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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진화, 늘봄님, 그리고 정토회를 찾아서... |
작성자 내사랑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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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7607 |
작성일 2014-10-07 21:32 |
조회수 50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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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아래 댓글달려다가 길어져서 따로 포스트로 올립니다. 이것 저것 두서없이 썼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프리카 올림
지난 번에 늘봄님께서 올린 포스트에서 언급하신 Terry Eagleton의 [Culture and the Death of God]를 사서 잘 봤습니다. 저는 원래 새책을 사서 잘 안보는데, 이전에 이글튼의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을 재밌게 봐서 늘봄님께서 왜 이글튼의책을 추천하셨는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 이글튼은 무신론자 도킨스와 히친스를 까고 있었거든요. 이글튼 역시 무신론자면서 도킨스의 문화이해를 명제적 이해에 한정시켰다고 비판하였고, 그에 대한 대안적인 책이 바로 새로 나온 [문화와 신의 죽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른바 계몽주의의 발흥으로 신을 대체했다고 이성주의자들이 비판했지만, 사실 신의 죽음, 즉 기독교문화의 무덤에서, 다시 말해서세속화된 사회에서 이성적인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민족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이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이글튼의 주장이라서 늘봄님의생각과 좀 다르지 않은가 싶은데,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문화적 전파나 문화적 변용(acculturation)에 관심이 많은데, 늘봄님께서 역사적 예수 이후 기독교가 변질되었고, 역사적 붇다이후 불교가 변질되었다고 하셨지만, 사실 그동안의 기독교나 불교의 발전은 수많은 정치적, 문화적, 지역적 변수에 의한 문화접변의 과정에서진화 발전된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신화학자 멀치아 엘리아데나 조셉 캠벨보다 불교 등 종교 현상 자체에 대해 더 해박하고 균형잡힌 학자 니니안 스마트(Ninian Smart)는 모든 종교에 순수한 종교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 순수성이란 특정종교에 포함된 사람들의 주장이지 어떠한 종교적현상도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기독교가 순수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면 웃기는 이야기죠.
늘봄님의 종교비판은 도킨스의 종교비판을 닮았는데, 이글튼은 이러한 도킨스적인 시각을 위의 [문화와 신의 죽음] 148 쪽에서 다음과 같이언급하고 있습니다.
““The opposite case — that religion is a set of erroneous propositions or species of bogus science — has been advanced in our time by such old-fashioned 19th century rationalists as Richard Dawkins, who dismisses religious belief without grasping the kind of phenomenon that it is meant to be.’’
어떤 종교든 교리화는 불가피합니다. 교리는 종교적 신념을 논리적, 조직적으로 발전시킨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폴 틸리히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물론 교리가 다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근접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결코 역사적 예수로 돌아갈 수 없고 , 역사적 붇다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봄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에서 발전되고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변질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신것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종교적 변용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물론 원시적 형태의 예수의 가르침이나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재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신학자 휘오렌자가 여성신학적 재건을 외친 것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겠죠.
