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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깨달음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게시물번호 7398 작성일 2014-07-07 18:22 조회수 3477

아래 내용은 종교적 내용인데, 이 종교적 담론을 사회적 담론으로 보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프리카 올림


늘봄님안녕하세요.

 

지난밤 Gretta Vosper  [Amen: What  Prayer can Mean in a World beyond Belief] 50 정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바스퍼 목사의 이전책[With or Without God]보다 이 책은  솔직하고   간명하게 써서 술술  읽혀지더군요바스퍼의 설교 동영상도 보면서 늘봄님의 생각이오버랩되었습니다. 제가 온타리오에  일 있으면  West Hill United Church 꼭 가보고 싶더군요. 1960년대의 신의 죽음의 신학은 하나의 운동(movement)이라기보다는 신학자들의 수사에 불과했다는 것을 Social Movements 책에서 언급된 것을 보았습니다바스퍼의 경우엔 신학자들의 선언들이 아닌 교역자로서 자기 교역을 분명히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50 만에 나타난 탈유신론 또는 무신론적 교회가 하나의 운동으로 어떻게 자리 잡을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하나의 실험이라 깨달음을 지향하지 않는 불교의 사원도 나중에 나오지 않을가 생각도 듭니다. 기회가 되면 바스퍼에 대해서  자세히 다룰  있겠지만일단 제가 바스퍼에 대해서 느낀점은 그녀의 목회는 기독교라는 테두리와 별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그런데 그녀가 신이란 존재자체를 믿지 않고기도는 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맘이 편해지는 방편이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아직 이분이 기독교 전통을 습관적으로  수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제가 이해한 바스퍼는 유신론의 종말(신의 죽음뒤에 남은 기독교의 잔여 마지막으로 즐기는 분이라는 것이죠.  분이 한국의 승려라면 목탁 두드리고 염불 염심히 하는 것은 특별한것은 아니고 위약(placebo) 정도의 효과로 하면  것이라고 분명히” 주장했을 것같습니다

 

늘봄님의 사상은 바스퍼의 사상과  다르지 않을 것같은데요바스퍼가 보그를 뛰어넘고 스퐁의 충실한 제자로서  멀리  것같은데늘봄님 역시 그렇게 가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러면서 제게 생기는 질문은 늘봄님이 말씀하시는 깨달음의 하나님이란 도대체 뭘까하는 것이었습니다늘봄님께서 지난 1700년동안 교회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떠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따라서 저는 '그런 하느님' 믿을  없다고 고백했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파시스트적이라고  과한 표현을 했는데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립니다저는 종교적 근본주의든 보수주의든 사회적 관계속에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 종교적 실재는 과학적 진술도 아닌 신화적 진술이기 때문에 그런 신화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성에 늘 저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이구요. 물론 무신론적 교회나 탈신적 교회도 있다면 하나의 종교적 현상이니까 그것의 존재여부에 가치평가를 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늘봄님께서 여전히 [깨달음의 하나님] 붙들고 계시니 이해가 안갑니다늘봄님께서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부정하셨는데하나님께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한가요늘봄님의 설교집 [깨달음의 하나님] 늘봄님의 최근의 진술과  다른 것같아서요늘봄님의  33면에서 늘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하나님께 예배드린 다는 것은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만끽하고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지구의 모든 생명의 웰빙을 위한 청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것의 장벽을 넘어서 지금  순간이 참된 행복의 나라임을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위의 진술에서 저는 전통적인 신론과 별로 다를 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하나님이  깨달음을 주는 신이라면 그것은 유신론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그런데 최근에 와서 늘봄님은 그런” 유신론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늘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정신을 역사적 예수에게서 배웠습니다예수의 하느님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여 심판하는 하느님선한 일과 전도를 해야 축복과 보호를 제공하는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그러나 지난 1700년동안 교회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떠나 이분법적인 하느님을 만들었고 이것으로 사람들을 통제했습니다따라서 저는 '그런 하느님' 믿을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마 늘봄님께서는 지혜자 예수 묵시론적 예수와는 상관이 없고크라슨을 따라서 예수의 최초의 말은 Q자료  Q1 마가복음보다훨씬 먼저 나타난 것이며도마복음서조차 두개의 층위에 있고 첫번째  층은 마가복음보다 훨씬 먼저 쓰진 것이기 때문에  예수를 보면상당히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예수라는 것이고 인간 예수는 제대로 깨달음을 얻은 또는 깨친 예수고 예수는 신을 이분법적으로 믿지 않은 깨달음의 예수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의 예수에게서 깨달음을 주는 하나님을 발견했으며 깨달음의 예수를 모델삼아 깨달음을 계속 이어갈것이다.


