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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카톨릭교회와 그리스도교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작성자 에포케    지역 Calgary 게시물번호 6655 작성일 2013-03-04 16:57 조회수 3419
다음은 퍼온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고견을 부탁드리구요, 우선 글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 공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를 오히려 희생양으로 보는 부분 동감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의견 좀 부탁드리구요.

특히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이후의 상황에서도 이글은 카톨릭 교회와 그리스도교를 구분하고 있는데요, 과연 어떻게 차이가 있는건가요?

읽어본 글 퍼서 올립니다.
특히 아프리카님께서 좋은 의견을 주실 것 같아서 기대됩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

이슬람교 기원과

실상을 밝힌다

 

노 우 호

 

주후 64년부터 311년까지 박해시대에 오히려 순수했던 기독교가 311년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끝나고 바로 2년 후 313년 콘스탄니누스 황제에 의하여 교회의 자유가 선포되자 지하에 있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오래지 않아 교회는 교리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 : 주후 325년 비두니아 주(州) 니케아에서 동서 교회가 함께 모여 개최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공의회에서는 2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고,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신경󰡑을 기초로 󰡐동질(同質)󰡑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신경이 채택되어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니케아신경󰡑이 공포되었다.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 고대 그리스도교회의 공의회 가운데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공의회. 381년 제2회 세계 공의회 : 테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티우스가 주재했다. 150명의 동방정교회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했다. 삼위일체의 교의(敎義)에 관하여 논의되었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함을 옹호하였다.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공의회의 합의를 공인하였다.

 

397년 카르타고 회의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 오늘날에는 성경 가운데서 최초부터 교회가 󰡒성령(聖靈)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으로 인정한 것을 󰡐제1정경(Libri Prodocanonci)󰡑이라고 하고, 일부 교회(특히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제2정경(Libri Deuterocanonci)󰡑이라고 한다. 구약성서의 토비트》 《유딧》 등 7서와 에스델서의 일부분 등 몇몇 부분이 그러한데,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것들은 󰡐외경(外經)󰡑으로 여기는 데 반하여, 가톨릭에서는 󰡐제2정경󰡑(7권)이라 하여 이것들도 정경으로 삼고 있다. 구약성서의 정경이 지금의 39권(원전에서는 24권)으로 정해진 것은 BC 90년경의 야무니야 회의에서였고, 신약성서의 정경이 현재의 것처럼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였다. 즉 신 구약성서를 말하며 정전(正典)이라고도 한다. 본래 그리스어(語)의 kanon에서 유래한 말로서, 라틴어 󰡐카논󰡑은 󰡐표준 척도 모델󰡑을 뜻한다. 사도 바울로는 이 말을 󰡐인간행위의 기준󰡑이라는 뜻으로 썼으며(갈라 6:16), 초대 교회의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과 행동의 모범󰡑이라는 뜻으로 썼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 : 431년 소아시아 서해안의 에페소스(에페소)에서 개최된 종교회의. 그리스도의 품격(品格)을 둘러싼 논란이 신학문제의 초점이 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3차 공의회이다. 안티오키아학파 출신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總大主敎)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학파의 입장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神)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이에 이견을 제시하자,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강요하여 이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을 추종하는 시리아의 주교들과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측의 대표자들의 참석을 기다리지 않고, 에페소스의 주교 멤논의 지지를 받는, 네스토리우스의 적수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그들의 도착 전에 개회를 하였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직에서 해임되고, 파문(破門)을 당하였으며 그의 교구는 단죄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니케아 신경(信經)󰡑이 재확인되었다. 결국은 이 에베소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머니로 결정하면서 결국은 그리스도교에서 변질되어 로마교 혹은 마리아교로 변질될 기초를 만들었다. 마리아를 신격화 하여 하나님의 어머니로 재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1500년이 지나 1931년에 확정 발표했다. (이 에베소 회의는 도적회의 혹은 날치기 회의로 불려지게 되었고 교리적으로 변질을 가져와 오늘날 로만 카톨릭이란 초대형 이단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기독교로 부를 수가 없다.)

