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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7372 작성일 2014-06-27 09:17 조회수 3212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그대신 21세기에 하느님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아 알려고 합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연령과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서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학자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특히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단이라는 혹독한 비평을 받습니다. 따라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 라는 책을 써서 기독교인 되는 의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습니다이 책에서 러셀이 이해하는 예수와 하느님은 저의 생각과 다른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러셀의 비판과 도전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러셀의 고백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은'나는 왜 기독교인 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배운 공식들을 몽땅 내려놓고 빈 마음(Emptiness)으로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너무 오랜 세월동안 세뇌되어 있어서 마치 2x2=4 라는 공식을 의심과 질문없이 되풀이 하는 것처럼 예수와 하느님에 대해서 교회가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 교리를 입술로 되풀이 하기 쉽습니다.

나는 교회 기독교가 창작한 초자연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격적인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신론자 입니다그러나 내 자신에 내면화된 하느님과 자연과 세상의 현상들을 통해서 가슴으로 느끼는 '비물질적인 깨달음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유신론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의 의미와 예수의 의미에 따라서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고 한편 유신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믿는다' 는 말의 뜻은 자연의 법칙을 깨뜨리는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기적과 죽은 후의 영원한 내세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믿는다 고 고백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깨달아 안다' 고 말하는 뜻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을 위해서 보상심리를 떠나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여기에는 현세의 축복과 내세에 대한 보장이 따르는 하느님의 조건이 없습니다. 물론 실천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느님의 징벌이나 보복 따위도 없습니다. 

유신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인간은 자연(Nature)과 더불어 Simplicity(단순한 삶), Peace(평화의 삶), Integrity(존엄성의 삶), Equality(평등의 삶) 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예수가 산 위에서 선언한 참 행복의 길이고 참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더운 여름에 좋은 피서가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책들은 앨버타대학 또는 캘거리대학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습니다. ‘Religion Is Not About God’(Loyal D. Rue), ‘Nature Is Enough: Religious Naturalism and the Meaning of Life’(Loyal D. Rue), ‘The Promise of Religious Naturalism’(Michael S. Hogue), ‘Culture and the Death of God’(Terry Eagle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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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4-06-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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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안녕하세요. G*d에 대한 주장 잘 읽었습니다. 늘봄님께서 \"하느님을 믿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평소 주장하신바니까 카밍 아웃으로 저는 보진 않습니다. 제가 이해컨대, 유신론의 종말 또는 종언을 염두해 두신 것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늘봄님의 주장이 신학의 영역에 들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doing theology를 하신다고 하니 그렇게 믿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몇가지 질문을 던져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 첫째, 글의 주제와 별 상관이 없겠지만, 늘봄님의 이 글을 포함해서 늘봄님의 대부분의 글들은 규범적인(normative) 판단이 상당히 강합니다. 이런 규범적 판단은 늘봄님께서 비판하신 보수 근본주의와 같은 얼굴 모습을 합니다. 여기에 언젠가 안식일교회에 대한 강한 호교론적 주장을 한 분들이 좀 있었는데, 늘봄님의 주장은 그들처럼 독단적 또는 교의적(dogmatic) 주장과 상동으로 취급할 수 없지만, 이른바 과학적으로 반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진술을 계속하신다는 점에서 규범적 글을 강하게 쓰시는 것같구요.

