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가을이네요. 어쩐지 세월이 점점 빨리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2008 년부터는 한국 갈 때마다 태국 갔었는데, 올해는 오랜만에 태국 안 갑니다. 중독이 될 정도로 매력적인 나라였는지 막상 올해는 안 간다고 생각하니 <금단현상>이 일어나네요. 대신 세부 (Cebu) 다녀오는 대한항공 add on으로 발권했습니다. 총 19 박 20 일 일정입니다. 세부에서는 나흘 간 머물 예정입니다. 제가 왜 갑자기 세부에 가기로 했는지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비행기표 샀으니까 지금부터 그 이유를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예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가는 일정이 좀 피곤합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입국하지 않고 곧바로 환승하여 세부까지 날아 갑니다. 에드먼튼 집을 나서는 시간이 출발일 오전 9 시인데 세부 호텔에 check-in 하는 시간을 따져보니 다음 날 아침 오전 11 시 (현지시간은 + 2 일 새벽 1 시)쯤 되는군요. 총 26 시간에 달하는 기나 긴 여정입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non-stop long trip 이 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인천-세부 구간은 마닐라를 경유하지 않는 직항이라 좀 낫긴 합니다. 언젠가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서 토론토로 직항하는 초장거리 에어캐나다에 탑승하기 위해 줄지어 들어가는 승객들을 발견하고 안됐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그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게 생겼네요. 밴쿠버 출발 비행기가 인천서울공항에 정시에 도착해 준다면 KAL 라운지에 들러 잠깐 샤워할 짬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 올 가을에 가기로 한 곳은 베트남이었는데 내년으로 미루었습니다. 베트남 여행을 위해서는 최소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를 확보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할 일이 많아지는 바람에 그렇게 긴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대신 교토에 가서 유유자적하다 오려고 backup plan을 짜 놓았는데 웬일인지 일본에 가기 싫어졌습니다. <독도>나 <원전>때문은 아닙니다, 좀 엉뚱하지만 제가 사는 나라보다 물가가 비싼 나라에는 가기가 싫다는 오기가 갑자기 생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부 막탄 아일랜드>에 있는 리조트에 가서 며칠 쉬다가 한국에 가기로 했습니다. 아니, 리조트로 갈 지 시내 호텔로 갈지 숙소는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세부는 주로 <허니문>이나 이혼을 앞 둔 이별여행, 아니면 가족 친구단위로 가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혼자 갑니다. 바다보고 감동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편도 아닙니다. 세부에 가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오션투어 떠날 때 쓸쓸하게 숙소에서 빠져 나와 다운타운 뒷골목을 빌빌 싸돌아 다니거나, 덥고 냄새나고 소매치기들이 우글거린다는 카르본 재래시장 같은 곳에서 노점 바비큐나 사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깨달은 게 두 가지 있는데, 첫째, 계획을 짜는 것 보다는 디테일하고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 둘째, 어디에 가던, 다녀와서 주로 남는 것은 사람에 대한 기억이더라는 것 입니다. 현지에서 장기여행자든 로컬이든 붙임성 있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장시간 이야기하는 기회를 한 번 이상 만들곤 했는데,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여행을 더욱 값진 기억으로 남게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근데 <세부>라면, 그곳에서 말상대해 줄 친구를 찾는 것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친구를 <세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만들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밴쿠버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는 자기 고국을 방문하는 필리핀계 북미교포들이 아주 많이 탑니다. 어떤 때는 이게 대한항공인지 필리핀항공인지 헷갈려서 어리둥절할 때도 있습니다. 승객들의 출신 나라별 분포도 시대에 따라 변천을 하는 모양입니다. 1990 년대 초반에 대한항공 북미노선은 마치 일본항공 같았습니다. 일본어 안내방송도 나왔습니다. 1990 년대 말부터는 대한항공이 중화항공으로 변했습니다. 안내방송에 캔터니스/만다린이 추가됐습니다. 앞으로는 대한항공 북미노선 기내 안내방송에 베트남어와 필리핀어를 추가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난민으로 또는 하층이민으로 북미에 정착한 동남아 사람들이 과거에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고국방문을 하지 못하다가 차차 기반을 잡고 여유가 생겨서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좋은 일입니다. 제 옆자리에 필리핀계 승객이 앉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운동-산책 시간에 갤리 부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은 많습니다. 근데 희한한 건 지금까지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필리핀계 전부가 세부 출신이라는 것 입니다. 전부라고 해봐야 열 명 안쪽이지만 암튼 그렇습니다. 세부보다 큰 도시인 수도 마닐라도 있고 다른 지역 출신들도 많을 텐데 이상한 일 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들에 의하면 밴쿠버에서 마닐라로 직항하는 필리핀항공이 서울로 돌아가는 대한항공보다 비쌀 때가 많다는 것 입니다. 둘째, 필리핀항공의 밴쿠버 출발시각 (오밤중) 과 마닐라 도착시각 (꼭두새벽) 이 요상 망측해서 특히 세부로 가는 승객들의 경우 필리핀항공을 이용하면 아주 피곤하다고 합니다. 삼천포로 빠지려고 하는 이야기 모가지를 끌고 와서 결론을 맺자면, 함께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시간이 11 시간이 넘고 인천공항 대기시간 세 시간에다가 세부까지 비행시간 네 시간 반, 모두 합해 열 여덟 시간이 넘는데, 이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동안 나의 첫 세부 여행을 보다 짜임새있고 수월하게 만들어 줄 세부 출신 친구 한 명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재수가 없어서 가는 날 따라 세부로 가는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언어가 통하는 세부 출신 친구를 비행기 안에서 사귈 수만 있다면, 외국인인 나 혼자서는 접근하기 어렵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는 필리핀 지방도시의 구석구석을 비교적 부담 없이 돌아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환전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벌써 깔끔하게 해결했습니다. 제 친구 중에 세부 출신 처자가 한 명 있습니다. 제가 세부에 간다니까 반가운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 주다가 환전 이야기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그 처자가 2 만 페소까지는 자기가 환전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얼씨구나 하고 제가 출발하기 일주일전에 그 날의 매매기준율로 환전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환율을 보니까 캐나다화 1 달러는 약 43.39 페소입니다. 그럼 저는 지금부터 <세부>에 대해 공부를 하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