그래서 시간나시면, 종교적 내용이 별질되었다고 말씀하시기보다는 그러한 변질의 문화적 정치적 변수에 대해서 좀 더 차분히 진술해 주시면 다른 분들도 잘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진화론을 문화에 대입해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망설이는 중이지만, 재밌게 읽은 Nicholas Wade의 [The Faith Instinct]나 Robert Wright [The Evolution of God]같은 책들은 원시종교에서 어떻게 현대에 이르기까지 진화해왔는가를설명하고 있습니다. 도킨스 역시 [The God Delusion] 제 5장 “The Root of Religion”에서 야심차게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교리적 변질이든 상관없이 종교가 변화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인류학자 E. E. Evans-Prichard의 [The Theories of Primitive Religion] 역시 종교적 변질을 설명하기 보다는 종교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좀 다른 형태지만, Rodney Stark의[Discovering God: The Origins of the Great Religions and the Evolution of Belief]은 좀 다른 맥락에서 종교의 진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신을 믿는 현상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고, 이런 종교현상이 그렇지 않은 현상을 흡수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여기 작은세상님께서 영지주의가 이집트의 콥틱 기독교에서 주류였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를 보통 유명한 독일의 역사학자 Walter Bauer의 [Orthodox and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밝혀진 자료와 연구인 Birger Person의 [Gnosticism and Christianity in Roman and Coptic Egypt]는 바우어의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영지주의 문헌을 왜 [The Nag Hammadi Library]라고 했을까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전, 어느 사회학자의 영지주의 문헌 연구논문을 읽으면서 그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library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영지주의 문헌 총서 또는 문고 정도로 보면 될 겁니다. 이 영지주의 문헌은 특정 종교집단이 몰래 숨겨 둔 것이라면, 잡다하게 도서관에 책 보관하듯이 모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밉니다. 즉, 가설이기는 하지만, 영지주의 문헌은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특정종교집단이 정선한 문서의 콜렉션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쨌든, 당시 지혜를 말하는 운동이 사실 운동이라기 보다는 요즘 뉴에이지나 아니면 신지학 정도의 esoteric tradition에 있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옆으로 샌 감이 있지만, 이른바 중국에서 만개된 대승불교가 원시 불교의 변질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승불교인 테라바다 불교는 빨리어 경전(Pali Canon)에 기초한 원시적 종교형태이고, 후에 싼스크리트의 대중화와 이런 문헌의 중국어 번역으로 인한 대승불교의 발전은 나름대로 사람들의 필요와 대중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미래에 대해서 예측해 봐야겠지만, 스탁을 따른다면, 앞으로 종교적 진화는 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갈 것이라고 봅니다. 힌두교 전통에서 신들의 수가 인도의 인구보다 많다고 하지만, 사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신이 살아 남습니다. 캘거리에 힌두사원에 가도 신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대중을 잃은 신은 죽고 사라집니다. 물론 진리의 추구는 대중적 인기와 상관이 없겠지만, 종교는 대중화를 통해서 살아남습니다.
* 사족으로 적어도 종교의 발전, 특히 종교 조직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려면, 종교사회학자 토마스 오데아(Thomas F. O'Dea)의 ” 종교제도화의 다섯가지 난제” (Five Dilemmas i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Religion)를 꼭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다섯가지 난제는 종교운동(movements)이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으로 가면서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서는 종교운동의 초기형태지만, 이미 제도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초기에 쓰여진 바울서신서에 봐도 그렇구요. 종교의 제도화나 또는 다른 종교로 지역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변화되는 문제는 진지하에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한가지 사족을 더 붙이면, 전통적인 기독교와 가장 대조되는 종교는 테라바다 불교입니다. 개신교와 가장 비슷한 불교는 정토종이죠. 일본의 신란의 정토종 개혁 이후, 정토종에서 승려가 결혼한 것은 바로 루터가 가톨릭을 떠나 수녀와 결혼을 한 것과 맞먹는 겁니다. 가톨릭의 행위의 구원 대신에 은총의 구원을 루터가 강조했듯이, 일본의 정토종도 그런 경우구요. 정토종(淨土宗; Pure Land Buddhism)은 타력구원을 대표하며, 열반이 정토로 대체됩니다. 추상적으로 정리하면 그렇다는 말씀이구요. 정토회 홈페이지 가보면, 정토에 대한 정의가 없습니다. 그냥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일구는 정토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헷갈린다는 말씁입니다. 제가 이분이 캘거리에 오시면 질문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겁니다. 정토회와 종토종의 전통과 어떤 연관성이 있냐구요. 만일 정토회가 정토종적 전통에 있다면, 늘봄님의 역사적 붇다, 역사적 예수 추구와 배치됩니다!!!