이렇게 타락하고 변질된 카톨릭 교회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전쟁 때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려 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3세기 말부터 이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하여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박해 중에서도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는 지하에서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하여 괴롭혔던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었다. 사탄은 매우 교활하게 유대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하고 로마를 통하여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는 한편 기독교를 변질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만들어 교회를 심히 혼란스럽게 했었다. 그러한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그 다음 방법으로 교회를 지상을 나오게 하여 교리 논쟁으로 싸우게 만들고 그리고는 변질되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교회사를 공부하신 분들이면 누구나 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 사실은 지금까지 교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변질된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교 즉 예수님보다는 마리아를 더 숭배하는 종교로 변질되어갔고 이들이 로마에 있으면 그야말로 로마교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해지자 어떻게 해서든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교황청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서 세계 모든 종교의 통합을 이루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목표는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모든 이방종교들을 총체적으로 관장하는 승원장 즉 법황(法皇)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아프리카 지방에 수도원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이란 장자 성직자가 될 사람들이 수도하는 곳으로 순진하게 알고 있지만 사실은 로마교가 전 세계 지배를 위하여 만들어 낸 로마교회의 정보 수집을 위한 지부였다.

한편 4세기 중반에 북아프리카에 성자가 있다는 소문이 전파되어 나갔는데 그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성자로 불려졌다. 그는 저 유명한 참회록(Confession)이란 책과 신의 도성(The City of God)이란 책을 쓴 사람이다.

어거스틴의 탁월한 학문과 노력에도 아랍의 부족들은 좀처럼 잘 개종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죽고 나자 로마는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이를 추진해 나갔다. 당시에 로마교에서는 큰 도시에서 동떨어진 작은 부족들의 마을에 스파이들을 침투시켜서 이상한 예언들을 하고 다니게 했다. 그 예언이라 다름이 아니라 장차 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아랍의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서로 싸우지 않는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다니게 했다. 이러한 예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어갔다. 그러한 예언이 퍼져 나간 후로는 부족들 간에 전쟁이 있을 때 마다 언제 그러한 지도자가 나타날 것인지 고대하게 되었다.

마침내 주후 570년경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마호메드였다.

후일에 그는 마침내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이 되었다.

이슬람교가 출발한 아라비아 땅은 그 옛날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자손들이 살아온 땅이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전설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의 핍박을 피하여 아브라함의 집을 나온 후에 목이 말라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우묵한 것을 터치시니 거기서 물이 나와서 마시고 소생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따라 한 우물 곁에다 신의 집이라는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그 곳에는 카바신전이라는 신전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수백만의 순례자들이 찾는 곳으로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라 불려진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그 우물을 차지하기 위하여 암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가 있다. 오랫동안 그 우물을 지켜 오던 사람들은 예멘의 부족들 중에 예루마이트 부족이었는데 이들을 몰아내고 우물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이 몰려오자 예루마이트 부족들은 그 동안 그 우물신전에 예배하려고 왔던 사람들이 가져다 신에게 바쳤던 보물들을 어떤 우물 속에 파 묻어 놓고 모래로 덮어서 아무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예루마이트 족을 몰아내고 그 우물신전을 차지한 사람들은 쿠자이트 부족이었다. 이들이 들어 와서 섬겼던 신은 모압 사람들이 섬겼던 후발(훗날 이 후발신이 변하여 알라가 되었다)이라는 신을 섬겼다.

그 후로도 이 우물을 차지하려는 도전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이스마엘 직계자손 중에 쿠라이슈 부족이 존경하는 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이름이 압둘 무타리부라는 사람이었다. 이 무타리부는 마호메드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메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느날 압둘 무타리부는 환상을 보았는데 에루마이트 부족이 보물들을 감춘 그 우물의 위치를 가르치는 계시적 환상을 보았다고 전한다. 어떤 천사가 와서 계시하기를 "핏자국, 배설물, 개미알과 모이를 쪼는 새를 찾으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마침내 압둘 무타리부는 쿠라이슈 부족들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두 우상이 있는 자리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 보물을 감추어 둔 우물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는 메카의 영웅이 되었다.

이 압둘 무타리부는 신에게 기도하기를 만약 신께서 열 명의 아들을 주신다면 그 중에 한 아들을 카바에서 희생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을 했다. 수년 후에 그 응답으로 그는 열 명의 아들을 얻게 되었고 그 중에 압둘라라는 막내아들이 영리하고 총명하여 그를 특별히 사랑했다고 한다.

신에게 서원을 지켜야 할 때가 되자 그는 열 명의 아들을 데리고 후발신에게 갔는데 놀랍게도 제일 사랑하는 막내아들 압둘라를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압둘라의 어머니와 형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알아 보기 위하여 무타리부가 한 무당을 찾아가서 물었다.

