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넘어선 목회자들
나도증인
교회 내에서 목회자에 대한 여 성도들의 관심과 배려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례들이 있다. 지난날 상담과 영성훈련을 통해서 겪은 몇 가지 사례가 있다. 가끔 새벽기도 때 이상한 옷차림으로 불쑥 목회자 방으로 들어가 안수를 부탁하는 사람, 젊은 부목사 방에 혼자 찾아들어가 새벽시간에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 금요 철야가 끝나고 늦은 시간에 목회자 방에서 상담을 하려는 사람으로 인해 목회자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
또한 부목사에게 심방을 부탁해 선물공세로 환심을 사려는 사람도 있다. 애정결핍증으로 목회자가 자신만 사랑해주고 자신에게만 관심과 배려를 하라는 뜻이다. 그야 말로 빈 집에 자칫 목회자가 도적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업무상 담임목사 방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던 때도 있었다. 여 성도가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는 옷차림으로 안수를 받겠다고 주저앉아있는 모습에 당황했었다.
흔히 여 성도들은 목회자를 아버지, 스승처럼 따르다가 연민의 정을 느끼며 가까이 접근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와 아픔을 목회자를 통해서 위로받고 해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목회자를 의지하며 연민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목회자는 교인들과 속 깊은 상담은 금하는 것이 상담의 기본이다. 그것을 놓치는 목회자는 결국 목회자가 피해자가 되어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목회자를 남편처럼 섬기는 사람도 있다.
온갖 부흥회까지 따라다니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리고 교회출석과 봉사에 열심을 다한다. 목사를 선대하면 복을 받는다는 명분으로 일 거수 일 투족입안의 혀처럼 맹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집은 텅 빈 집으로 비워 놓은 채 맹신자로 전락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목사를 우상화 시키는 요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어찌 보면 한국교회는 여 성도들이 타락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항상 섬김을 받는 쪽에서 목회자가 먼저 냉철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영적인 문제들이다.
사정거리는 바로 생명선이다. 이 사정거리를 목회자가 생명선으로 지켜야 사고를 예방한다. 누가 목회자를 신성하게 보라했는가. 목회자도 사람일 뿐이다. 사람은 보암직도 먹음직한 음식에 젓가락이 쉽게 가기 마련이다. 이번 사건도 교회 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쌍방에 문제가 숨어 있을 것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목회자를 우상화하기 쉽고 은혜를 준 영적인 지도자로 생각하기에 목회자를 신성시하며 신격화시켜 신비감으로 다가가기 쉽다.
서로가 목회자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려는 집착은 도를 넘어선 상태로 보인다. 젊은 여성도가 새벽기도, 철야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도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 있다. 한참 남편과 아이를 돌보며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며 잠시도 서로가 마음과 눈에서 떠나지 않아야 할 시기다.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하고, 곤한 잠 재워 남편을 출근시킬 시간에 새벽에 교회에 앉아있는 것도 무리한 삶이다.
자연스레 빈 집이 되니 남편이 아내가 교회에 매달려 사는 것을 거부 할 수밖에 없다. 대 다수가 정상적인 판단력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가끔 교회에 열성적인 사람 중에 이러한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전례가 있다. 그래서 냉철한 판단은 목회자가 구분해야 할 영역이다. 결국 무분별한 행위로 영적인 면과 사생활을 구분하지 못했기에 목회자에게 책임이 더 크게 닥쳐오는 위기가 된다.
좁은 길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사역자들도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양적인 성장을 기반삼아 자신들을 신격화 시킨 잘못된 교조주의가 지금의 문제들을 야기 시킨 근원이다. 죄 성을 가진 인간은 감히 신성할 수도, 신격적인 인격을 갖출 수도 없다. 목회자를 신격화 시켜버린 한국교회 성도들도 함께 이 문제를 짊어져야 한다. 목회자도 일반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죄를 지은 죄인이다. 단지 신학을 공부했을 뿐이고 목사직은 이미 직업이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미 부동산투기가 되어 사고파는 물건이 되었다. 팔고자 할 때 성도 숫자에 따라 프리미엄이 붙는 물건으로 전락 되어 버렸다. 성직이 직업의식으로 돌아가는 흐름에서 어찌 황제가 나오고 금송아지가 걸어 다녀서야 되겠는가. 권세 높은 대형교회목회자는 죄를 짓고 온갖 치부가 다 드러나도 여전히 건재하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목회자는 죄가 없고, 다만 의인이기에 핍박 받고 있다는 것으로 자랑스럽게 까지 생각한다.
마치 강대상 높은 곳에 금송아지를 세워놓고 섬기는 겪이다. 따라서 직분 자들은 교회가 시끄러우면 성도 숫자가 떨어진다는 인간의 생각으로 모두가 숫자에 미쳐있다. 참으로 한국교회 의인은 꼴불견들이 많다. 이번 사건도 교인을 내 것으로 착각한 독단, 독주라는 교만에서 일어난 사례다. 독단과 독주는 패망의 선봉자로서 사울의 전례를 따라 갈 뿐이다.
제 아무리 강대상에서 진리를 선포할 지라도, 또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격적인 책을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기애중독이다. 자기애는 자신의 탐욕으로 스스로 넘어진다. 이러한 성추행사건들로 인해 그나마 건실하게 남아있는 작은 그루터기 교회마저 넘어지게 하기에 말이다. 전능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숫자에 얽매이지 않는다.
전능자는 약속의 자녀들에게 다시 오신다는 약속만을 남겨두고 천하보다 소중한 한 생명을 위해 죽었다. 지금 우리 앞에 전능자는 과연 누구인가. 이 땅에는 전능자가 없다. 언제 까지 사람의 손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며 살 것인가. 금송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빈 집들을 찾아 영혼을 짓밟는 도적 떼다. 그래서 문단속은 각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