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펌
-------------------
세부(Cebu) 시내 길거리에는 아이들이 많다. 어른과 함께 있는 아이들보다는 그들끼리, 또는 혼자 있는 경우를 더 많이 보았다.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세 명의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들은 일하러 간 것일까?
잘 모르겠다.
어디서든 구걸하는 아이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원 페소 플리즈> 라는 입에 달고 다닌다. 섣부르게 한 아이에게 돈을 주는 순간 당신은 어디선가 몰려 온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돈을 주는 것 보다는 먹을 것을 사 주는 게 바람직하다고 한다.
저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 보았다.
햇볕에 화상을 입은 것 같은데 가까이 다가가자 찌는듯한 더위에 상처가 부패하는지 악취가 진동한다. 아무도 거들떠 보는 사람은 없다. 나이는 종잡을 수 없지만 얼굴이 앳돼 보인다. 열 다섯 살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제대로 보도블럭이 깔린 이 곳, 저 철조망너머로는 교회(성당) 건물이 우뚝 서 있다.
표정이 맑다. 그런데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20 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노점상 청년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다.
Colon 재래시장 부근 거리에서 만난 이모와 조카다. 온 가족이 함께 노천식당을 운영하고 있단다.
모녀인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모와 조카 사이다.
조카는 나에게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디에서 묵고 있는지? 별 걸 다 물어본다. 성격이 밝고 적극적이다.
세부는 작은 도시인데도 지역에 따라 주민들이 외국인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르다. 당신이 구 시가지나 거주지역에 들어갔다면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가운>이라는 말은 <적대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하며 호기심이 넘친다.
먼저 웃어주자.
그럼 그들도 당신을 향해 활짝 웃어 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있다면 아이 엄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한 번 안아줘도 좋다.
친구가 되는 것과 적이 되는 것은 첫 만남 30 초 동안 당신이 하기 나름이다.
왼쪽 짧은 머리는 이 거리에서 처음 본 외국인이다. 이 거리에 외국인은 거의 없다. 아마 올 일이 없을 것이다.
거리를 걸어가다가 소매치기나 날치기를 당했다면 그건 당신이 잘못이다.
명심하자.
그들이 당신의 소지품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지금 그들의 구역을 침범한 것이다.
이 거리에는 당신의 목걸이나 지갑 따위를 지켜 줄 경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치안개념은 <1 % 의 재산에 대한 경비> 개념이지 민생치안이 아니다.
낡고 초라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이 곳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 된 유서 깊은 거리들이다. 멀리 산토니뇨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세부는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대학들이 많다. 내가 아는 세부 처자 (에드먼튼 거주)도 이 도시에 있는 St. Carlos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대학들은 주로 구 시가지 빈민가에 자리잡고 있다.
빈민가? 하긴 세부에 빈민가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과 무장경비들의 철통같은 저지선 뒤에 숨어있는 리조트와 특급호텔, 라훅-비버리힐즈 지역의 <1 %> 거주지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이 판자촌이고 빈민가니까......
구 시가지에서 한참을 걸어나오면 거주지역이 시작된다, 대충 이런 모습이다. 도대체 어디가 거주지역이고 어디가 상업지역인지 잘 구분이 안된다.
가장 보편적인 세부의 주상복합...... 이런 곳이 널리고 깔려있다.
출근시간이다. 주민들이 지프니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다. 아침부터 웃통을 벗어부친 사람들도 많다.
<No Shirt No Service> 이런 말이 세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흠, 이번에는 조수석에 누군가가 미리 앉아있다. 할 수 없이 뒷 자리 맨 앞에 앉았다.
자, 모두 주목해 봐요~~ 내릴 때 차비는 나한테 주세요. 잔돈 준비해서, OK?
지프니가 태국 쏭태우와 다른 점이 있다.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매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매개란 다름아닌 승객들간의 요금 전달이다. 요금과 거스름돈을 서로 전달하면서 현지인 승객들과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고 대화할 수 있다. 더구나 태국과는 달리 이 나라에서는 영어가 통한다.
