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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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모두 불교나라 라오스와 태국 상공에서 찍은 것들이다
(노래부르는 필리핀 아저씨 사진은 제외)
오해 때문에 절교하고 헤어졌던 친구와 오해가 풀려 다시 해후하는 마음은 어떤걸까?
그런 경험 없어 잘 모르겠다.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실망한 나머지 불교로 개종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본래의 예수의 이야기와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의 본질이 다를 게 없더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이 맞이하는 종교적 환희는 어떤걸까?
이것도 난 잘 모르겠는데 이런 경우 무지 많은 듯 하다.
여기 모태 신앙 기독교인이 있다.
그는 보스턴 출신의 미국인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 자기 종교와 결별하고 불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에서 불교 등 동양종교로 개종한 서양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역시 전통 기독교의 구원론에 영적 설득력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에 개종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교토로 가서 선불교의 Shunryu Suzuki Roshi의 제자가 됐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베이커 (Richard Baker)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But,” -he laughed- had I known the Gospel of Thomas, I would not have had to become Buddhist”
그의 이 말은 직역하는 거 보다는 조금 의역이 필요한데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토마복음을 비롯한 나그함마디문서의 진가를 그가 진즉 알았더라면 사복음서를 비롯한 성서와 예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했을 것이고, 만일 그랬다면 그가 굳이 불교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베이커 스토리는 요즘 읽고 있는 일레인 페이절스의 ‘Beyond Belief’ 에 소개되어 있다. 베이커를 센프란시스코의 어느 선불교 명상센터에서 만난 페이절스는 ‘he laughed’ 라는 필자주를 넣어 그가 불교로 개종한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베이커는 자기의 옛종교 기독교가 종교다운 모습으로 거듭나 줄 것 같아 기쁜 모양이다.
사실 무슨 소리를 둘러대도 전통 기독교 교리에 바탕을 둔 구원론은 파당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당적인 것과 보편적 진리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이것은 교리의 비과학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간에게는 유무식을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자아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무한욕구가 있다. 이런 무한욕구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기원후 4 세기 경 일부 교권주의자와 특정지역의 정치권력이 만들어 놓은 구원론은 마치 그 무한욕구를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길 찾는 사명’을 내맡겨 버리라는 말과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갑자기 이런 패러디 ‘명언’을 하나 만들고 싶다. (비록 "회의는 이성의 쉼터다" 란 말을 패러디한 거긴 하지만 sarnia 가 새로 개발한 말이니까 저작권을 존중해 주시기 바란다)
‘기독교의 전통 구원론’은 진리와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 영성의 쉼터다.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영성이라고 했다,)
즉 잠시 힘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장소는 되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는 쉼터라는 것이다.
물론 베이커의 경우와는 반대의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이어령의 경우가 그렇다. 공교롭게도 이어령과 베이커는 일본의 교토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는데 전혀 다른 걸 찾았다. 베이커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이어령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자기 말에 따르면) 각각 엇갈린 길을 간 것이다.
이어령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혹시……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이어령이 저 자기의 명언을 이렇게 고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의문이 지성을 낳는 건 맞는데,
믿음은 영성과 구분이 난해한 광신을 낳고,
믿음을 넘어설 때 비로소 진짜 영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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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하고 싶어서 올린 글이 아니다.
그냥 설날 연휴 기간 동안 골똘하게 생각을 할 화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