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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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거리가 한산했다.
래플즈 근처에 있는 빅토리아 호텔 앞에 동양계 사내 한 명이 나타났다. 검정색 카고팬츠 위에 받쳐입은 쥐색 라운드티가 잘 어울려보였다. 베르사체 선글래스에 얼굴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나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눌러 쓴 헌팅캪에 부착된 노란색 해골마크가 햇살에 반짝였다.
소형 폴로배낭을 등 뒤에 메지 않고 한 쪽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물을 용이하게 꺼내 마시기 위해 배낭을 그런 식으로 메고 있는 것 같았다
분홍색 택시 한 대가 헌팅캪을 쓴 사내 앞에 멈춰섰다. 헌팅캪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택시에 올라탔다.
“실로소 포트,센토사 아일랜드 플리즈”
헌팅캪이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사 뒤통수에다 대고 목적지를 말했다. 택시는 바로 출발했다.
다운타운을 가로질러 웨스트코스트하이웨이에 들어선 택시는 MRT 하버프론트 역 직전에 남쪽으로 연결돼 있는 센토사 게이트웨이 브릿지를 쏜살같이 건너갔다. 출발한 지 10 분도 안 돼 목적지에 도착한 택시는 실로소 요새 입구에 위치한 한적한 해변에 손님을 내려놓았다. 시내 곳곳에 설치돼 있는 ERP (Electronic Road Pricing) 로 시내통행료가 자동부과되는 바람에 택시비는 비싸게 나왔다.
헌팅캪을 눌러 쓴 사내는 카페에 들어가 코카콜라 캔을 한 개 사들고 나오더니 파라솔 밑에 앉아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배구를 하고 있는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딱히 갈 곳을 정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중학생들이 배구를 하고 있는 저 해변 너머 수평선에,,,,,,
수 백 척에 달하는 군함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군함들에서는 욱일승천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갑자기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평화롭던 해변이 갑자기 매캐한 포연으로 뒤 덮였다.
'731' 이라는 번호가 적힌 함재기가 놀라우리만치 낮은 고도를 유지하며 해변으로 날아들었다. 조종사가 두른 머리띠에는 96 이라는 숫자가 핏빛 혈서로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배구시합을 하고 있던 모래밭 위로 기관포탄이 일렬로 작렬했다.
실로소 요새 해변,,,,,,
서구제국주의가 일본제국주의에게 두 번 째 치욕을 당한 장소였다. 바로 이 곳에 있는 영국군 요새에서 대영제국은 일본에게 항복선언을 했다. 1942 년 2 월 15 일 이었다.
서구제국주의가 일본에게 당한 첫 번 째 치욕은 1905 년에 러-일 전쟁에서 였다. 이른바 쓰시마해전이라고 불리는 마지막 전투에서 대러시아제국의 해군주력 발트함대는 현해탄의 좁은 해협에서 일본제국함대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짜르의 함대는 모조리 파괴됐고, 승선 병력 수 천 명이 그 자리에서 몰살당해 바닷속에 수장됐다.
다시 1942 년 2 월 15 일, 이번에는 러시아 대신 영국과 미국이 공포와 수치심에 휩싸인 채 망연자실했다.
“대영제국이 역사상 최악의 군사적 패배를 당했다"
"벡인의 자존심은 싱가포르에서 제국일본에게 무참하게 박살났다"
"영국과 미국은 침묵과 비탄에 잠긴 반면 전 아시아는 열광했다”
이런 내용의 기사들이 전 세계에 타전됐다.
그 날 그 도시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1 개 군단과 영연방군 2 개 사단 등 총 10 만 여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무기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욱일승천기 앞에 무릎을 끓었다. 제국일본군 제 25 군단의 공격을 받고 싱가포르 진공작전이 시작된지 불과 일주일만에 백기를 들고 무조건 항복한 것이다.
싱가포르 진공작전은 1942 년 2 월 8 일 시작해서 불과 일주일만인 2 월 15 일 끝났다. 영국군과 영연방군은 센토사 앞바다를 열심히 지키다가 조호바루 해협을 건너 싱가포르 본섬에 상륙한 일본군 보병주력에 뒤통수를 맞았다.