오데아의 이론을 잘 요약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 참조하시구요.
http://hirr.hartsem.edu/ency/O'Dea.htm
오데아가 쓴 것은 다음링크를 참조하십시오.
http://web.pdx.edu/~tothm/religion/Dilemmas.htm
* 위의 내용을 좀 수정합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TaJ7A6Y5g6k#t=562
법륜스님의 정토사상에 대한 유투브 강연입니다. 정토는 타방정토, 유심정토, 미래정토로 설명을 하시는군요. 즉, 법륜스님은 정토사상을 견지하시는 분으로 생각되구요.어쩌면 한국불교는 선불교전통도 강하지만 법륜스님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정토사상이 강하게 들어 있는 것같습니다.
윤회의 문제는 잘 모르지만, 법륜스님께서 잘 설명하시는 것 같습니다. 늘봄님께서 윤회의 인과율은 아트만의 힌두교 전통에 기인해서 이해하셨던 것이라고 봅니다. 법륜스님께서 윤회사상은 인도불교에서 묻어왔다고 하셨는데, 제 식으로 이해하자면, 근본불교는 아나트만(무아)의 개혁이고, 이러한 아나트만의 개혁은 윤회의 인과율과 정면으로 배치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무아사상을 강조하면서 인과율을 말한다면 논리자체가 모순되는 것이라고 보구요. 그런데 윤회사상을 완전히 부정하면 불교의 연기법이 문제가 될 것같고, 무아사상이 지나치면 인식주체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지는 불교에 대해서 무지한 저로서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른바 대승불교에서 중관불교와 유식불교가 갖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갈등은 우리같은 초보는 영원한 수수께끼죠. 공과 무아를 이야기하면서 인식주체를 부인할 수 없으니까요. 인식주체의 문제를 강조하면, 공과 무아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요? 어째든 선업(good karma)이나 merit(공덕?)의 문제는 여전히 연기의 인과율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보구요.
그런데 만일 초기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대본으로 산스크리트 대신에 빨리어 텍스트로 했다면 중국 불교의 얼굴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면서 불교의 역사적 발전 및 사상적 구조에 대해서는 니니안 스마트의 [Buddhism and Christianity: Rivals and Allies]를 강추합니다.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마트가 홍콩 대학교에서 강연한 책으로서 그의 비교종교 및 비교철학 중에서 가장 쉬운 책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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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이 정토사상이 강하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 주석을 달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토사상은 아미티경을 근본으로 하는데 그 경의 스토리는 사람들이 아미타부처님을 믿으면 다음 세상에서 그 부처가 있는 정토 세상에 나서 끝없이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의 기독교에 가까운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스님도 한국 불교의 전통 선상에 있어서 정토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못하겠지만 상대적으로 적지 않나 싶습니다. 가령 정토법당에서 모시는 불상이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석가모니불입니다. 여기에서도 보듯 정토회나 법륜 스님의 지향점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고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부분에는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제인가 사후가 궁금하다는 노인에게 좀 이따 죽어보면 다 알텐데 뭐가 궁금하냐는 답변을 하던 동영상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잘 살아 왔으니 오늘이 괜찮고 오늘이 괜찮으니 내일도 괜찮고 내일이 괜찮으면 사후도 좋다고 하더군요.