2. “나는 교회 기독교가 창작한 초자연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격적인 \'그런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신론자 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에 내면화된 하느님과 자연과 세상의 현상들을 통해서 가슴으로 느끼는 \'비물질적인 깨달음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유신론자입니다.”라는 주장은 theism이라기 보다는 deism이라는 주장이 강한 것같구요. 또다른 맥락에서 본다면, 유학에서 하늘의 뜻에 산다는 경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태여 유신론자라고 쓸 필요가 있을까요?. 보통 우리가 개념(concept)을 이야기할 때, 개념이 개념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 구별하는 배타적 기능을 의미하는데, 유신론적 개념이 그렇게 포괄적으로 사용되면, 개념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굳이 그렇다면 하느님이니 유신론이니 따위의 말을 사용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3. 여기는 익명의 공간이라 늘봄님의 sermons이나 다른 글들을 거론하기 뭐하지만, 지금까지는 성서를 기반으로 해서 늘봄님의 주장을 펴오셨는데, 이제 성서라는 reference를 구태여 제한하실 필요가 없겠군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는 독특한 역사적 시간적 문화적 과정에서 발전되어 온것이고, 그런면에서 늘봄님이 “교회 기독교가 창작한 초자연적이고 물질적이고 인격적인 \'그런 하느님\'에”은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역사적 과정에서 만들어진 종교는 맞구요. 이것은 힌두교나 불교, 유학도 문화적으로 구성된 구성물이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구성된 실재(constructed reality)가 늘봄님의 사유체계 안에서 별스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성서나 기독교 전통이 별로 의미가 없으니 앞으로 어떤 맥락에서 성서라는 reference를 사용하실지 궁금하군요. 왜 이것이 중요한 것인고 하니, 전통적인 유신론 또는 기독교적 하느님의 실재는 바로 성서가 referring to하는 “referent”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좀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였는데, 이렀습니다. 현재의 전통적 기독교는 기독교 성서와 교리가 합쳐서 형성된 틀에서 형성된 하느님 론, 즉 신론을 형성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해석의 차이는 있겠으나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의 신은 바로 이런 성서에서 지향된 참조적 존재, 즉 referent라는 겁니다. 유대교의 신은 히브리 성서에 참조된 referent라는 것이죠.

4. 마지막으로, 별 시답잖은 저의 말씀이지만, “물론 너무 오랜 세월동안 세뇌되어 있어서 마치 2x2=4 라는 공식을 의심과 질문없이 되풀이 하는 것처럼 예수와 하느님에 대해서 교회가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 교리를 입술로 되풀이 하기 쉽습니다.”에서 쓰신 것과 달리, 저는 세뇌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상징적 세계와 그 세계속에서 나름대로 의미체계를 세우고 산다는 것은 세뇌를 통해서라기 보다는 문화적 전승과 문화적 영향으로 본 결과이지 세뇌의 결과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이것이 세뇌라면, 인도의 인구보다 많은 신을 믿는 힌두교도들 모두 세뇌된 사람들이겠죠. 늘봄님의 글들이 형이상학적 구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요. 저의 소박한 판단으로 볼 때, 늘봄님의 사상은 전통적인 유신론적 실재에 대한 회의로 인해 나온 결과로 보이며, 이러한 추구는 이른바 급진적 신학자들에게서 공히 나오는 신념체계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귀결점은--신이란 실재의 상정(postulation)을 지푸라기처럼 잡으려고 노력하는 한--유신론의 망령에서 헤어나기 힘들 겁니다. John Cobb의 과정신학이 되어감, 또는 형성되는 신, 초월적/내재적 신의 이분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딜레마입니다. 그런데 캅을 극복하고자 그의 이원론적 범재신론을 버리는 순간, 기독교를 버리고 근본불교의 깨달음으로 가야하는 트라이레마(trilemma)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요? 그냥 질문입니다. 하지만, 늘봄님의 신에 대한 개념적 성찰과 영성 또는 종교성의 실재에 대한 가정은 기정 사실로 되어 있는 여러 개념과 실재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토론 꺼리를 제공해 주시면 감사하겠구요. 아프리카 올림

캘거리맨  |  2014-06-27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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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4-06-28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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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맨님, “하느님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용감하시네요.