그랬더니 그 무당의 신탁은 아들 대신에 약대를 바치면 아들이 속량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타리부는 약대 100 마리를 바치고 아들을 속량 해 내었다. 이렇게 약대 100마리로 속량 된 사람이 바로 마호메드의 아버지가 되는 압둘라였다.

그 압둘라는 주후 569년에 아미나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하고 오래지 않아서 대상들과 함께 상업차 길을 떠났는데 그는 도중에 병을 얻어서 돌아오지 못했고 그 때 아미나는 마호메드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압둘 무타리부라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를 메카로 데리고 갔다.

그는 아들을 잃었지만 대신 손자를 얻은 것을 신께 감사드렸다고 전한다.

그 당시 아랍의 부유한 집안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를 강하게 기르기 위하여 베두인 천막에 보내서 야성을 기르며 연단을 받게 했다. 마호메드 역시 그렇게 훈련을 받았는데 불행은 겹쳐서 오는 법인지 마호메드의 7 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 아미나 마저 죽고 마호메드는 고아처럼 되었다.

그 후 2년 뒤 그러니까 마호메드 9살 되던 해에는 그의 후견인으로 돌보아 주던 압둘 무타리부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9살 되던 해부터 삼촌들을 따라서 낙타상인들과 동행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카톨릭 수도사가 나타나 마호메드라는 소년의 등을 보여 달라고 해서 마호메드의 등을 보여 주었더니 그 수도사가 하는 말이 "이 표시는 예언자의 인"이라고 했다.

그 수도사가 남긴 말은 "당신들은 이 아이를 잘 보호하시오 특별히 유대인들이 이 아이의 생명을 빼앗으려 할 터이니 신의 일을 하게 될 이 아이의 생명을 잘 지키도록 하시오! 이 아이는 장차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오 !" 하고 사라졌다고 전한다.

로마 수도사가 남긴 이 말 한마디가 훗날 마호메드 추종자들로 하여금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게 만들었다.

그 후 마호메드가 25세 되던 해 당시 40나 되는 하디자라는 과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태어났으나 둘 다 어려서 죽었고 딸만 넷이 있었는데 그 중에 파티마라는 딸이 마호메드의 사촌 알리와 결혼하여서 대체로 널리 알려졌다. 한편 이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의 추종자들이 훗날 이슬람교의 시아파를 이루었다.

서기 610년 마호메드는 환상을 보았는데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계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 가브리엘 천사가 말하기를 "너는 이제부터 알라 신의 사자이니라 ! "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 후로도 마호메드는 여러 차례 계시를 받았는데 그 모든 계시를 해석해 준 사람은 카톨릭 신자였던 바라카라는 사람이었다. 이 바라카는 마호메드의 아내 하디자의 사촌 오라비였다.

그리고 그 바라카는 다니면서 마호메드는 우리 민족의 예언자라고 선전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아내 하디자와 그의 사촌 오라비 바라카의 도움을 입어서 마호메드가 포교를 시작한지 약 5년 되던 해부터 마호메드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과 박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발단은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같이 그 동안 그들이 섬겨 왔던 그 여러 신들을 다 버리고 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라신만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호메드는 할 수 없이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아비시나의 네거스 왕에게로 망명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그 망명을 주선했던 것도 아마 바라카와 하디자의 중재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비시나의 네거스 왕은 카톨릭 신자였는데 마호메드의 가르침 속에 마리아에 대한 이론이 거의 일치가 된다고 하여 마호메드의 망명을 받아들였다.

어느 날 마호메드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그를 깨우면서 부라크라는 천마를 그 앞으로 데리고 와서 그 말의 등에 태우고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파괴된 유대성전 터를 보여 주었다고 한다.

거기서 마호메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과 그 많은 성인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는 다시 그 부라크라는 천마를 타고 천국으로 올라가서 선지자들을 만났고 마침내 알라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알라로부터 이슬람교위 교리를 받게 되었다고 5일 동안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 동안 아비시나에 머물렀던 마호메드는 이내 그 곳을 떠나 메디나로 옮겨 갔다. 그 메디나는 메카에서 약 200마일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부터 마호메드는 라지아(메카에서 오는 낙타상을 약탈하는 군대)의 통솔자가 되었다. 그는 작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힘을 길러 갔다. 그리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암살하였다. 이러한 암살은 마호메드가 지시한 것인지 측근들의 만행인지 알 수가 없다.

