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포스팅은 한국의 배낭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작성했습니다. 따라서 알버타 독자들에게는 다소 진부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집 안에 굴러다니던 골동품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제목은 ‘세계를 간다’ 입니다. 24 년 전인 1990 년 봄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구입했습니다. 일본과 미국 편도 함께 구입했던 것 같은데, 제가 발견한 책은 캐나다 편 뿐 입니다. 책 가격은 6 천 원. 당시 물가를 고려한다면 비싼 책이었습니다.
일본 Diamond Big 사의 ‘地球の步き方’ (지구를 걷는 법) 을 중앙일보사가 번역해서 재편집한 책 입니다. 1989 년 해외여행 자유화 몇 개월 만에 출판된 대한민국 최초의 여행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맨 뒷 장 곁표지에는 대한항공 광고가 실려 있습니다. 그 시절 카피 문구들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캐나다를 카나다로 표기한 것이라든지, ‘걷고 또 걸어도 눈만 시리던 그 곳’ 이라는 다소 촌스런 표현이라든지, ‘밴쿠버와 토론토를 일주일에 두 번 취항한다; 는 안내가, 세월의 격차를 실감하게 만듭니다.
제가 맨 위에 올린 사진과 저 책 뒷 장 곁표지 대한항공 광고에 나온 사진은 같은 장소 입니다. 레이크 루이스입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계절 같은 시간대라도 공기의 빛깔, 양광의 차이, 바람의 속도에 따라 천의 얼굴로 드러내는 모습을 달리합니다. 그런 이유로 레이크 루이스를 가리켜 '천의 얼굴을 가진 호수' 라고 부릅니다.
제가 저 호수와 처음 만난 것은 그 해, 1990 년 이었습니다. 저는 레이크 루이스와 처음 조우했을 때 받았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10 대 절경이니, BBC 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 봐야 할 여행지 중 하나니,, 이런 말들은 한참 나중에 나온 것이고,,
그냥 그 때 받았던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태고의 정적’ 이라고나 할까요? ‘표정없는 눈빛 저 편에 도사리고 있는 음산하고 차가운 고요함’ 이라고나 할까요? 1990 년 봄, 제가 머물던 중부 소도시 리자이나로부터 자동차로 열 한 시간을 달려 온 피로를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네 곁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저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해 겨울 더블백을 싸들고 당시 누나집이 있던 리자이나를 떠나 캘거리라는 도시로 출발했습니다. 당시 제게 캘거리는,,, 무연고지나 다름없었습니다. 1988 년 동계올림픽이 아니었다면 아예 들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도시 이름이었을 것 입니다.
캘거리를 새 정착지로 선택했던 이유가 있다면 그 도시에서 레이크 루이스가 두 시간 거리에 있다는 것 뿐 입니다.
느닷없이 한 겨울에 캘거리로 떠나겠다는 내 말을 듣고 누나는 걱정을 하며 "혹시 자기가 섭섭하게 대한 거라도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습니다.
캘거리에 사는 동안, 말 그대로 백 번은 다녀왔을 저 호수를,,,,,,
8 월 마지막 일요일에 다시 찾아 갔습니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겨울에는 겨을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각각 개성과 특색이 따로 있습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레이크 루이스 최고의 분위기는 따로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빙하를 이고 있는 빅토리아 산 봉우리가 죽은듯이 고요한 호수에 거울처럼 비추고 있을 때 입니다. 저 호수에 백 번 이상 다녀 온 저도 그런 완벽한 풍경을 목격한 적은 열 번 안쪽인 것 같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신 분들은 레이크
루이스 기차역에 들러 볼 것을 추천합니다. 눈덮인 겨울이면 더 좋겠지만 오늘처럼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는 날도 나름 정취가 있습니다.
주인공 유리 지바고가 걸프랜드 라라와 헤어지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입니다. (유학 다녀 온 타냐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일 수도 있구요)
어쨌든 영화를 촬영할 당시에는 대륙횡단 여객열차가 레이크 루이스에 정차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여객열차가 이 역을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추억의 역사는 레스토랑으로 변했습니다.
제가 서 있는 장소에 이별을 앞 둔 유리 지바고와 라라가 함께 서 있었습니다.저 멀리서 칙칙폭촉하며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삐~~익~~~ 하고 들려오는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가 두 사람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_- 근데 라라가 맞나요? 갑자기 라라와 타냐가 헷갈립니다. 아무래도 영화를 다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부인과 애인 이름이 각각 따로인 사람들은 이런 게 참 문제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한 나머지 부인과 애인 이름이 헷갈리는 바람에 실수해서 망신이나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실루엣처럼 보이는 능선들은 제가 따로 흑백처리나 포삽을 한 게 아니라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 입니다.
여러 개의 능선들이 안개에 가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 표지판에 적힌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이 트레일을 따라 계속 가려면 네 명이상이 그룹을 지어 함께 가야 합니다. 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권고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 이라는 경고가 있습니다. 만일 어기고 세 사람 또는 그 이하의 인원이 이 트레일에 진입해서
하이킹을 하다가 적발되면 벌금을 내야 합니다. 일종의 '전우조'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만일 네 사람이 하이킹을 하다가 한 사람이 화장실이 급해 도로 돌아 나와야 할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나머지 세 사람도 따라서 함께 돌아 나와야 합니다.
레이크 루이스를 떠나기 전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습니다. 모레인 레이크 입니다. 레이크 루이스 빌리지에서 약 11 km 정도 오솔길을 따라 달리면 모레인 레이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주변에는 보석같은 호수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호수가 모레인 레이크와 레이크 오하라 입니다. 레이크 루이스의 압도적인 명성에 빛을 가려 캐나다 외부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보석들입니다. 다만 레이크 오하라의 경우 호수주변 환경보존을 위해 방문객수를 제한하고 자가차량 출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는 절차가 좀 복잡한 게 흠입니다.
~~~~~~~~~~~~~~~~~~~~~~
9 월 입니다. 1 년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 입니다. 저는 9 월에 태어났습니다. 9 월에 태어나신 분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