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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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여행 이야기>에는 일부 어르신들의 혈압을 올릴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
sarnia 또래 친구들은 엉터리 한국사를 배운 세대다. 어린 학생들에게 그런 역사를 가르친 곳은 놀랍게도 학교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머리가 약간씩 헷갈릴 때가 있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거꾸로 알고 있거나 일방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제도적이고 집단적 사기를 당한 후유증은 이렇게 무섭다.
가령 이런 것이다.
율곡 이이 하면 sarnia 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다른 거 아니다. 1592 년 조일전쟁이 발발하기 전 십만양병을 주장한 선견지명이 있는 관료이자 학자였다는 이미지다. 한참 나중에 당시 역사에 대해 다르게 평가한 자료나 책을 읽어보고 나서야 내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사기를 당한 게 거의 틀림없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지만 한 번 심어진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잘못된 사실을 올바른 사실로 수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공부를 다시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근데 뇌리 속에 한 번 깊게 새겨진 고정된 이미지를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맞는 새 이미지로 다시 수정하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한 번 해병은 기수열외를 당해도 영원한 해병이듯, 한 번 박힌 율곡 아저씨에 대한 어떤 이미지는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다시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깔끔하게 바뀌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내 이야기는 율곡 아저씨가 천사인줄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나쁜넘이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에 대해 각색해 놓은 일방적인 거짓말을 비판 없이 믿고 살아왔다는 게 좀 억울하다는 거다. 십만양병을 주장했든 아니든 율곡은 그 자체로 공과가 각각 따로 있는 인물이다. 신분제를 완화해 보려는 노력이나 민생복지를 늘리자는 주장을 한 것은 잘 한 일이고, 허응당 보우대사를 탄핵하고 유배해서 주살한 불교탄압공작에 참여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훗날 서인권력을 형성한 그의 제자들이 율곡을 쓸데없이 미화하고 각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 문제>는 율곡 자신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를 이용한 제자들의 문제이며 이후 노론-친일-뉴라이트로 그 인맥과 계보가 이어지는 <권력집단>의 문제다.
암튼……
최근에 와서야 율곡이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 앞에서 십만양병의 <십>자도 꺼낸 적이 없다는 학설이 압도적인 동의를 획득하고 있다. 새 학설의 근거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선조실록을 비롯한 1 차 사료에 그런 사실이 쓰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 예로 최근에 출간된 이주한의 책<노론 300 년>은 이 사연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십만양병설의 요체는 간단하다.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서애 유성룡이 반대해서 무산됐다는 내용이다. 그 내용이 이병도의 <한국사대관>과 진단학회의 <한국사>에 실렸다. 한 때는 국사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전 국민이 그렇게 믿었다. 국사교과서 집필권을 노론 후예 학자들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 책 제 8 장 오항녕의 극우파시즘 240 쪽에서 인용)
이병도와 진단학회로 대표되는 노론후예학자들이란 친일 史學과 뉴라이트로 그 인맥과 학맥이 연결된다.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당시의 기록에는 없다. 당시의 기록이란 율곡이 직접 집필한 율곡전서와 사관들이 작성한 선조실록을 말한다. 이 두 기록을 가리켜 1 차 사료라고 부른다. 1 차 사료에 기록이 되어 있어야 그 신빙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 차 사료에는 십만양병설에 대한 일언반구의 기록이 없다. 대신 반 세기 이상 지난 후인 1657 년 완성된 선조수정실록이라는 사료에 이 말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근데 이 선조수정실록이라는 수상한 기록은 언제 어떤 배경을 등에 업고 등장한 것일까?
조일전쟁과 선조수정실록이 만들어진 1657 년 사이에 엄청 중요하고도 비극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 사건만 없었으면 조선후기 근대사와 한반도 현대사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만큼 개x같은 사건이 하나 발생한 것이다.
1623 년 3 월 21일
그날 밤 조선의 비극은 시작됐다.