토모유키 야마시타 중장이 지휘하는 제국일본 남방군 제7 방면군 소속 제 25 군단이 이른바 ‘말레이작전’을 개시한 건 석 달 전인 1941 년 12 월 8 일이었다. 그 날은 재국일본 해군함대가 공군과 합동작전으로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군 태평양함대를 기습공격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제국 해군과 공군의 합동기습작전으로 미국군 태평양함대는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났다. 재기불능 상태로 '니주가리합빠빠'가 되었다고 해도 이의가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당했다.
미국이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설득할 참전명분을 찾기 위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늘어놓은 사람들이 당시 진주만의 광경을 목격했다면 자신들이 얼마나 얼빠진 헛소리를 지껄였는지를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암튼 일본의 연전연승 소식을 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는 뛸듯이 기뻐했다.
말레이작전의 목적은 인도네시아의 유전지대를 장악하고 인도 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지휘부를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태평양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주만에 이은 두 번째 타격목표는 바로 싱가포르 센토사 섬이었다.
진주만의 공격목적은 적함대 타격이었지만, 싱가포르 공격목적는 점령이었다. 일본은 이 작전에서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6 만 여 명에 달하는 연연방군 병력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들 대부분이 태국 방콕과 미얀마 양곤을 잇는 철도공사현장에 강제로 끌려갔다. 그들 중 칸차나부리 공사현장에 끌려간 포로들은 그 와중에도 폼을 잡느라고 그했는지 휘파람 행진곡을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 휘휘, 휘휘휘 휘휘휘 ~~
적 포로의 노동력을 이용해 보급로와 통로를 개척하고 그 루트를 이용해 적 원료공급 본거지 인도를 공격한다는 계획은 도쿄 대본영이 수립했다.
언젠가 어디선가 읽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그 날, 전 아시아가 열광했다”
“그 날, 전 아시아가 열광했다”
“그 날, 전 아시아가 열광했다”
과연 그 날 전 아시아가 열광했을까?
“유럽은 동양의 한 조그만 나라에 의해 두 번이나 패배했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인식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태평양 전쟁이 제국주의 대 제국주의의 전쟁이라기보다는 백인과 동양인의 전쟁으로 비추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러시아든 영국이든 유럽의 군대가 일본에 패배할 때마다 자존심이 짖밟히는 것을 느꼈고, 따라서 일본이 승리할 때마다 전 아시아가 열광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규정하고 정의한 이 '인종전쟁'에 나치독일은 일본을 엄호했다. 그들은 지구의 서쪽에서 게르만이 우수한 인종이듯 동양에서는 일본인이 우수한 인종이라고 추켜세웠다.
어쨌든 그 날,,,
아마도,,,,,, 아시아 인구의 30 퍼센트 정도가 일본의 승리에 열광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1937 년 종일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멀쩡한 교사직을 때려치우고 신바람이 나서 군관학교로 달려 간 미친놈 까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싱가포르 점령이라는 대승전보에 '열광을 했다' 는 표현이 과장이나 거짓은 아닐 것이다.
10 퍼센트의 collaborators 와 20 퍼센트의 멍충이들로 구성된 문제의 30 퍼센트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으니까,,,.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의 싱가포르 접수 소식을 듣고 열광을 했다는 그 30 퍼센트의 눈에는 일본이 어떻게 보였을까?
또 다른 제국주의가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약탈로부터 아시아를 방어해 주는 수호천사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열광은 클라키와 보트키에서 ~~
싸르니아에게 싱가포르는 편안한 도시였다. 의외로 놀 데가 많고 먹을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된 듯한 다양함이 맘에 들었다.
과장된 기대 때문이었을까, 그다지 깨끗하다는 인상은 받지 않았다. 제이워킹하는 사람들도 많은 걸로 보아 외부에는 약간 과장된 이메이지로 알려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숲이 많고 교통체증이 별로 없는 이 해변도시가 마치 밴쿠버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