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래 토마님처럼, 이 번 선거는 야권에 정신을 차리라는 경고이며, 대선에 오히려 절망보다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선거는 야권이 여권을 압도할 수 있는 선거구도가 전무 했습니다. 선거 프레임은 간단하면서 "상대"를 압도하고 흐름이 나에게로 흘러 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한명숙은 머리가 상당히 나빴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지리멸렬했습니다. 이 부분은 대해서는 아래의 링크를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프레임 전쟁에서 프레임이 단순하고 짧고 명쾌할 수록 좋다는 공화당계의 보수 전략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http://www.nytimes.com/2005/07/17/magazine/17DEMOCRATS.html?pagewanted=all
아예 인용을 해 드리겠습니다. 케리가 선거에 진 다음에 변방의 레이코프 교수는 민주당에 엄청난 조언자로 인기를 끌었는데요. 다음의 인용문은 보수 이론가 Frank Luntz에 대한 레이코프의 평가입니다. 제가 한 boldface를 확인하세요.
Lakoff informed his political theories by studying the work of Frank Luntz, the Republican pollster who helped Newt Gingrich formulate the Contract With America in 1994. To Lakoff and his followers, Luntz is the very embodiment of Republican deception. His private memos, many of which fell into the hands of Democrats, explain why. In one recent memo, titled ''The 14 Words Never to Use,'' Luntz urged conservatives to restrict themselves to phrases from what he calls, grandly, the ''New American Lexicon.'' Thus, a smart Republican, in Luntz's view, never advocates ''drilling for oil''; he prefers ''exploring for energy.'' He should never criticize the ''government,'' which cleans our streets and pays our firemen; he should attack ''Washington,'' with its ceaseless thirst for taxes and regulations. ''We should never use the word outsourcing,'' Luntz wrote, ''because we will then be asked to defend or end the practice of allowing companies to ship American jobs overseas.''
이 기사에 이른 말이 또 나옵니다. "Bush was attacked. Kerry was framed."
이 말을 한국 상황에 적용해 보면, "박근혜 was attacked. 한명숙 was framed." 결국 새눌당에 사찰문제까지 질질 끌려 다녔다는 것이죠. "문재인 was fraimed as well."
나중에 오바마는 아주 짧지만 포괄적인 선거 프레임을 짰습니다. "Yes, we can!" 이 말에는 여러 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8년 부시의 실정과 전쟁에서 탈피할 수 있으며, 히스패닉과 흑인들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죠. Yes, we can!
저는 안철수님이 나오면, 박근혜를 압도하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복지 프레임은 곽노현, 박근혜 등으로 이어져 이미 신선도가 떨어졌습니다. 저는 안철수의 대전 전략은 "우리에게 새희망이 있습니다!"(Yes, we have hope!)로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의 낡은 정치와 안철수의 새정치로서의 희망은 상당히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지며 그가 갖고 있는 희망 콘서트와 연계되고 또 일관성이 있습니다. 신세대 젊은이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고 일반인들에도 거부감이 없고요. 자식잘 되라는데 누가 반공이념이나 흑백논리로 잡아 가두겠습니까(be framed)?
아래 글은 작년 4월 12일 쓴 것인까, 만 364일 전에 쓴 글입니다. 서구 젊은이들에 대한 역사적 개략이구요. 제 글은 좀 낡았지만 젊은이의 경향성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흔하지 않은 책인 독일인 저자 Friedrich Heer의 영어 번역책 Challenge of Youth (젊은 세대의 도전, 1974)라는 흥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아마존에도 없습니당~ 이 책은 많은 화보와 더불어 고대부터 현대까지 기성세대에 반란을 일으키는 젊은이들을 역사적으로 개략화시킨 것입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단순히 푸른 연미복에 노란조끼를 입고 자살했다는 연인의 책으로만 저는 알고 있었는데, 젊은이들의 혁명적 반항서로도 읽혀졌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외에는 어떤 것도 반항한다는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낭만주의 음악가 슈베르트가 그의 음악으로 감옥에 갔었다거나 쉴러나 바이런이 혁명적 반항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는 것도 이 책에 나옵니다.
그런 가운데 아주 흥미로운 말을 찾아 냈습니다. 아래 그림을 설명하면서 "caricature of the 'Uniformed Individulailsm"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 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제 머리에 불이 번쩍이면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다양성과 창의적 개성이지만, 이렇게 "획일적인 개인주의"라는 말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이 단어를 쓴 곳은 단 두 곳이군요. 대중문화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훌륭한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heuristic device) 같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다들 제 각각이지만 헤어스타일이나 의상 등등은 거의 획일화되어 있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의 책의 120 쪽>
저는 위의 단어와 그림 한장으로 낭만주의 시대를 수놓은 젊은이들의 반항, 혁명기를 그쳐 반동적 나찌에 이르기까지 젊음의 멘탈리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Heer에 따르면 1962년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도 "Youth"나 "Youth Problems"라는 엔트리가 없고, 있어봤자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정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1960년대 초만해도 Youth를 하나의 사회적 인식의 대상으로 깊이 있게 고민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의 "반문화" (counterculture)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의 반란은 이미 예고되었는데 기성 세대는 그것을 잘 몰랐던 것이죠.
이런 획일화된 개인주의란 개념으로 홍대로 한 번 찾아 가 볼까요?위의 유툽 동영상에서 주목해서 볼 것이 많습니다. 며칠 전(as of 작년 이맘 때)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엔 요즘 남자들의 경우 머리에 가르마가 없는 것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이 동영상에서 보니 머리 스타일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긴 바가지 머리를 했군요. 하나같이 일률적입니다. 이 머리 스타일은 1970년대 말에 유행했던 것과 미슷한 느낌이군요. 그 땐 남자들은 장발족이 많았구요. 위의 동영상에서 어깨에 맨 여자들의 가방들의 크기도 비슷비슷합니다. 저는 홍대에서 별로 놀아 본 적이 없어서 그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주로 아내와 함께 이대나 연대쪽 그리고 숙명여대, 덕성여대 쪽에서 놀았었습니다. 이제는 홍대쪽에 가봐야 낯선 이방인 취급을 받겠죠?
우리의 젊은 시대는 가고 새로운 젊은 세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상상력과 가발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겠지만, 그들 역시 시대정신의 한계에서 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유행이 일괄적으로 바뀌는 것은 한국이 다문화 사회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결국 한국이 역동적이라는 것은 동질사회 (homogenious society)가 갖는 특성인데요. 모든 것이 한꺼번에 확 변화고 또 쉽게 잊혀지게 됩니다. 게다가 그 동안 군부의 통치를 받았고 또 이명박같은 권위주의적인 인물이 나와서 군부의 전체주의적인 것을 영속화시키는 면도 있습니다. 동질사회에서 모나서 살기는 힘들죠. 그런 면에서 다문화사회인 캐나다에서 사는 것은 편안함을 준다고 볼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