마호메드는 유대인 정착촌들을 공격하기도 하고 다른 부족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면서 힘을 길러 갔다. 그리고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여러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그에게는 9명의 아내가 있었고 그 중에 한 여인이 바로 카토릭 신자였던 하디자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위협을 느껴 오던 메카에서 약 10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마호메드를 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마호메드의 군대를 당하지 못했다.

서기 630년에 마호메드는 약 10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메카를 향하여 진군해 들어갔고 메카는 지난번 전쟁에서 패배한 후로 약해져서 결국은 마호메드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메카에 들어오자 마호메드가 처음 한 일이 그 때까지 메카 사람들이 섬겨왔던 여러 신들의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마호메드는 메카를 점령하면서 강해져 갔고 그를 두려워하는 주변의 여러 부적들이 마호메드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도로 아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슬람교의 기원이다.

그러나 이상의 이야기는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고 역사적 사실은 다르다 .

로만 카톨릭이 하디자와 바라카를 보내어 공작한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청의 한결같은 소원은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 터에 교황청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업을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될 사람들이 첫째는 정통파 유대인들이었다.

한편 여러 지방에 세워 놓은 수도원으로부터 많은 정보가 교황청에 전달되어 갔다.

로만 카톨릭은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할 사람들 중에 일차적으로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직접 나서서 피를 흘리게 되면 로만 카톨릭의 모양이 좋지 않으니까 그 일을 대신해 줄 인물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악한 일을 맡을 사람으로 마호메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 아랍사람들을 한데 묶어 교황청에 복종하게 할 영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 영웅으로 하여금 무력으로라도 우상을 없애고 전 아랍을 하나로 묶어서 교황에게 순복하게 하고 또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바칠만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교황청에는 이 모든 일을 추진할 한 여인을 택하였는데 그녀가 바로 40대 돈 많은 과부로서 마호메드의 아내가 된 여인이었고 그녀의 사촌 오라버니 되는 바라카였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카톨릭 교회에 헌납하고 수녀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특수 임무를 받아서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고 자금지원은 교황청이 책임지기로 하고 하디자와 바라카가 특수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마호메드가 하디자와 바라카의 지도를 받는 중에 특별히 어거스틴의 책을 많이 읽으면서 철저한 훈련을 받게 했다.

사탄은 이러한 작업으로 통하여 이스마엘 자손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공작하고 있었고 카토릭은 정통파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일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하는 꿈을 꾸었고 마호메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준비되고 진행되는 동안에도 카톨릭의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전 풍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풍문이 지금까지도 그 순진한 이스마엘 자손들에게는 사실인 것처럼 왜곡되어 수많은 선교사들이 노력을 헛 수고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마호메드가 메카 외각에 있는 히라산의 어느 동굴에서 성스러운 환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모든 환상은 언제나 바라카가 해석해주는 대로만 기록된 것이다.

이 때 보았다는 환상들을 기초로 하여 오늘날 코란이란 책이 만들어졌다.

마호메드가 보았다는 마리아에 대한 환상과 교리로 인하여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들로부터 이슬람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외에 마호메드가 쓴 다른 문서는 단 한 페이지도 출판된 것이 없다.

혹 있다면 오늘 날 이슬람 최고 지도자(아야톨라)들의 손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문서에는 이슬람 교리를 만들어 가는데 교황청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하게 나와 있어서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비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청 비밀문서 보관소에도 있고 이슬람 최고지도자들의 손에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러한 문서에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정통파 유대교와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말살할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이 문서가 외부에 유출되면 두 종교는 다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견제하면서 서로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마호메드는 632년에 죽었고 그가 죽고 나자 이스람교는 오히려 더 번창하게 되었다.

교황청의 목적대로 아랍의 모든 유목민 부족들이 알라 신과 그의 선지자 마호메드의 이름 아래 통일되어 갔다. 그 때까지 아랍 사람들의 속내를 알지 못한 교황청은 이슬람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침략하여 통일시키는 일까지 승인하여 주었고 심지어 자금까지 대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교황청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약속받고 재정을 지원했다고 한다.

첫째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을 제거할 것

둘째 어거스틴 수도사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항상 보호할 것

셋째 교황청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카톨릭에 돌릴 것 등이었다.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고 자금이 지원되자 이슬람교는 북 아프리카 전역을 다 쓸어서 통일시켰다.

