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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싸돌아다니다 드디어 오늘 깨달음을 얻은 여행자들에게 드리는 노래는 <펌>
예수 선생의 어록 중 멋진 말이 있다.
“Be passerby!”
Passerby 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란 ‘통행자’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나그네’ 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것이다.
사실 나그네라는 말도 썩 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여행자로 받아들였다. 왜 순수한 우리말이 마음에 안들어 한자말을 사용하느냐는 시비는 걸지 말기 바란다. sarnia 에게는 순수한 우리말이고 한자 우리말이고 모두 같은 한국말일 뿐이다.
예수 선생의 말을 나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Be tourist!” (여행자가 되세요! = 여행을 떠나세요!)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했으니까 의심하지 말기 바란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세계의 대도시들에 가면 거의 예외없이 여행자거리가 있다.
방콕의 카오싼, 호치민의 데탐, 뉴욕의 타임스퀘어가 그런 곳들이다. 방콕이나 뉴욕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서울의 명동과 인사동도 이방인들의 거리로 봐 줄 수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여행자들이 모여서 그 지역 인구의 주류를 이루는 장소에서는 그런 공간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느끼고 즐길 수 있다.
지금까지 평소에 자기와 남을 분리해온 사고방식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적어도 그 장소에서만큼은 자기와 타자를 공유하는 trans subject/object consciousness의 초보적 경험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여행자가 훌륭해지는 건 아니지만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행자 출신이다. 예수 선생도 싯다르타 선생도 공자 선생도 바울 선생도 게바라 선생도 모두 싸돌아다는 걸 주업처럼 삼았던 사람들이다.
자기가 머무는 곳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인간은 답답한 인간이다. 새로 보는 게 없으니 느끼는 것도 없고 느끼는 게 없으니 깨닫는 것도 없다.
자기와 다르거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면 신기한듯 바라만본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이단이라고 화를 낸다.
어느 개신교 목사 처럼 느닷없이 “카톨릭(다른 종교)와 맞짱뜨자”고 설레발을 놓기도 한다. 열라붕신이 따로 없다. 열라붕신에서 한 등급 내려 앉으면 졸라붕신이 된다. 졸라붕신이 득도하면 짱졸라붕신으로 영전한다. 대한민국에서 짱졸라분신 경지에 이른 인사는 그리 흔치 않다. 홍도나 만원이 정도로 극소수다.
여담이지만 참고로 그 열라붕신은 어제 제주도에 간 모양이다. '서북골빈청년단' 500 여 명을 이끌고 구럼비바위 때려부수는 거 도와주러…… 그게 목사란 친구가 할 짓인가?
어쨌든,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frogs in a well’ 이라고 부른다.
오랜 세월 동안 다리에 묶인 밧줄로 인해 행동반경을 제한당해 온 코끼리는 밧줄대신 실로 묶어 놓아도 그 행동 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비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동남아의 사찰에서 예불을 드리는 여행자들의 상당수가 유럽과 북미에서 온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지리적 여행과 함께 영혼의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요즘에는 타문화-타종교체험이 권장되고 있으니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타종교체험이란 선교나 전도 따위를 목적으로 무례하고 음흉한 간첩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이해와 소통을 위한 체험을 말한다.
만일 clergy 라든가 장로 집사 같은 타이틀이 영혼여행을 방해한다면 그 거추장스런 타이틀을 벗어버리는 것이 좋다. 타이틀달고 '길 잃은 양' 되는 거 보다는 맨 몸으로 '길 떠난 양' 되는 게 나으니까......
아마 마르코복음 9 장 40 몇 절 어름에 나오는 말일 것이다.
사주경계하는 병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