선불교의 핵심 가르침 중에 하나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인데 제가 보기엔 법륜 스님은 이와같은 선불교 전통 선상에 있는 분이 아닌가 합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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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와 정토종은 그다지 관련이 없다고 할 겁니다. 다만 정토회라고 한 이유는 제가 알기로 사회적 지향점 때문일 겁니다. 맑은 마음은 수행을 통해 개인이 나아갈 방향이고 좋은 벗은 그 개인들이 모여서 지향할 바이고, 그 최종적으론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적으로 지향점이 깨끗한 땅이라고 할 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할 용어가 극락 정토 등이 있는데 극락회는 좀 그래서 정토회라고 하지 않았나 합니다. 그 이후 정토회가 커지면서 정토종 관련단체인가 하는 오해를 받는 것 같지만 사실 늘봄님이 말씀하는 역사적 붇다라는 관점에 층실힌 단체로 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실천적 불교 사상이나 인간 붓다라는 저서들도 그런 맥락에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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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chmania 님 안녕하세요. “정토회와 종토종의 전통과 어떤 연관성이 있냐구요.” 이것은 제가 잘 못 말하였습니다. 수정하려다가 그대로 뒀는데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현재 한국에서 있는 조직으로서의 정토종이 아니라 “정토사상적 전통”이라고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하다는 표현은 제가 과했습니다. 제 생각을 교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판단컨대, 원시불교는 모든 불교의 핵심이겠지만 아나트만을 근간으로 형성된 종교로서, 기본적으로 meditation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devotion과 상당히 다르죠. 늘봄님이 주장하시는 것은 이러한 소박한 원시 불교로 되돌아가자는 것으로 보구요. 그런데 선불교의 깨달음은 원시불교형태를 많이 닮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역사적 붇다를 재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적 불교의 형태로 보구요. 늘봄님이 지향하시는 것은 예수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은 인간예수라는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의 사상을 우리가 본받자는 것으로 저는 보며, 역사적 불교 역시 부처님이 아니라 인간 싯다르타가 깨달은 그것을 알자면 원시 불교의 역사적 시타르타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덧칠된 붇다가 아니라 깨달음의 고행을 하던 시타르타를 발견하자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그 싯다르타한테 아무리 공양을 올리고 불공을 들여봐야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깨달음의 상태죠. 이런 면에서 열반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깨달음 자체여야 한다는 것으로 저는 봅니다. 선불교 전통에 있거나 다른 전통에 있건 그 태동의 기원으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운동의 불을 지피자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돌아감은 현재의 우리의 사상, 과학적 지식, 세계관을 안고 돌아가 재해석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방식은 현대의 우리만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옛승려들도 한 일이었고, 그러한 해석의 과정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낳았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진화하겠죠. 그런데 우리가 원시 불교로 돌아간다고 해도 대승불교가 일궈논 중도-깨달음의 전통을 뛰어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형태든 사상의 정교화는 필요하니까요. 법륜스님께서 고백하셨듯이, 스님께서는 불교의 대중적 활동을 하시고 깨달음의 논리와 수행은 승가의 몫으로 남을 것입니다. 불교적 패러다임에서 명상과 깨달음이 불교개혁의 근간이 되듯이, 기독교의 패러다임에서 신앙과 헌신이 기독교 개혁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종교가 만남의 과정에서 기독교는 명상과 깨달음을 품어야 하고, 불교 역시 신앙과 헌신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소박한 생각입니다. 기독교의 불교화와 불교의 기독교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근본 패러다임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을 것으로 봅니다. 즉 기독교의 기독교됨과 불교의 불교됨은 근본출발부터 다르니까요.
그래서 스마트는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In brief, there is between most of mainstream Buddhism and a great part of mainstream Christianity a gulf of priorities. Contemplation is nearly always central to Buddhist practice: it is often peripheral to Christian practice…Rebirth, karma, the non-historical nature of the Bodhisattva ideal, the notion of nirvana—these compete against resurrection, grace, the historical Jesus, the notion of atonement, the goal of reconciliation with God.” (간략히 다시 정리하면, 대부분의 [전통적인] 주류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면 서로 큰 차이가 난다. 명상은 불교의 수행에 거의 항상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반해, 이것은 기독교의 활동에서 자주 주변적인 것이었다....[불교의] 윤회, 업, 보살의 비역사적 성격, 열반의 개념 등은 [기독교의] 부활, 은총, 역사적 예수, 대속, 하느님과의 화해와는 상반된 개념으로서 경쟁적 관계에 있다).
