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종교적 내용인데, 이 종교적 담론을 사회적 담론으로 보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프리카 올림
늘봄님, 안녕하세요.
지난밤 Gretta Vosper의 책 [Amen: What Prayer can Mean in a World beyond Belief]을 50쪽 정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바스퍼 목사의 이전책[With or Without God]보다 이 책은 더 솔직하고 또 더 간명하게 써서 술술 잘 읽혀지더군요. 바스퍼의 설교 동영상도 보면서 늘봄님의 생각이오버랩되었습니다. 제가 온타리오에 갈 일 있으면 West Hill United Church에 꼭 가보고 싶더군요. 1960년대의 신의 죽음의 신학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라기보다는 신학자들의 수사에 불과했다는 것을 Social Movements의 책에서 언급된 것을 보았습니다. 바스퍼의 경우엔 신학자들의 선언들이 아닌 교역자로서 자기 교역을 분명히 하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는 50년 만에 나타난 탈유신론 또는 무신론적 교회가 하나의 운동으로 어떻게 자리 잡을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하나의 실험이라 깨달음을 지향하지 않는 불교의 사원도 나중에 나오지 않을가 생각도 듭니다. 기회가 되면 바스퍼에 대해서 더 자세히 다룰 수 있겠지만, 일단 제가 바스퍼에 대해서 느낀점은 그녀의 목회는 기독교라는 테두리와 별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신이란 존재자체를 믿지 않고, 기도는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맘이 편해지는 방편이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아직 이분이 기독교 전통을 습관적으로 수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스퍼는 유신론의 종말(신의 죽음) 뒤에 남은 “기독교의 잔여”를 마지막으로 즐기는 분이라는 것이죠. 이 분이 한국의 승려라면 목탁 두드리고 염불 염심히 하는 것은 특별한것은 아니고 위약(placebo) 정도의 효과로 하면 될 것이라고 “분명히” 주장했을 것같습니다.
늘봄님의 사상은 바스퍼의 사상과 별 다르지 않을 것같은데요. 바스퍼가 보그를 뛰어넘고 스퐁의 충실한 제자로서 더 멀리 간 것같은데, 늘봄님 역시 그렇게 가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제게 생기는 질문은 늘봄님이 말씀하시는 “깨달음의 하나님”이란 도대체 뭘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늘봄님께서 “지난 1700년동안 교회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떠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파시스트적이라고 제 과한 표현을 했는데,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저는 종교적 근본주의든 보수주의든 사회적 관계속에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종교적 실재는 과학적 진술도 아닌 신화적 진술이기 때문에 그런 신화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성에 늘 저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이구요. 물론 무신론적 교회나 탈신적 교회도 있다면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니까 그것의 존재여부에 가치평가를 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늘봄님께서 여전히 [깨달음의 하나님]을 붙들고 계시니 이해가 안갑니다. 늘봄님께서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부정하셨는데, 하나님께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한가요? 늘봄님의 설교집 [깨달음의 하나님]은 늘봄님의 최근의 진술과 좀 다른 것같아서요. 늘봄님의 책 33면에서 늘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 예배드린 다는 것은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만끽하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집 지구의 모든 생명의 웰빙을 위한 청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것의 장벽을 넘어서 지금 이 순간이 참된 행복의 나라임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위의 진술에서 저는 전통적인 신론과 별로 다를 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는 신이라면 그것은 유신론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늘봄님은 “그런” 유신론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좀 정리하자면, 늘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정신을 역사적 예수에게서 배웠습니다. 예수의 하느님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여 심판하는 하느님, 선한 일과 전도를 해야 축복과 보호를 제공하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700년동안 교회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떠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마 늘봄님께서는 지혜자 예수, 즉 묵시론적 예수와는 상관이 없고, 크라슨을 따라서 예수의 최초의 말은 Q자료 중 Q1은 마가복음보다훨씬 먼저 나타난 것이며, 도마복음서조차 두개의 층위에 있고 첫번째 층은 마가복음보다 훨씬 먼저 쓰진 것이기 때문에 이 예수를 보면,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예수라는 것이고, 이 인간 예수는 제대로 깨달음을 얻은 또는 깨친 예수고, 그 예수는 신을 이분법적으로 믿지 않은 깨달음의 예수다. 그래서 나는 그 깨달음의 예수에게서 깨달음을 주는 하나님을 발견했으며, 그 깨달음의 예수를 모델삼아 깨달음을 계속 이어갈것이다.
저는 늘봄님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불교의 전통은 “깨달음”이 기본 테제인데요. 사실 그 깨달음의 내용은 뭔지 잘 모르지만요. 어느 무신론적 인문사회과학자와 대화를 나눈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분은 법정스님이나 성철스님이나 그 분들이 깨달음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도대체 현대사회에서 그분들이 대중을 깨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그 질문은 굳이 그런 종교인들이 없더라도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의 진술로 충분한데 왜 그들에게서 깨달음을 전수 받을 꺼리가 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인기 있는 법륜 강연도 들어봤는데, 그 분의 사회적 발언을 듣느니 차라리 심리학자들의 책을 한 권 더 보는 것이 나을 것같구요.
몸이 아프면 의사한테 가면되고, 마음이 아프면 정신과 의사한테 가면 되고, 사회를 알려면 사회과학자에게 물어보면 되고, 자연에 대해서 알려면 자연과학자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인도에 태어나면 힌두교도가 될 가능성이 많고, 스리랑카나 태국에 태어나면 불교도가 될 확률이 많습니다. 사상적 깊이나 사유의 폭은 불교에서 배우면 될 것같구요. 제가 볼 때, 성서에서는 별로 그런 깊이가 없는 것같은데요? 도마복음도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출발은 깨달음에서 출발했고, 기독교의 출발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devotion과 그 나라의 구현입니다. 물론 예수는 그러한 임무를 깨달은 인물이었겠지만요. 이러한 신에 대한 헌신과 그 나라의 구현을 신화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성서인데, 그 성서의 신화적 가치가 제가 볼 때, 늘봄님이나 Vosper에거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eclipse 로 된 것이라서 참 모호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하나님 또는 하느님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