중동 지역에 사는 1천 5백만명의 크리스챤들이 Allah라고 부르며 알라께 기도하는데, 그럼, 이 사람들이 무슬림들이 외치는 “알라”와 같은 것인가요? 알라는 아랍어로 신을 뜻하기 때문에 무슬림이나 기독교인들이나 똑같이 God를 알라라고 부릅니다. “알라신”이라고 하면 “역전앞”과 같은 말이 되어 버립니다. 영어로는 God이라고 하고, 히랍으로 Theos, 라틴어로 Deus, 독일어로 Gott로, 불어로 Dieu라고 합니다. 제가 갖고 있는 NIV와 전통적인 중국한문성서 대역에선 神이라고 하구요. 이 한문성서에선 요한복음 일장 일절의 ‘말씀”을 “道”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도라고 부르면 그게 아니고 “말씀”이라고 중국쌀람들에게 바락바락 우기며 가르치시렵니까?

중국에 제수잇 선교사들이 God를 상제라고 하다가 나중에 天主라고 사용했습니다. 천주교에선 신을 천주 또는 하느님이라고 보구요. 캘거리님은 백퍼센트 개신교도임이 분명하지만, 사실 개신교에서 당시 방언 중의 하나인 “하나님”과 정통적 전통적인 한글인 “하느님” 중에서 “하나님”을 택한 것은 문창극 말마따나 하나님의 뜻 땜에 아니라 선교사들이 투표해서 선택한 겁니다. 방언이 표준말을 이긴 셈이죠. 한국교회사 연구에 획을 그은 백낙준의 예일대학위 논문에 의하면, 개신교 초기 당시 ““Hana-Nim, in the present linguistic situation, is neither colloquial, nor standard, nor of Catholic sources, but the Protestant term for God”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캐나다인 James Gale도 언급하구요. 그러니까 어느 아랍인이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하면서, 알라라는 말이 지시하는 referent의 내용을 모르면서 알라, 알라 하고 백번 만번 외쳐받자 폭포수가 우르르 꽝꽝 떨어지는 소리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맨날 “불신지옥, 예수천당” 외쳐봐야 이것은 그냥 꽹과리 소립니다. 하나님이든 하느님이든 신의 본질과 기능을 채우는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닌가요?

이 “하나님”이라는 말에 “하나”의 말 땜에 유일신론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개체성에 중점을 두고 보면 초월적 신의 본질을 제대로 못담습니다. 하늘의 님으로서의 하느님이 훨 더 초월적 성격을 드러내죠. 그래서 앞으론 “하나/느님”으로 또는 \"하느/나님\"으로 부르면, 어떨가요? 말은 발견될 뿐 아니라 발명되기도 합니다.

통통배  |  2014-06-2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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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 따위와 어울려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하늘에 버티고 있어야 신 답게 보일뿐더러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한 신이 믿음직스럽고 급할 때 개기기에도 좋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하늘님-- 하느님이 좀더 신 답지 않을까요?

내사랑아프리카  |  2014-06-2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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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들이 늘봄님의 글의 취지와 다르게 간 것같아서 조심스럽지만, 제 나름의 의견의 말씀드리면, David J님의 “천주교는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가 현재 이분법처럼 나눠지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일부이긴 하지만 개신교에서 “하나님” 대신 “하느님”이라는 명칭을 쓰는 종종 쓰기도 하구요. 아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서 “하느님”으로 한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같습니다.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을 자꾸 다른 종교 취급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개신교는 가톨릭의 분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외경을 경전으로 가톨릭에서 받아들이긴 하지만, 사실 이 차이도 웃기는 수준입니다. 당시 초기 기독교에서 쓴 구약성서(히브리성서)는 희랍어로 번역된 셉투어진트라는 것을 사용했거든요. 신약성서도 여기에 기초한 것이죠. 이 셉투아진트에 외경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가톨릭, 정교, 개신교 등등은 Christianity라는 종교 안의 다양한 종파들이라고 보면 되구요. 그러니 하나님이라 하든, 하느님이라 하든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신교도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적 (monotheistic)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엄청 좋아하는데 사실 하나라는 의미로 따져 보면 웃기는 수준입니다. 즉 하나, 둘, 셋 등에 경칭인 “님”을 붙인 수준입니다. 하나님, 둘님, 셋님, 넷님 할 건가여? 그런 맥락에서 보면, 하느님이 더 개념적으로 더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하느님”이란 개념을 좋아했던 이유가 이 개념이 유일신론적 개념을 함의하고 있다고 본 것이죠. 그러니 개신교도 여러분, 하나님이란 말을 너무 거품물고 옹호할 필요가 없다고 보구요.