서인(西人)들이 지휘하는 반란군이 창덕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체포한 것이다.
이 쿠데타로 조선역사상 가장 탁월한 외교력과 자주정신을 보유했던 임금이었다고 할만한 광해군이 폐위되고, 거꾸로 조선 역사상 가장 머리 나쁘고 심성도 못 됐으며 비겁하기까지 한 능양군이라는 작자가 새 임금으로 옹립됐다. 단군이래 벌어졌던 최악의 정변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조반정>을 꼽을 것이다.
그 날 그 시간부터 조선은 온 나라의 권력과 금력을 완전하게 거머쥔 노론의 전횡아래 망조 들린 삽질을 거듭하다가 1910 년 8 월 29 일 결국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냥 나라를 빼앗긴 게 아니다. 사료를 멋대로 날조해서 자기 계보 사람들을 미화하고, 세종 이래 가장 걸출했던 외교전략가 광해군을 축출했던 그 계보의 후예들이 돈과 작위를 받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거 아는가? 1910 년 8 월 29 일 일본의 조선 병탄 후 은사금과 작위를 받은 76 명 중 57 명이 노론 계보에 속한 작자들이었다는 거.
그 와중에도 딱 두 명의 영리한 임금이 나타나 이 막강한 노론권력에 맞서보려 했었다. 한 명은 영조였고 또 한 명은 그의 손자 정조였다. 영조는 <탕평책>이라는 기똥찬 <조커>로 이들의 권력을 분산시켜보려다가 실패했다. 그는 결국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면서까지 노론권력에 사죄성 보상을 하고 나서야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정조는 좀 더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론권력에 저항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암튼 선조수정실록은 서인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에 재작성된 문서다. 그 문서에서 군비확장과 복지예산증액을 동시에 주장함으로써 <전천후 이중영웅>으로 등극한 율곡은 서인이었고, 그 문서에서 떡이 되도록 졸라게 씹힌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였다.
안동에 갔다. 병산서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패거리 문화에 굴복하기를 좋아하는 무개념 역사가들에 의해 엉뚱하게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많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억울한 누명이나 공정하지 않은 평가를 당하고 있는 인물 중에는 서애 유성룡도 끼어 있다. 병산서원은 그의 위패가 있는 곳이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병산서원 대신 도산서원을 가게 된 것이다. 계획에 없던 도산서원을 가게 된 사연은 이렇다.
안동역에서 여행정보 브로슈어를 수집하다가 타이완에서 왔다는 한 여행자를 만났다. 서른 안팍으로 보이는 이 타이완 여행자는 Korean Study를 공부하기라도 했는지 한국의 서원과 사찰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나중에 한자로 적어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이름 중에 華 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근데 이 분이 도산서원에 꼭 가 보았으면 했다. 안동역에서 도산서원을 운행하는 시내버스시간표까지 꼼꼼히 준비해 온 것으로 봐서는 작정을 하고 나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말을 나누며 친분을 튼 마당에 이제 와서 그럼 각자 갈 길 가자고 하기도 뭐했고, 그렇다고 내가 갈 병산서원에 같이 가자고 설득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도산서원 가는 길에 동행하기로 했다. 우연히 만난 우리는 그렇게 세 시간 동안 길동무가 된 것이다.