성지를 순례하면서 시내산 밑에 있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 안에 들어가서 불타는 떨기나무 있는 곳에서

잘 살피면 그 곳 수도원 첨탑에 기독교의 십자가와 이슬람교 반월 표지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무심코 그냥 지나 올 수도 있고 자세히 보면 거기서 이슬람과 카톨릭이 화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로만 카톨릭과 이슬람은 불가침 조약이 있고 화평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서 그들의 공동의 적은 여전히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로만 카톨릭은 종교재판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사방에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였고 이슬람은 동방에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죽여 없앴다.

세월이 흘러서 아랍사람들의 이슬람 군대는 마침내 로만 카톨릭에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승리를 맛 본 아랍 사람들은 교황청의 군사력이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의 군대를 막아 낼 어떤 군대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교황청의 교활하고 악한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교황청에서는 아랍 사람들이 더 이상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지도자들은 교황청이 그렇게 손에 넣고 싶었던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성전 산을 자신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예루살렘이란 도시는 참으로 파란 만장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은 BC 3000년대 말경에 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차지하고 있다가 이스라엘 왕 다윗이 탈환하여 예루살렘이리고 했다. 여부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을 당시의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다윗 왕이 여부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궁전과 성전을 지었고, 일찍이 다윗이 건립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제단 앞에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남방 유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 후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거느린 로마 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롯 왕이 이 곳을 점령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 왕 이후의 번영을 되찾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후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롯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롯이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경 예루살렘은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마호메드가 죽은 후 불과 7년째가 되는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 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 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알라신(神) 앞까지 갔다는 이른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알 아크사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가 이 곳에 바위 돔 사원을 건립하였다.

마호메드가 바라카의 지도을 받으면서 코란을 기로하는 중에 큰 거짓말을 삽입하였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아 제사를 하라는 명령을 듣고는 모리아 산으로 가서 이삭을 빼돌리고 이스마엘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거짓말을 썼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들은 이 예루살렘을 성지로 존중하였다. 한 때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0)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그렇게 공을 드렸던 교황청에서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침내 1099 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이 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간덩이가 커져서 이제는 유럽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교황청에서는 발끈하게 되었고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카톨릭의 군대와 아랍의 군대는 상당히 오래 동안 전쟁을 하게 되었다. 전쟁은 수 세기가 흘러갔지만 예루살렘은 교황의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아랍 사람들은 알라 신의 이름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마침내 터키가 아랍인들이 손에 넘어갔고 뒤를 이어서 포르투칼과 스페인까지 점령당했다. 그들이 포르투칼을 어느 지역을 지배하고 있을 동안에 그 곳 지명을 마호메드 딸의 이름을 따서 "파티마"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 파티마 시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랍군대는 고국을 떠난지 수년이 걸리는 전쟁을 치르면서 마지막으로 교황청을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 아랍군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었는데 그것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군수물자를 조달할 수가 없었고 그들은 조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들이 이탈리아를 침략하기 이하여 사르디니아의 코르시카 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양식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진퇴 양난에 빠진 아랍 군대와 불안에 떨고 있었던 교황청 사이에 선택의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방법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싸움은 어느 편도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어느 편이든 다행이 이기면 문제가 쉽게 되겠지만 지는 날에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날 판국이 되었다.

둘째 방법은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하고 협상 테이블에 나아가는 것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지만 양쪽이 다 타협과 협상으로 가닥을 잡았고 마침내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중재자로 나선사람이 그 유명한 성 프란시스(Fracesco ; 1182-1226.10.3)였다.

그들은 공식 협상을 통하여 이른바 정교조약(Concordates)을 조인하고서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맺어진 그 조약에는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고 카톨릭 쪽에서는 레바논을 아랍영토로 인정할 것이며 또한 로마 카톨릭이 아랍국가에서 활동할 수 있는 한 회교도들 또한 아무런 간섭없이 이슬람 사원을 세울 수 있게 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의 종교를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고 공동의 적이 되는 정통파 유대인들과 카톨릭 교리를 반대하는 기독교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여 이를 제거하는 일에 공조하기로 약속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사탄은 아랍 열국에 있는 불쌍한 이스마엘 자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손을 써 놓았다. 이렇게 정교조약이 체결된 후로 이슬람의 아야톨라 즉 이슬람교의 최고 성직자들과 이슬람 수도사들은 철저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한편 교황청은 이슬람과 유대인 사이를 이간질하는 공작을 계속하는 한편 성경과 역사를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무차별 하게 죽였다. 이른바 그 무시무시한 종교재판에 의하여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성경을 접하게 되면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고 카톨릭에서도 역사를 바르게 전하여 가르치면 곧 두 종교 즉 카톨릭과 이슬람의 악한 협약이 드러나게되어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성경을 금서 목록에 두고 거짓 역사를 기록하여 사람들을 기만해 왔다.

