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년 11 월 아버지를 보내드린데 이어 5 년 6 개월만에 mom과 작별했습니다.
유일한 직계손자라 상주 역할을 수행한 제 아들과 함께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곰곰 생각해보니……
갑자기 고아가 되어버린 황당한 느낌이 듭니다.
슬픔과 황당함은 같이 느낄 수 있는 별도의 필링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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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토요일, 한국에서는 어린이날로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보이스메일에 남겨놓은 착 가라앉은 밴쿠버 누나의 목소리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현이니…? 엄마 돌아가셨어……”
공교롭게도 곧 다가올 마더스데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Heyray Westenra 가 부른 Mother of Mine 이라는 노래를 제 블로그에 올린지
불과 수 시간 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
Dad가 돌아가셨을때는 막내인 제가 유가족 대표로 율러지 (eulogy)를 주관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부분들을 삼촌들에게 맡겼습니다.
상주랍시고 유가족석에 넋놓고 앉아있는 것이 답답해 자동차에 가서 카메라를 가져왔습니다.
유자녀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자, 어느 분이 제게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대신 찍어드리겠습니다. 그냥 자리(유가족석)에 앉아 계시지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찍겠습니다. mom과의 마지막 작별 순간의 기억들, 그 메모리들을 제 손과 제 느낌을 통해 남기고 싶어요……”
이건 진심이었습니다. 복받치는 슬픔과 회한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 입니다.
이런 마음들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는지, , 딸, 아들, 사위, 손자, 동생, 친지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가족들의 손에는 아이폰이나 작은 카메라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 대부분은 그냥 유가족석에 얌전히 앉아서 셔터를 눌렀고, 저는 큰 카메라를 들고 사진기자처럼 돌아다니면서 찍었으니 ‘어떤 분들’ 눈에는 좀 이상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엄마와 작별하는 마지막 순간들을 스스로의 느낌으로 남겨놓고 싶은 건 당연한 충동일 것 입니다. 이 당연한 충동을 격식이나 체면 때문에 억누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발인예식 직전 가족대기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친지들
리셉션
이 세상에서 자식으로 동생으로 손자 손녀로 제자로 또는 지인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유가족과 조문객들의 헌화가 한 시간 정도 이어지고나서
이윽고......
어머니의 유해는 장지로 출발하기 위해 운구용 리무진에 올랐습니다.
맨 앞에는 영정을 든 상주가 탑승합니다.
제 아들이기도 한 상주에게
영정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미리 절차를 모두 알려주었습니다.
운구행렬이 장지에 도착했습니다.
선도차-운구차-직계가족을 태운 리무진-유가족-조문객 차량순으로 도착했습니다.
저는 리무진에 탑승하는대신 운구차가 출발준비를 마치자마자 제 차로 따로 출발해
미리 장지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 친지들입니다.
돌아가신 저희 이기수 어머니는
1921 년 5 월 14 일 이성의 목사와 유의현 사모 사이에서 서울에서 4 남 2 녀 중 둘째딸로 태어나셨습니다.
향년 91세 입니다.
1940~46 동명학교 및 덕성여고에서 교사로 근무 하시다가,
친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 사업가 마인드 가풍의 강씨 집안에 시집오셨습니다. 마음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지요.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심에 멀리 한국에서 조의를 표해주신 모든 분들께 유가족을 대표해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합니다.
유가족 명단 (직계자손)
장녀: 강(오)유순, 장남: 강 완, 차남: 강 철, 삼남: 강 현(싸르니아)
사위: 오강남, 자부: 김미정, 자부:오연식, 자부: 신윤옥
손자: 강신우, 손녀: 강신아, 강신경, 강신지
외손자: 오유진, 오유민, 오유현,
외손부: 김(오)송희, 양(오)보현
증외손자: 오이연, 오희언, 오시언, 오리언
Thank You
M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