차도 한 가운데로 신문과 생수, 까치담배등을 파는 행상들이 몰려다닌다. 그들 대부분은 이 시간에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소년들이다.
여기는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SM Mall 이다. 세부에는 두 개의 몰이 있다. SM 과 아얄라가 그 곳이다.
세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름아닌 Security Guards 다. 이들은 모두 권총과 테이저건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1 % 와 99 % 를 가르는 최전선은 바로 이 무장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희한하게도 세부에서는 정작 경찰을 보기가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복경찰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곳곳에 깔려 있는 무장경비 (armed security guards)들이 출입자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진짜 세부를 보고 싶으면 저 계층 경계선을 넘어 바깥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샹그릴라나 힐튼 리조트는 세부가 아니다. 그곳들은 그냥...... 외국인 수용소라고 해 두자.
-----------------------
무엇을 할 것인가?
니꼴라이 쩨르니셰프스키의 책 제목도 아니고, 레닌이 했던 유명한 질문도 아니다. 세부 (정확한 발음은 씨부에 가깝다)에서 첫날 밤을 보낸 담날 아침 숙소 침대에서 잠을 깨자마자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모법답안은 이미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첫 날 호핑투어를 하고, 마르코폴로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놓은 버페를 즐기고, 탑스힐 전망대에서 칵테일을 한 잔 하며 멋진 야경을 감상하고, 담날 아침에는 고속페리를 타고 보홀 아일랜드로 건너가 초콜릿 힐과 타르시어 원숭이를 구경한 다음, 이국적인 정취 물씬 흐르는 로복강 리버크루즈에 참가하고, 관광객들을 위해 꽃단장한 채 미리 기다리고 있는 원주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마지막 날에는 스파에서 황제마사지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공항으로 간다……
떠나기 전, 세부에 대한 정보들을 검색했을 때 sarnia 는 이 모범답안 이외의 다른 대안이 있다는 이야기를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온라인에 차고 넘치는 세부 이야기는 거의 모두 호핑투어와 리조트 라이프, 보홀 투어에 관한 것뿐이었고, 시간이 남으면 마지막 날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시내에 있는 산토니뇨 성당이나 한 번 들러 보라는 조언이 전부였다.
여행 안내서들마다 한결같이 하는 조언이 있었는데, 시내 유적지를 갈 때는 개별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지프니 같은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등 이었다.
내가 접한 정보들의 의하면 세부 길거리는 소매치기와 강도, 걸인들이 우글거리며 외국인 여행자들의 호주머니나 노리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캐나다 외무성 홈페이지에서는 아예 <반드시 가야 할 일이 없으면 가지 말라>는 충고를 친절하게 하고 있었다. 출발 며칠을 앞두고 세부에서 한국 국적의 30 대 사내가 납치됐다가 풀려났다.
의문과 함께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
창문 블라인더를 걷었다. 세부섬과 막탄섬 사이의 해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망망대해 너머 어렴풋이 다른 섬이 보였다. 보홀섬이었다.
벽에 걸린 TV를 켜자 BBC News가 나왔다. 이 나라의 수도 마닐라에서 태풍으로 십 수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짙은 잿빛이었다.
뭐하지? 하고 딱 5 분 정도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다른 사람들이 해 보라고 추천한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만 전부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내가 청개구리여서가 아니다. <모범답안>에 나와 있는 일정과 장소에 대해서는 똑 같은 이야기를 하도 많이 읽어서 굳이 가 보지 않아도 그 스토리의 전개와 결말이 뻔히 보였다.
모든 행동에는 동기유발이 중요한데 뻔한 스토리와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행동에 동기유발이 일어날 리 없었다. 더구나……호핑투어 같은 걸 하려고 스무 시간이 넘게 비행기타고 날아오지는 않았다.
그래. 그냥 여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나 보고 돌아가자.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거 같아......
sarnia
추신: 올해 여름 동남아를 휩쓴 홍수와 태풍으로 필리핀에서만 400 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경작지의 6 % 가 침수됐다. 곡물가격 폭등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데, 국제곡물독점자본은 또다시 대규모 매점과 투매행위를 반복할 것이다. 올해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까...... 세부에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무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