 저는 늘봄님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불교의 전통은 “깨달음”이 기본 테제인데요. 사실 그 깨달음의 내용은 뭔지 잘 모르지만요. 어느 무신론적 인문사회과학자와 대화를 나눈적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분은 법정스님이나 성철스님이나 그 분들이 깨달음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도대체 현대사회에서 그분들이 대중을 깨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그 질문은 굳이 그런 종교인들이 없더라도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의 진술로 충분한데 왜 그들에게서 깨달음을 전수 받을 꺼리가 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인기 있는 법륜 강연도 들어봤는데, 그 분의 사회적 발언을 듣느니 차라리 심리학자들의 책을 한 권 더 보는 것이 나을 것같구요. 


몸이 아프면 의사한테 가면되고, 마음이 아프면 정신과 의사한테 가면 되고, 사회를 알려면 사회과학자에게 물어보면 되고, 자연에 대해서 알려면 자연과학자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은 누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인도에 태어나면 힌두교도가 될 가능성이 많고, 스리랑카나 태국에 태어나면 불교도가 될 확률이 많습니다. 사상적 깊이나 사유의 폭은 불교에서 배우면 될 것같구요. 제가 볼 때, 성서에서는 별로 그런 깊이가 없는 것같은데요? 도마복음도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불교의 출발은 깨달음에서 출발했고, 기독교의 출발은 깨달음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devotion과 그 나라의 구현입니다. 물론 예수는 그러한 임무를 깨달은 인물이었겠지만요. 이러한 신에 대한 헌신과 그 나라의 구현을 신화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성서인데, 그 성서의 신화적 가치가 제가 볼 때, 늘봄님이나 Vosper에거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겠지만 eclipse 로 된 것이라서 참 모호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하나님 또는 하느님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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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14-07-10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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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첫 번째 책 \'깨달음의 하나님\'을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소개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믿는 대상, 숭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깨달아 아는 영적 실제입니다. 또한 이것을 더 발전시킨 것이 두 번째 책 \'믿는 하느님 보다 더 소중한 깨달음의 참 인간\' 입니다. 첫 번째 책의 제목은 출판사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 이 제목을 요구했기에 그대로 했습니다. 사실 저의 원안은 \'그런 하나님은 없다\' 였지만 출판사의 요청에 따랐습니다. 마침 이때에 오강남 교수께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라는 책을 출간했던 시점이어서 오 교수님께서도 좋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요즈음 오 교수께서 전개하시는 \'아하, 종교넘어, 경계넘어\'에서 처럼 이제는 종교와 하나님은 깨달음에 관한 것이지 전지전능한 하늘 위의 하나님을 믿는 시대가 아닙니다. 약 700 페이지가 넘는 저의 두 책은 하나님/하느님과 종교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생각과 함께 많은 학자들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따라서 관련된 참고문헌들을 소개했습니다. 저는 교리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21세기에 사는 저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깨달음의 하나님에 대해서 답변해 드리기에 이 게시판 공간이 너무 작은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기회에 제가 왜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유들을 Religious Naturalism 을 통해서 소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4-07-1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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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안녕하세요. 휴~ 늘봄님의 답글 받기 힘드네요. 이정도의 답장과 답글을 받은 것, 이번이 첨이군요.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제가 늘봄님께 질문을 하는 취지는 늘봄님의 사상을 그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구요. 제가 늘봄님을 판단하는 것은 오직 글을 통해서입니다. 늘봄님께서 앞으로도 여기 글을 올리신다면, 선언적 글보다는 좀 친절하게 글을 써 주시면 좋겠고, 또 누군가 문제제기나 질문을 한다면 좀 더 친절히 설명을 해주시면 서로가 착하고 예의바르게 토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오해가 없을 것같고, 또 토론을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신학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제가 신학책을 열심히 본 것은 이미 20년 전에 멈추었고, 그 이후로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은 주로 종교사회학이나 종교현상학 등등 인문학 관련 책등이구요. 저는 신학으로는 저의 은사 김경재 선생한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고, 종교학으로는 저의 은사 정진홍 선생한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면에서 늘봄님의 규범적 신학적 방법과는 좀 다른 것같습니다. 늘봄님께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성서문자주의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이고 심지어 대극적인 글을 쓰시는데, 저도 한말씀 드리자면, 늘봄님은 종교학이나 종교사회학 쪽에는 거의 책을 안보시는 것같아서 서로 엇박자가 많이 나는 것같습니다. 이런 말씀드리자면 진짜 건방지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늘봄님께서 성서문자주의를 비판하시는 “정도 만큼”이라도 종교학쪽에 좀 관심을 기울여주시면, 앞으로 좋은 대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늘봄님께서 “이제는 종교와 하나님은 깨달음에 관한 것이지 전지전능한 하늘 위의 하나님을 믿는 시대가 아닙니다”라고 하셨는데, 사실 거의 소멸을 향해 가는 이른바 자유주의 교회에는 맞는 말이지만, 전반적 종교현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거든요. 현상적 사실과 규범적 판단은 구분되어야 된다고 보구요.

