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F기를 펄럭이며 다낭시내로 진주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선봉기갑부대
37 년 전 바로 오늘 일어난 일이다
‘3 월 26 일 주인이 바뀐 그 도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요새 그 도시를 뻔질나게 방문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 아저씨들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황당한 무용담이 실린 블로그를 읽었다. 전적지 답사라는 명목으로 베트남 중부지방을 방문한 일부 파월용사들 이야기였다. 이들이 현지 술집이나 식당에서 전쟁 당시의 부대가를 합창하며 추태를 부렸다는 게 그 내용이다. 글쓴이는 스스로 이런 행동을 두고 스릴이 있었지만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는 고백을 했다. 죄책감이 들었다는 말은 없었다. 그들이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의 한계란 스릴과 불안이 고작이었다. 한심하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주로 방문하는 도시는 파월부대들이 주둔했거나 전투를 벌인 작전지역을 끼고 있는 중소도시들이다. 캄란만을 통해 상륙한 해병 제 2 여단이 머물렀던 뚜이 호아, 나짱을 통해 상륙한 육군 제 9 사단 주둔지였던 닌호아, 육군 수도사단이 머물렀던 퀴논, 남베트남 전방도시들이었던 호이안, 다낭, 후에 등이다.
베트남 땅 어디인들 전쟁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그 중에서도 후에는 베트남 전쟁사상 가장 격렬하고도 피비린내나는 지상전과 공중포격전이 벌어졌던 유적도시다. 전쟁 당시 인구 14 만 명이 거주했던 이 소도시에서 데트공세 이후 벌어졌던 33 일간의 전투에서만 무려 5 천 여명에 이르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 도시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은 약 8000 명이 사망했고 미국군은 221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사병이나 초급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면 지금 나이가 적게는 65 세에서 많게는 80 세 정도 되었을 것이니 사리분별하기에 모자란 나이는 아닐 것이다. 베트남이 아닌 곳에서야 그들이 옛 전장의 추억을 떠 올리며 소리높여 부대가를 부른다한들 탓할 사람이 적을 것이다. 하지만 20 년 전쟁에서 무려 500 만 명이 희생당한 그 끔찍한 참극이 벌어졌던 현장에 가서, 그것도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했던 당시의 전방 마을에 가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해자 의 노래’를 합창하면서 기분을 냈다면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라고 보아주기 어려울 것 같다. 전투모를 쓰고 부대마크에 명찰까지 달린 야전점퍼를 입고 베트남 마을을 돌아다니는 파월용사는 없는지 모를 일이다.
젊은 시절을 보낸 전쟁터,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죽거나 다친 그 장소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니 말릴 수 없다. 근데 한 가지 말하고 싶다. 전쟁은 37 년 전에 종료되었지만 그 전쟁에서 비롯된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당신들을 그곳에 보냈던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가 지원했던 그 정치세력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패배했기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게 아니라 애시당초부터 정당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한 것이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베트남전 참전이 어떻게 평가되던 그것과는 무관하게 지금의 베트남 입장에서 당시의 파월 한국군은 자기들의 통일과 독립을 방해하고 수 백만명의 사망자와 그보다 많은 수의 전쟁피해자를 만든 제국주의 전쟁에 용병으로 동원된 가해자에 불과하다.
전적지 답사를 가던, 유람관광을 가던, 그것은 자유이나 파월장병들은 적어도 기본적인 현실인식과 정치윤리의식을 가지고 정중하고 예절바르게 그 나라 땅을 밟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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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으로 오늘은 3 월 26 일이다.
3 월 26 일에 일어났던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떠 오른다. 3 월 26 일 떠오르는 역사적 사건은 원래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2 년 전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두 개로 늘어난 것이다.
2 년 전 오늘 그날 수중고혼이 된 해군장병들은 말이 없건만, 2 년이 지나도록 대한민국은 이 사건의 진상조차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채 사건 자체가 미궁속에 빠져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37 년 전인 1975 년 3 월 26 일은 베트남 통일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남베트남 제 2 의 도시였던 다낭의 주인이 바뀐 날이 오늘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은 공식적으로 1975 년 4 월 30 일 오전 11 시 북베트남군 선봉부대가 사이공의 대통령궁과 주월미국대사관을 점령하는 순간 종료되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1 개월 4 일 전인 3 월 26 일에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날 북베트남군은 다낭을 점령함으로써 남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공군기지를 접수한데 이어 무려 10 개 사단 병력에 해당하는 남베트남군 10 만 여 명을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북베트남군의 다낭 해방과 동시에 남베트남군의 지휘체계는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 남베트남군 제 2 보병사단에 소속된 6000 여 명의 병사들은 아예 전장을 버리고 갈가마귀떼처럼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주월미국대사관은 다낭 함락 하루 전인 3 월 25 일 다낭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미국 시민들을 항만과 1 번 국도를 통해 신속하게 철수시켰다.
북베트남 인민군의 다낭점령작전의 공식명칭을 ‘Hue-Da Nang Campaign 이라고 부른다. 이 작전은 1975 년 3 월 5 일에 시작되어 4 월 2 일에 끝났다. 이 작전에 참여한 부대는 북베트남 제 2 군단 소속 3 개 보병사단과 제 673 방공포부대, 제 164 포병여단 등을 주축으로하는 약 7 만 5 천 명이었고, 북베트남 인민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된 남베트남 부대는 3 개 보병사단과 해병대 유격특수전부대에다 공군까지 합쳐 약 13 만 4 천 여 명에 달했다.
1975 년 3 월 24 일 과 25 일 양일에 걸쳐 북베트남 인민군 제 324 사단 소속 2 개 대대 병력이 Hue 에 대한 총공세를 전개하여 남베트남 공군기지를 접수한데 이어 같은 사단 소속 1 개 대대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병력 2 개 대대와 연합하여 남베트남 제 147 해병여단과 제 15 유격특공대 병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전쟁승리의 신호탄을 올렸다.
Hue-Da Nang Campaign 성공 3 일 후인 1975 년 3 월 29 일에는 북베트남 정규군 4 개 사단이 연도에 운집한 시민들의 따뜻하고도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낭시내로 질서정연하게 진주해 들어왔다.
(참고자료) http://en.wikipedia.org/wiki/Hue%E2%80%93Da_Nang_Campaign
정치 이야기 아니다. sarnia(clipboard) 가 정리한 오늘의 역사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