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경의 Happy Talk] 결혼 20주년 - 그대,기대하지 말지어다! 일러스트·송재호
지난 9월에 결혼 20주년을 맞았다. 1년 3백65일씩 20년, 7천3백일을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똑같은 남자임을 확인하며 견뎌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물론 하도 출장, 가출, 외박, 지나치게 이른(새벽 4, 5시) 귀가 등으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결혼 5년 차 부부보다 못할지도 모르고 대화의 양 역시 3년 차 잉꼬부부들보다 적긴 하겠지만 말이다. 신혼 때 “결혼기념일엔 뭐 할 거예요?”라고 물으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결혼기념일은 툭하면 이혼하는 서양부부들이 얼마나 살다 헤어지는지 보려고 해마다 기념하는 거지 쭉~ 살 부부들은 그런 거 따지는 거 아니다.” 몇 년이 흘렀고 이혼하자는 말이 나올 만큼 격렬하게 싸우기도 했다. 점 보러 가서도 “이 남자와 계속 살아야 하나요?”를 묻기도 했다. 결혼기념일에 선물을 사달라고 하면 남편은 또 이렇게 말했다. “왜 너랑 나랑 똑같이 결혼해놓고 나보고만 선물을 사달라는 거냐? 또 결혼기념일이 그렇게 축복할 일이냐?” 말인즉 옳은 것 같아 꼬리를 내렸다. 그리곤 서로 살아가기 바빠 결혼기념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지나기 일쑤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남들이 결혼기념일이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남편에게 보석반지를 선물받았다 등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 며칠 전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었구나’라고 떠올리곤 했다. 가끔 신용카드 회사에서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립니다’란 문자메시지를 받긴 했지만 금방 지워버렸다. 기념해봤자 그동안 쌓인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감사하기보다는 그동안 서로 참아왔던 울분을 토로하다가 큰 싸움이 될 것 같아 입 다물고 조용히 지냈다. 동화같은 결혼생활은 없다, 미지근한 정으로 그럭저럭 함께 살아가기 하지만 딸아이가 자라고 나서는 각종 기념일을 챙기게 됐다. 내 생일이면 제 아빠를 협박해 외식을 하거나 꽃다발이라도 선물하게 하고, 밸런타인데이엔 내게 억지로 초콜릿을 사오게 만들었다. 이번 결혼 20주년 기념일에도 그랬다. 딸아이가 어떤 행사를 할 것인지 묻자 남편의 답은 이랬다. “부모 결혼기념일은 자식이 챙겨주는 거야. 우리가 결혼 안 했으면 네가 세상에 태어났겠니? 네가 아직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서 이번엔 이해하는데 원래 네가 파티도 열어주고 선물도 줘야 하는 거야.” 참 뻔뻔하기도 하다. 그 알량한 정자, 그것도 느글느글하고 게으른 유전자를 물려준 게 다면서 ‘탄생의 고마움’을 알라니…. 그래도 나는 지난 여름 이탈리아 출장길에 그를 위해 명품 구두라도 사왔는데 그는 사탕 한 알 선물하지 않는다. “요즘같이 가정폭력과 이혼이 넘쳐나는 시대에 널 안 버리고 살아주는 게 가장 큰 선물이지 뭘 더 바라냐.”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날 버려주셔요”라는 말이 어금니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남편은 30년 전에 샀던 스웨터를 포함해 한번 산 것은 절대 안 버리는 성격이어서 마누라도 버리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나 역시 이 남자와 계속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정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성격도 가치관도 다른 남자와 만나 20년 만에 겨우 좀 익숙해졌는데 또다시 무모한 도전은 하고 싶지 않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중년 이혼녀에게도 젊고 유능하고 잘생기기까지 한 멋진 남자가 나타나 ‘사랑해요’라고 속삭이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테러로 죽을 확률보다 낮다는 걸 안다. 또 나이 들수록 남편의 쓰임새가 늘어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함께 살아야 한다. 문단속, 강아지 목욕시키기, 장볼 때 운전하고 짐 들어주기, 등 긁어주기, 어깨에 파스 붙여주기, 자질구레한 집안 손보기…. 남편은 가계가 워낙 장수집안이어서 분명히 나보다 오래 살 테니까 내가 병들었을 때 간호 역시 그의 몫이니 지금부터 좀 잘해주긴 해야 한다. 결혼 20주년 기념일, 우리 가족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고기전문점에서 오랜만에 비싼 한우 꽃등심을 실컷 먹고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서로를 향한 감사 편지를 읽는 것 같은 특별한 세리모니도 없었고 알량한 선물도 없었다. 그래도 별로 서운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결혼 20년 동안 헤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있는 비결(?)은 서로의 사랑이 굳건하고 확실해서가 아니라 서로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각자의 생활에서 충분히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인 것 같다. 남편이 생활비를 주지 않아도, 연락도 없이 며칠씩 집을 비워도, 새벽까지 고스톱 치다가 딸아이 졸업식에 늦을 뻔해도 그러려니 하고 참았다. 남편 역시 내가 살림을 잘 못하고 요리솜씨가 좋지 않아도, 시집 일에 무심해도, 매일 늦게 들어와도, 수시로 외국 출장을 떠나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요일에 따끈한 아침밥을 차려주면 흐뭇해하고, 나 역시 모기향이라도 자발적으로 불붙여다 주면 ‘역시 남편밖에 없수’라며 히히덕거렸다. 노처녀 소리 듣기 싫어 맞선 본 지 두 달 만에 후다닥 결혼해 가슴 떨리고 뜨거운 열정을 느껴본 기억이 별로 없지만 미지근한 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도 다행이다. 무엇보다 결혼한 덕분에 딸아이란 최고의 선물을 얻었고, 결혼해서 억장 무너지는 순간을 너무 많이 경험하면서 인내심도 키워지고 포용력도 커졌다.
눈물과 콧물, 산전수전, 분노와 감사함으로 버무려진 지난 20년 결혼생활은 아름다운 그림엽서나 동화책이 아니다. 정말 ‘체험 삶의 현장’이며 처절한 다큐멘터리 동영상이다. 그래서 결혼은 ‘행복’과 ‘안정’이 기본이 아니라 ‘불행’과 ‘불안’이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하다. 결혼이 황홀하고 짜릿짜릿한 순간, 행복한 미소만 흐르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사소한 다툼에도 작은 갈등에도 견디지 못하고 끝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전혀 다른 행성에서 살던 두 남녀가 만나 늘 갈등과 불안을 겪다가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불쌍히 여겨줘야 구리반지 하나, 꽃 한 송이에도 감격스럽고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는 게 아닐까. 또 각자의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걸 존중해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미주알고주알 상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아무 비밀이 없는 것이 정직하고 완벽한 부부관계는 아니다. 각자 자기 일과 생활에서 혼자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을 때 가정생활이나 상대방에게도 훨씬 관대해지기 때문이다. 남편은 여전히 예쁜 여자만 보면 눈동자가 확 돌아가지만 난 이제 질투가 아닌 측은지심이 든다. 그의 관심이 점점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산전수전, 눈물과 콧물, 숱한 각서와 기도, 분노와 감사함 등으로 버무려진 20년이 지났다. 무엇보다 우리의 합작품인 딸아이가 우리보다 훨씬 현명하고 슬기롭게 자란 것에 감사하고, 아직은 건강해서 서로의 간병인이 되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물론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남편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으니 그럭저럭 또 살아갈 것 같다. 결혼 30주년에도 남편은 내가 몇 살인지, 내가 어디가 아픈지 별로 관심이 없을 테지만 나이 들수록 슬슬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다. 이젠 남편이 아니라 큰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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