통통배님의 문제 제기도 훌륭하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의 한국의 하느님 관념을 아주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보통 종교사에서는 이것을 “사라진 신”(Deus Otiosus)이라고 하는데, 신이 옛날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인간사에 별로 관여를 하지 않고 작은 신들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소박한 한국인의 하느님관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민속신앙에 부면 뒤주신, 문지방신 등등 많고, 가뭄 등때 기우제를 올릴 때 하느님이 필요하곤 했는데, 이렇게 신이 제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개신교도들이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꿔치기 하면서 “게으르신 “ 하느님을 상당히 바쁘시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즉 인간만사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는 신으로 activate 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견해이고, 나중에 Don Baker라는 분이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해서 놀랐었죠. 그러니까 개신교도들이 한국의 전통적 개념을 전유해서(appropriate) 자기 것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말해서 개신교도들이 저작권 허락도 없이 자기 것으로 삼아가지고 한국 전통문화를 in the name of Haneunim or Hananim으로 파괴해 버리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물론 이것을 파괴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어쩌면 전근대적 하느님 사상과 기독교의 근대적인 유일신사상에서 결국 후자가 이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전근대적 조선이 맥을 못추고, 서구적 근대화의 옷을 입고 온 일본의 식민지화, 그리고 서구적 근대문명을 몰고 온 기독교의 영향을 한국문화사 전체의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즉 서구 기독교에 의한 하느님의 근대화는 고립된 형태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수탈적 근대화, 서구문화의 근대화의 영향 전체의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문창극의 하나님의 섭리 또는 뜻이란 발언은 비정상적인 발언이 아니라 여전히 박정희식 근대화를 잇는 박근혜의 국가 개조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재 개신교들이 투사한 하나님이란 존재는 개신교의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투사된 일그러진 신(가치판단을 하자면)일 뿐입니다. 에효~ 교회의 권위주의의 붕괴와 함께 오는 민주적 교회가 형정되지 않는 이상 개신교의 하나님은 독재적,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신의 기능을 할 겁니다. 교회가 민주적이어야 우리가 투사한 하나님의 본질도 민주적으로 됩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죠. 말이 길어졌습니다. 그럼, 전 일하러 갑니다.

David Gil  |  2014-07-0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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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십니다. 처음에는 믿었다고 착각을 하셨겠죠. 그리고 신학교를 나오셨고, 목회를 하셨고, 이제는 은퇴하시고 그리고서 믿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뿐입니다. 이단이라고 어떤 분들은 규정하겠지만 전 그냥 늘봄님은 그냥 믿지 않는 분이십니다. 전 신학교를 나왔고, 목회를 하지 않고, 그냥 평신도로 생활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회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 교회에서 성경을 통해서 풀이하고 묘사하고 대변하는 하나님이 현재의 교회에서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저는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영성이라는 것으로 철학적으로는 The Best Possible Being that exist in the universe 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그분이 독재적,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신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느끼고 경험하고 실천 하는 것일 것입니다. 앞에 독재적,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하나니은 제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배우고 삶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결국 늘봄님 같은 사람들이 믿지 않아도 된다면, 저ㅓ럼 믿는 사람은 계속 믿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교회가 하나니을 창조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성경과 자연과 세상 만물의 이치를 통해 드러나고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마땅한 기적이 없더라도 그분을 믿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죽은후에 부활을 꿈꾸는 것은 그분을 믿고 깨달은 이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적 하나님의 존재를 삶을 통해 깨달았던 텍스트를 깨달았던 믿는 자는 내세를 꿈꾸고, 기적이라 표현하신 하나님이 창조주로 피조물과 기본적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는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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