늘봄님께서 아래서 언급하신Loyal Rue의 입장은 신이라는 개념을 상정하지 않고 종교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종교학에서 어느 누구도 신의 존재을 중심으로 종교의 본질 또는 이론적 추구를 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학과내에서 종교학에는 별 관심이 없거나 방외적으로 “신학적 작업”을 하는 학자는 제외하고 그렇다는 말씀이구요. 문제는 종교적 현상에 대한 경계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래서 지적했듯이, 개념은 배타적어야 개념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종교의 정의를 내리는데 지나치게 넓으면 오리무중이 되어 버리고, 지나치게 좁으면 어떤 현상을 종교현상이 아니라고 제외시킬 수 있습니다. 제가 판단컨대, Rue의 입장은 기존의 신학적 대척점에서 초자연적 신에 대한 믿음 없이도 종교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저는 보구요. “그런 예수는 없고”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은 종교적 현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규범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늘봄님은 기존의 신학적 독단론(dogmatism)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다가 오히려 새로운 환원론(reductionism)의 형태로 나아가시는 것으로 보구요.

늘봄님께서 “다음 기회에 제가 왜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유들을 Religious Naturalism 을 통해서 소개하겠습니다”라고 하셨는데, 기대됩니다. “나는 원죄를 믿지 않는다,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1700년의 이원화된 기독교를 부정한다” 등등의 단칼베기식 선언보다는 왜 그런지 또 어떻게 그렇게 설명되는지를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늘봄님은 이와 함께 1700년 전의 300년은 왜 이분법적 하느님이 아닌지도 설명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즉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 이전의 종교적 상황과 신학의 발전에 대해서 저는 어느 곳에서도 늘봄님이 제대로 설명해 주신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늘봄님께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지 말고 은유적으로 읽어야 된다고 하셨는데, 어느 곳에서도 왜 그래야 되는지를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언어철학자 죠지 레이코프가 주장하듯 거의 모든 언어는 은유적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사실 모든 독서는 은유적 독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교적으로 이야기 했을 때, 은유적 혁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학자 폴 리꾀르가 이야기 하듯, 은유와 상징의 문제에 대해서는 늘봄님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심층적 신앙이나 심층적 독해에 대한 해석학적 원리에 대해서도 선언만하셨지 어느 곳에서도 인식론적 고민을 저는 늘봄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아래 포스트의 긴 글에서 늘봄님은 기독교인들이 정치에는 관심이 많았지 진정한 깨달음의 문제에는 민중신학 이후 거의 성찰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어느 곳에서도 늘봄님의 사회사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신학자 Paul Tillich가 위대한것은 이런 개념들을 조직적으로 정치하게 친절히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늘봄님께서 700면이 넘는 책을 쓰셨다면, 이런 issues를 더 쉽게 이 게시판에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Religious Naturalism에 대해서도 이것이 종교이론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 하는지를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좋은 내용은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납득하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지,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제나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주시는 늘봄님께 감사드리며,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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