교황청과 아랍군의 정교 조약에 터키를 카톨릭에 양보하는 것으로 했지만 터키에서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다시 유럽 전체를 뒤흔들면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고 그 들은 약 8시 동안 큰 제국을 구축하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면서 유럽 전채를 지배하였다.

13세기 말 이후 셀주크 투르크에 대신하여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투르크족의 이슬람 국가(1299~1922)는 오스만 1세가 건국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부르사를 공략하여 소아시아 지방을 거의 통일하고(1326),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을 점령하고(1362), 코소보 전투에서 발칸 여러 나라의 동맹군을 무찔렀으며(1389), 나아가서 니코폴리스에서 유럽 여러 나라의 십자군을 격파(1396), 발칸의 대부분을 병합하였다. 그러나 서진(西進)하여 온 티무르군에게 앙카라에서 패하여(1402), 그 진격은 한때 멈추는 듯하였으나 메메드 2세 때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아드리아노플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1453).

결국 예루살렘 땅은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 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터키령이 되고 난 뒤 술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 시대에 축조된 것인데, 터키령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약 1만 1천 정도로 감소하였다.

이후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를 제압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여, 마지막 아바스왕조로부터 칼리프 칭호를 물려받아 이슬람교의 종주권을 장악함으로써, 술탄 칼리프제를 확립하였다(1517). 쉴레이만 1세 치하(治下)에 극성기에 달하여, 영토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쳤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오스트리아)까지 육박하였다(1529).

그러다가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또 다른 국면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어서 칼빈이 나오고 쯔윙글리 위클리프 죤 허스 등 개혁자들이 일어나게 되자 이슬람과 카톨릭 두 종교는 다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고 카톨릭 쪽에서는 익나티우스 로욜라가 일어나 반개혁의 기치를 들고 교황청을 비호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 나가더니 결국 오늘날 스페인의 예수회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회는 예수 없는 예수회라고 그들은 언제나 세계 역사의 배후에서 흉계를 꾸미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은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률 ․학예 ․건축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기에 전체주의적 개혁에 의하여 질서를 회복, 강경한 외교정책을 펴서 한때 부흥하였으나, 제2차 비엔나 포위공격에 실패(1683)하고부터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폴란드 등 열강의 진출이 활발하여 17세기 말에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 18세기 후반에는 흑해 북안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89~1801)을 계기로 열강의 압력은 더욱 격화되어 그리스의 독립, 이집트의 이탈, 프랑스의 알제리 점령, 영국의 아덴 점령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아메드 2세(재위 1803~39)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의 󰡐탄지마트󰡑에는 근대화정책이 추진되어 신앙 ․출생의 구별없이 생명 ․재산을 보장하는 일, 과세의 공정화, 재판의 공개, 군제의 개혁 등이 공약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의 표면적인 모방에 그쳤기 때문에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고, 그 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대패함으로써 유럽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이에 유럽 문명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은 전제군주 압둘 하미드 2세에게 강요하여 근대적 ․자유주의적 헌법을 발포하게 했다(1876). 그러나 술탄은 이듬해 이 헌법을 정지시키고 절대주의적 전제정치를 강행하게 되자, 1908년 이에 반대하는 청년 장교들이 청년 투르크 당(黨)을 결성하고, 군대의 압력으로 술탄에게 헌법 ․의회정치의 부활에 동의하게 했다. 이것이 청년 투르크당의 혁명이다. 이후 청년투르크당 내각이 조직되었고, 그 정권하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독일측에 서서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그 결과로 가혹한 세브르 조약에 조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1920).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만 투르크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케말파샤 아타튀르크는 터키 대국민의회를 소집하고, 1922년 11월 술탄 정부의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멸망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터키에 압력을 가하여 이 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터키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대전 중의 밸푸어 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 국가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 그 성전 산에는 유대교 성전이 아니라 이슬람 사원이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이제는 그 예루살렘이 교황청의 소유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슬람교의 소유가 되지도 못했고 교황청이 그렇게 없애 버리려고 했고 아랍사람들이 그렇게 박해했던 유대인들이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성전이 있는 그 거룩한 곳만 아직도 이방인들의 발 아래 밟히고 있는 것이다.

