을 보고 받고 분에 못 이겨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서재로 가기 전에 아버지 집무실에 설치된 직통전화를 이용하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쏘아 부친 것이었다. 박정희가 그들을 한 날 한 시에 모두 불러들인 것은 이른바 <친국>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이 날 친국의 결과는 의외였다. 이 사건 자체를 그대로 덮어버린 것이다.
이후 <최태민 조사>는 중단됐고,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이 사건은 더 이상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날 <친국장>인 청와대 서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단 네 명뿐이었다. 대통령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중앙정보부 안전국장 백광현, 그리고 <큰 영애> 가 그들이다. 그로부터 2 년 후 10.26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의 <백광현 보고서> 사본은 10.26 사태가 발발하기 직전 김재규에 의해 재미교포 언론인 손충무에게 전해졌다는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1980 년 4 월 14 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게 된 전두환은 비로소 이 사건에 대한 전설적 내막을 보고 받고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국장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처장 이학봉에게 이 사건 재조사를 명령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소하지 않고 다만 최태민을 강원도 소재 군부대에 약 1 년 간 연금해 前<큰 영애>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탈법적이고도 이상한 행정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에 대한 마지막 조사는 노태우 정권 때 이루어졌는데 이 때도 조사가 도중에 흐지부지됐다. 이 때는 前<큰 영애>가 그녀의 동생 박서영과 육영재단을 놓고 재산권 분규를 벌이는 과정에서 1990 년 11 월경, 박서영이 노태우에게 <제발 언니를 최태민의 마수에서 떼어놓아달라>는 황당한 탄원을 하면서 조사가 시작됐었다.
그러다가 이 사건은 2007 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간의 <BBK 對 최태민파일> 진검 결투과정에서 잠깐 대두되었었다. <신동아> 가사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담당 기자가 간이 작은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데스크가 압력을 받았는지 기사 자체는 별 내용이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2007 년 7 월 26 일과 27 일 양일에 걸쳐 검찰이 찾으려 한 <X 파일>은 이른바 1977 년 봄 박정희에게 건네졌던 <백광현 보고서>의 사본이 그 이후 수사과정에서 보강된 <박근혜 X 파일> 진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 검찰이 백주대낮에 체면불구하고 <보물지도>찾는 해적 떼처럼 신문사에 난입하려다가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해괴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국정원의 누군가가 그 파일을 기자 또는 다른 취재원에게 넘겨주었을까? 넘겨주었다면 그 파일은 지금 누가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박정희가 격노했으며 더 이상의 조사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아마도 이건 대선 후보로 나설 당시의 <큰 영애>가 반드시 해명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분명해 보인다.
2011-07-03 (MST) sarnia (clipboard) 아래 사진들은 펌
(1968 년 호주 뉴질랜드 하와이 방문 도증 서사모아를 들른 박 대통령 부부와 큰 딸 근혜 (당시 성심여고 2 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