여기서 스마트가 보살을 비역사적 성격으로 본 것은 역사적 존재로서의 보살이 그렇게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세음 보살이 역사적 존재인가요?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존재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 존재에 기독교인들은 devotion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수녀님들이 옛날 법정스님을 모셔서 강연을 듣고, 신부님들이 선명상을 수행하셔도 이러한 기독교의 불교화는 여전히 전통적인 기독교의 패러다임에 있으며, 법당에 아무리 불상을 모셔놓고 일천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핵심은 깨달음에 있습니다. 제가 최성철 목사님을 예언자적인 특성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기독교의 패러다임에 새로운 불교적 충격, 즉 유신론의 종말과 깨달음의 기독교를 외치신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고, 아직은 잘 모르지만, 법륜스님은 아함경을 소이경전으로 모신다고 하시더라도 대승불교적 전통속에 머물고 계신다는 점에서 사제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설익은 판단은 언제나 폐기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정토법당에서 모시는 불상이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석가모니불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아프리카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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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부분은 올렸다가 지웠다가 얻어터질 각오를 하고 다시 올립니다. 제가 쪽팔리에 되는 것보다 터지면 배우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아래 글의 전제는 정토회조직과 법륜스님의 가르침이 불교라는 종교적 요소를 거의 뺀 상태를 두고 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rachmania님께서 “정토회나 법륜 스님의 지향점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이고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부분에는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토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불교사상의 무지화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조직이 하나의 타이트한 구조를 갖고 있고, 이념과 실천이 통합된 자기구조를 갖고 있다고 하면요. 둘째, post-Dharma-Wheel(법륜) 때, 이 조직을 유지하려면 두가지 형태로 가야 합니다. 종교조직이든지 또는 사회사업운동이든지… 말씀이죠. 일본에서 정토종이 세속화된 형태가 바로 소카가카이, 즉 창가학회라는 단체입니다. 이것은 국제적인 조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창가학회는 경멸받지만 일본에서는 엄청난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고 있습니다. 남묘호랑게교라는 단순한 주문으로도 구원을 받으니까 불교전통에 대한 무지를 불러왔고, 특이하게 사회조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즉 창가학회는 종교조직과 일반사회조직이라는 경계선을 특이하게 잘 타고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정토회의 발전을 창가학회와 비교해서 기분나쁘실 지 모르지만, 사실, 조직력이나 사회활동을 보면 창가학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가령, 브라이언 윌슨이라는 세계적인 종교사회학자와 그 쪽 리더와 대담을 하면서 맞짱을 두었을 정도로 열려 있죠. 그래서 소박한 진단이지만, 만일 정토회가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현재 법륜의 권위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지, 창가학회같은 조직으로 발전되든가 다시 조계종에 통합되든가 등등이 아니면 나중에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Soka_Gakkai
rachmania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불교적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 정토회가 발전한다면, 그것은 종교학계에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될 것입니다. 기존의 생각을 넘어가는 것이거든요. 제 소박한 판단에 법륜스님은 열심히 포교를 하고 계십니다. 즉 불교선교사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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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법륜 스님의 사상과 정토회에 대해서 깊이 모릅니다. 다만 정토회 웹사이트에서 다음의 두 가지 글을 읽고 스님에 대한 오해가 풀렸고, 이 정도로 스님을 이해했습니다. 스님은 정토종과 관련된 인과응보와 윤회론을 따르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질문] 이웃분이 교회에 가자고 전도하러 오는데,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니,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한 저로서는 두렵습니다. 남편을 비롯한 양가어른들께서는 기독교를 몹시 싫어합니다. 불교는 사후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요?
[답변]
교회에 가고 싶으면 가십시오. 대한민국 헌법에는 종교와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두 개든 세 개든 종교를 갖고 싶으면 다 가지세요. 그것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옷은 여러 벌 놓아두고 이것저것 갈아입으면서, 종교는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가정을 위해서는 절에 다니시고, 사후세계가 겁나면 교회에 다니시면 됩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사후문제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고 ‘나’로부터 일어나는 거예요. 근심과 걱정은 미래에 대한 생각에 집착할 때 생깁니다. 불교는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언제나 ‘지금 여기’를 가르칩니다.