인구 약 70만 정도의 예루살렘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두루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 ․가을에는 이따금 37 ℃의 더위를 겪는다.

한편 1910년 경에 포르투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나타나면서 도처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로마 카톨릭 교회는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악선전하면서 포르투칼에서 카톨릭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래서 교황청에는 포르투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막아 내려면 마리아가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위대한 쇼를 준비했다.

그 유명한 사건이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포르투갈 산타렘주(州) 빌라노바데오렘에 있는 파티마 마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1917년 5월부터 10월까지 매달 13일이 되면 3명의 어린 목동 앞에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죄의 회개와 로자리오의 기도를 권하였다는 유래 때문에 순례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는 목동들을 체포하고 순례를 금지시켰으나 1930년 레이리아의 주교가 이 사실의 신빙성을 인정하게 되면서 󰡐파티마의 로자리오 성모󰡑에 대한 숭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지금은 대성당이 건립되어 해마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곳을 찾아 참배한다. 큰 십자가를 꼭대기에 꽂은 높이 65m의 탑이 있다.

파티마의 기적에 힘입어 교황 피우스 12세는 나찌 군대들에게 러시아와 정교회를 쳐 부수고 카톨릭 국가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제 2차대전이 끝난 후 교황 피우스 12세는 태양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는 거짓말을 지어내어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한 기적을 목격한 사람은 교황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도 순진하고 어리석은 카톨릭 신자들과 이슬람교 신자들은 이를 곧이 듣고 교황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회는 그 후에는 마리아가 중국에서 다섯 번 러시아에서 여러 번, 미국에서도 여러 번 나타났다고 떠들어 댔고 그 나라의 카톨릭 신자들은 마리아의 현현에 감동을 받아서 더 열심히 마리아를 숭배하게 하면서 무사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위협에서 무사히 보존되었다.

수세기 동안 무슬림들이 포르투칼을 점령하고 있을 때 마호메드를 숭배한다는 뜻에서 한 지역이 이름을 파티마 즉 마호메드의 딸의 이름으로 불러 왔었다. 마호메드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당시에 자신의 딸 파티마가 죽어서 낙원에 갔는데 거기 있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여인으로 마리아 다음자리에 있다고 설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무지한 이슬람교인들과 교활한 교황청의 수법은 결국은 사탄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의 카톨릭에 대한 위협은 포르트칼에서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혹독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스페인은 정치적인 파란을 겪게 되었고 1868년 마침내 카톨릭 왕조가 무너지게 되었고 카톨릭계 여왕은 폐위되었다. 그래서 그 후 스페인은 잠시나마 공화국이 되었었다. 그러다가 1923년부터 다시 군주 정치가 부활하였고 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고 다시 공화정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교황청은 이에 격분하여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부추겼다.

스페인은 1931년부터 1936년 사이에 대통령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는데 이는 다 교황청의 카톨릭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카톨릭에 대하여 격분하여 스페인에 있는 카톨릭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고 공립학교에서 신부나 수녀가 강의를 못하게 했다. 스페인 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곧 교황청의 철저한 보복을 초래하게 되었다. 교황청은 그들의 도전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가 철저하게 보복하였다.

이어서 교황청은 이슬람 지도자들을 불러서 옛날 예루살렘을 교황청에 넘기지 않은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였고 정교 조약을 내세우며 스페인 징벌을 요청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데는 저 유명한 예수 없는 예수회 요원들이 나서게 되었고 그 일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쌍은 스페인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큰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 프랑코 장군의 지휘하에 수많은 아랍 군대가 모집되었다. 교황청은 스페인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재정을 지원하면서 이슬람 군대를 스페인에 파송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이 전쟁을 스페인 내전이라고들 떠들지만 이는 순전히 카톨릭 교회가 꾸며 이야기다. 언론을 동원한 교황청은 스페인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싸운 것처럼 떠들어 댔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전쟁이었다. 교황처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이슬람 군대는 카나리 제도와 남부 스페인을 공격했다. 스페인 국민들은 페트로스 세거라 추기경이란 사람이 이슬람 군대를 지휘하면서 카톨릭을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 죽이는 것을 보고 전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하여 교황청은 스페인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스페인은 교황청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는 예수회와 언론을 동원하여 교황청과 마리아가 도와서 스페인을 공산주의부터 해방시켰다고 떠들어댔다.

