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비님, 안녕하세요.
저한테만 의견을 물으신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저의 의견을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최근에 글을 전혀 올린바가 없고 또 제 생각이 정리가 안되고 또 바빠서 미루다보니 즉각적으로 제 생각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구원에 대한 신학적 이론” (soteriology)에 대해서 말씀드릴려고 하니 막막하기만 하군요. 저는 베드로나 토마가 구원받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는 마치 신은 존재하냐 그렇지 않느냐 증명해 보라는 논제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나름대로 기독교의 soteriology를 설명하자면 세 유형으로 나눠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째, 예수의 본질 (essence)에 관심을 갖는 보수 복음주의적 입장입니다. 캘거리의 보수복음주의 한인교회 100%가 이 유형을 따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의 초자연적 능력과 그러한 초자연적 능력을 신뢰하면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입니다. 여기에는 칼빈주의 예정론자처럼, 예수를 창세전에 믿도록 예정되었다고 생각해서 실체화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경우인데 주로 장로교인들이 이런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라는 실체를 경험적으로 믿는 복음주의자들인데 감리교도들의 일부, 순복음, 침례교회, 재침례교회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인간 예수 자체를 믿음의 대상으로 갖다보니 상당히 힘이 있고 사람들이 예수라는 인물에 헌신 (commitment)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유형의 좀 부정적인 대표적인 예로는 한국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비교적 얌전한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극단적인 신앙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이것을 이상형 (ideal type)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인들은 반지성적적 경향성을 상당히 많이 보입니다. 한국에서는 조용기, 곽선희, 장경동, 이재록 목사 등등이 모두 이런 유형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개인적 죄만 강조하고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무지할 뿐 아니라 침묵합니다. 이들에겐 개인적 도덕성을 강조하겠지만 사회윤리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개신교회의 난동은 사회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비님께서 저한테 주신 질문은 바로 이 첫째 유형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 해방자 예수에 대한 관심입니다. 즉 사회적 실재로서의 예수에 대한 관심입니다. 예수의 개인적 인물됨보다는 예수의 사회적 실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인데 한국의 민중신학이나 남미의 해방신학, 고전적 신학 형태는 사회복음주의 (Social Gospel)가 이 유형에 속합니다. 이들은 구원이란 개인적 개종 또는 회심 (conversion)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소외 (alienation)로부터의 해방으로 봅니다. 타락 역시 개인적 도덕적 타락보다는 인간이 신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경제적 계급적 문화적 소외로부터의 극복을 구원의 과정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소외로부터의 해방이 기본 테제가 되는 것이죠. 즉 sin=>alienation로 전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이 신과 인간의 옳바른 관계라고 정의내린다면, 사회적 소외의 극복은 바로 신과 제대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구원론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교회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이 강부자 고소영들이 많은데, 이들은 한국에서 주로 강남에 거주하며 중산층 이상의 "계층"을 이룬 사람들인데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주로 보수복음주의자로서 개인적 죄에 주로 관심을 보여 줍니다. 상당히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실제로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거나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갈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교회에 다닐 수 있겠습니까? 예수 당시에도 평신도 집단인 바리새인이라는 엘리트 계급과 성직자 계급인 사두개인들이 종교적인 삶을 살았지만 일반 대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바로 죄인으로 낙인받은 (labeled)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는 인식을 해방론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것의 장점이라면 이쪽의 기독교인이나 신학자들은 사회과학적 인식이나 이해력을 상당히 높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에서는 연합교회나 성공회의 소수가 이런 전통을 지금도 잇고 있는데 이 구원론의 단점은 대중성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일반적 성향은 팝스타 (목사)를 찾아 다니는 대중들과 흡사한테 그들이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에 관심을 가지기엔 만무하지요. 한국에서는 고 서남동, 안병무 교수 등이 있으며, 상당히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김진호 목사가 이런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혜자 예수를 통한 깨달음 (enlightenment)에 초점을 맞추는 기독교입니다. 이 구원론은 예수가 신의 아들 또는 신이 보낸 메시아, 즉 구원의 능력을 주는 saving power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찾는 예수입니다. 이런 구원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상당히 철학적이며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구원론입니다. 언젠가 제가 여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근본불교는 no God 또는 no trans-divine being이고, 철저히 깨달음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듯이, 지혜자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예수가 실천하고 가르치고 보여준 인품과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으로 보면 함석헌, 유영모 등입니다. 이 세번째 유형 또한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궁극적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니 예수의 지혜니 석가의 지혜니 등등엔 별로 관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대승불교 중에서 정토종은 위의 첫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토종 계열의 불자들은 부처의 불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데 반하여 불교에서 깨달음 전통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제 3의 전통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토마 (도마Thomas)가 의심이 많았다는 것은 그가 의심이 많아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았다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깨달음을 향한 질문을 열심히 던진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탐구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토마는 이 지혜 예수 (Wisdom Jesus)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규명되지는 않아서 같은 인물이라고 볼 가능성은 없겠지만, 도마 복음서 (The Gospel of Thomas)도 역사적 예수보다는 지혜자 예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동양사상과 동양종교 전문가, 그리고 기독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종교학자 오강남 선생의 도마복음 해설서인 [또다른 예수]도 이 계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이니 읽어 보십시오. 저도 빌려서 다른 학자들이 쓴 영문해설서와 이 책을 비교하면서 묵상하듯이 읽고 있는데 훌륭한 책입니다. 이 지혜자 계열의 사람들은 유형 1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지만, 유형 2에 대한 관심은 좀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늘 아쉬워하는 경우입니다. 유형 2와 3이 결합하면 다 강력한 구원론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의 세 유형 (three types)는 순전히 저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저는 어디에속하느냐고 질문하실 수 있는데, 저는 위의 유형의 30-30-30 정도로 골고루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좀 보수적입니다. 제가 100-100-100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저 역시 위의 각각의 유형의 장점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는 학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저는 토마처럼 많은 질문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회의는 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며, 아직도 제 신앙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형성 중 (in the making)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