가고 오는 길 한 시간을 포함해 약 세 시간 동안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나의 처조카 보이프랜드가 타이완 출신이라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그 커플은 내가 캐나다를 출발하기 전 이미 깨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것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고……)
도산서원이 퇴계 이황의 위패가 있는 서원인 만큼 지갑 속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통해 이황의 초상을 보여주었다. 이 분은 이미 한국지폐 천 원권에 그려져 있는 초상의 주인공이 바로 이 서원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자기도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창덕궁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도산서원 역시 단촐 하고 검소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퇴계 이황은 단순히 안동사림 (士林) 을 대표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종결자다. 따라서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은 그 자체로 조선의 문화권력이기도 했다. 그런 곳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놀랐다. 생활에 필요한 것 이외에는 군더더기가 일체 없는 서원 구조를 보고 조금 감동도 받았다. 이걸 보면서 무려 500 여 년을 유지한 조선의 지배계급은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적어도 <천박한 가짜 noblesse>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은 군주국이었지만 사실 군주가 지배했던 나라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왕족이 아니라 사대부였다. 국왕의 권력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행정기관인 의정부와 6조 보다는 오히려 감찰-언론-문화학술을 담당했던 삼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만 보아도 세련된 통치 시스템을 갖춘 나라였음이 분명했다. 같은 시대 봉건제와 절대왕정이 차례로 지배했던 유럽보다는 어떤 면에서 문화적 선진국이 아니었을까?
ㅎㅎ 절대왕정 이야기하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하나 있다. 조선시대에 절대권력을 미친 척하고 휘둘렀던 국왕이 딱 한 명 있기는 했다. 연산군이 그 사람이다.
연산군은 왜 쫓겨났을까?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아니면 큰어머니였던 월산대군의 부인과 벌였던 그 아슬아슬한 로맨스 때문에?
천만에. 그가 쫓겨난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당대의 권력이었던 훈구대신들과 대립하고 그들의 돈줄인 과전을 폐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일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원수들이었던 훈구대신들에게도 아부하면서 그들과 사이 좋게 지냈더라면 왕궁 안에서 별 지랄을 다 했더라도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비는 훈구대신들의 대모나 다름없는 시어머니 인수대비 한씨와 권력투쟁을 벌이며 맞짱뜨다 폐비된 후 금삼의 피를 쏟으며 비명횡사했다.
조선시대의 국왕이 사대부의 권력계보와 대립한다는 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조중동과 대립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한 바보짓이었던 건 아닐까? 그 결과는 언제나 축출아니면 죽음이었으니까......
대한민국을 여행할 때 명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이따금씩 등장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몰상식>이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더라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길게 이야기하기는 싫고……
도산서원 관리사무소에 제안할 게 한 가지 있다. 이 표지석을 치우고 대신 이곳에 심어져 있는 <금송>의 내력을 알리는 설명문이 담게 있는 작은 표지판을 설치하면 어떨까 한다. 그 설명문 내용은 이렇게 해도 좋다.
<이 금송은 원래 청와대 경내에서 자라던 것인데 1970 년 12 월 8 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근무 중이던 박정희 씨 (1917~1979)의 행정명령에 의해 도산서원 이 자리에 옮겨 심은 것 입니다. >
그러면 이 금송을 보는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지나칠 것이다. 이 돌 표지석은 어쨌든 역사 유물인 만큼 그냥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지 말고 경내에 작은 보관소를 만들어 이 서원을 운영하면서 생겼던 다른 에피소드들과 함께 전시하는 것도 아이디어일 것 같다.
밀양과 안동, 두 도시는 방문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비슷했다. 밀양은 2 년 전인 2009 년 한국방문 때 갔었다. 낙동강이 주변을 휘감고 있는 모습도 비슷하고 차분한 도시의 분위기도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안동 주변의 산이 좀 더 험준하고 높아 보인다는 것이다. 밀양 출신인 점필재 김종직이 계보의 큰 형님이니만큼 조선 성리학 계보상으로는 밀양이 안동의 형님 도시인 셈이다.
참, <나는 가수다> 라는 컨셉을 가진 프로그램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나는 목사다> <나는 기자다> <나는 역사학자다> 등등……
전문가란 언제나 그 수요자인 대중의 평가와 검증을 통해 그 자격을 재심사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문가 집단 또는 개인에 대한 항시적인 재심사 구조가 확립되어 있어야 자기들끼리 협잡을 이루어 폐쇄적인 클럽을 작당하고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론을 날조해서 사기를 치는 일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여행 이야기였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