그 때 동원된 이슬람 군대는 약 400만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때 스페인의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

이 전쟁을 전후로 교황청과 이슬람교 사이에는 피하지 못할 조약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교황청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교황청은 이스라엘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리석은 이슬람 교도들을 위한 예수회의 공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년 전에 이슬람교도인 무하마드 알리아카라는 사람이 교황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놀랍게도 교황은 허리 아래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다. 교황을 저격했던 무하마드 알리아카는 유럽의 청부살인자 중에서 뛰어난 저격수였는데 불과 9미터 앞에서 교황이라는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는 교황을 죽이기 위한 저격수가 아니라 크게 다치지 않게 정교한 솜씨를 발휘해야할 사람으로 고용된 것이었다. 얼마 후에 교황은 마리아의 은총으로 건재하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고 온 세상의 카톨릭 교도들은 다시 한번 성모 마리아께 감사를 드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뉴스에 나오는 교황이 자신에게 총을 쏜 무하마드 알리아카를 용서하면서 입을 맞추었을 때 온 세상은 교황의 관용과 사랑에 감복하게 만들었고 온 세상의 이슬람 교도들은 교황에게 또 한번 크게 감사하면서 빚을 지게 만들어 놓았다. 그와 며칠 간격으로 미국의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 역시 총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에서 워싱턴 DC. 에 특사를 파송하면서 미국과 교황청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도록 정교한 연출을 한 그 뒤에는 언제나 예수 없는 예수회가 있고 그 뒤에는 그 간교하고 교활한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는 깨어서 교황청과 예수회 그리고 이슬람교와 적그리스도가 무슨 짓을 하는지 철저하게 감시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순진한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사람들의 농간에 휘말리지 않도록 성경과 역사를 바르게 가르쳐서 마귀의 수법에 유혹되지 않도록 주님의 양들을 지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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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3-03-04 21:00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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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포케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군요. 그 때 말씀하신 영화는 디비디로 사서 잘 봤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위의 글은 읽다가 도무지 진도가 안나가 읽다가 말았습니다. 도무지 글에 구토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점프해서 읽다가 토해버렸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렇게 편집증에 많이 빠진 사람은 나중에 정신분열증으로 갈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는 것은 이런 글은 전형적인 개신교의 anti-Catholicism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반가톨릭주의에 대한 일차자료로는 중요할 수 있겠죠.

전에도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교내에 크게 세가지 개신교와 천주교, 정교회 전통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전통이 기독교 전통의 전부는 아닙니다. 개신교만 기독교를 절대로 결단코 대표할 수 없습니다. 다이제스트로 된 것은 세계종교에 대한 개론서의 기독교 항목을 보시면 대략 정리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교리적인 비교도 중요하지만 세종교전통의 역사적 발전을 고려하면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이 차이점을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답변없는 댓글 죄송합니다. 위의 글쓴이는 제수잇의 광범위한 역사를 다시 객관적으로 공부해야 할 겁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3-03-04 21:12    지역 Cal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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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책이긴 하지만, 개신교 보수복음주의 계열의 역사학자인 Mark Noll의 [Turning Points: Decisive Moments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를 추천합니다. 몇년전 불교도인 후배가 기독교 역사를 알고 싶다고 해서 이 책을 선택해서 함께 강독해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마크 놀은 훌륭한 개신교 역사학자입니다. http://www.amazon.com/Turning-Points-Decisive-Moments-Christianity/dp/080106211X/ref=sr_1_2?ie=UTF8&qid=1362456548&sr=8-2&keywords=mark+noll+turning+points

이와함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ung)의 [The Catholic Church: A Short History (Modern Library Chronicles]를 읽으면 균형잡힌 시각은 물론 책읽기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은 한스 큉의 책 중에서 이른바 평신도가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쉬운 책입니다. http://www.amazon.com/The-Catholic-Church-History-Chronicles/dp/0812967623/ref=sr_1_1?ie=UTF8&qid=1362457354&sr=8-1&keywords=kung+the+catholic+church
큉은 가톨릭 학자긴 하지만 교황제를 신랄하게 비판해서 가톨릭 신학자라는 명칭을 박탈당하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11년 전 어느 칸프런스에서 큉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큉은 보통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다는 그런 학자입니다. 큉을 영어권에서는 쿵이라고 합니다. 독일어 U에 움라우트를 영어권에서는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죠. 한국에서 큉 하다가 캐나다에서 제 친구들이 쿵 할 때는 우스워서 넘어갈 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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