‘종교로서의 불교’에는 사후세계가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가는 거예요. 어중간하면 육도를 돌고 도는 윤회를 하지요. 세분하면 그보다는 훨씬 더 다양합니다. 교회는 천당하고 지옥, 두 개밖에 없는데 불교에는 여섯 개의 다른 세계가 있어서 거기를 윤회하는 거예요. 또 지옥이나 천상도 한 개만 있는 게 아니고여러 수십 개가 있어요. 종교로서의 불교에는 전생과, 현생, 내생도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는 현생과 내생만 있지요. 그런 점에서 종교로서의 불교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종교로서 불교가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진리로서의 불교를 말합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만 보아도 다른 종교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범주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인도 수행을 하면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입은 옷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어떤 옷을 입든지 몸만 가리고 따뜻하면 되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여러분들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저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옷을 입으세요.’가 아니라 ‘옷에 대한 집착을 버리세요.’ 입니다. ‘어떤 옷이 좋다, 어떤 색깔이 좋다.’가 아니라 ‘그런 것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러면 옷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옷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가르치는데 어떤 옷이 좋다고 얘기할 필요가 없듯이, 종교로부터 해방되라고 가르치면서 어떤 종교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건 모순이고 우스운 이야기이지요.
‘부처님 법문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지옥도 마다하지 않겠으며, 부처님 법문을 들을 수 없다면 나는 천상도 마다하겠습니다.’ 이게 진정한 구도자의 자세입니다. 이때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소소한 장애 같은 것은 부처님 법을 배우는 수행을 위해서라면 하잘 것 없는 것이지요.
저는 솔직하게 말하면 종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편입니다. “종교인이면서 그렇게 말하면 됩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겠는데요, 저는 종교가 인간의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한 폭군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죄책감을 심어주고는 노예 부리듯이 부려먹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님을 좋아합니다. 부처님은 저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해방시켜 주시거든요.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주인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내 생각을 버려야 주인이 되고 자유로워집니다. 부처님의 가피는 여러분들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얻어집니다.
[부처님의 가피란?]
[질문]
기복 신앙은 어리석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피력은 어떤 것일까요? 개인적인 소원이든 전체의 바람이든 부처님께 기도하며 이루어지길 바라잖아요.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답변]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다 바람이 있습니다. 바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거 아니겠어요. 바람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바라는 게 있으면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큰 노력을 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결과만 바라는 게 헛된 욕심이에요. 그런 식으로 할 때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부부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왜 갈등이 생길까? 아! 내가 나를 고집할 때 생기는구나.’ 하고 알아서 자기를 내려놓고 상대를 이해하고 맞추면 해결 불가능해 보이던 갈등이 해결됩니다. 그게 부처님의 가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내가 그대로 마음을 써 봤더니 태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이루어졌다면 이것보다 더한 가피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을 고쳐서 내가 좀 편해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 것이 이루어졌다고 부처님의 가피라고 한다면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에, 설령 그것이 돈이든 사람이든, 거기다 지극히 정성을 쏟으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몇 번 이렇게 저렇게 해 보다 안 된다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렇지만 십년 동안 한 결 같이 정성을 쏟으면 사람이 감동을 하지요. 얼굴도 못 생겼고 키도 작고 성질도 나쁘다고 해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지극 정성으로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십년 정성을 쏟는 것을 보면 마음이 움직이지요. ‘아이고, 저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이렇게 해서 되겠나.’ 이렇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쨌든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게 정성을 쏟으면 사람이 감동하여 변화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절에 돈을 내는 것은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서, 복을 구하기 위해서 돈을 보시하지요.
그런데 정토회에서는 큰 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마한 빌딩을 얻어서 활동하는데, 국제 기아, 질병, 문맹 퇴치 기구인 JTS 1년 예산이 20억이 넘어요. 절 짓는 예산이 아니고 남을 돕는 데 쓰는 돈이 그만큼입니다. 그 돈이 다 어떻게 들어올까요? JTS가 하는 활동을 보고, 활동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보고 감동하면, 옷 사려고 모아 놨던 돈도, 차 바꾸려고 모아둔 돈도 다 보시합니다. ‘에이, 입던 옷 그냥 입고 저기나 줘야지.’ 이런 마음이 감동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감동이 오면 그렇게 됩니다. 정성이 있어야 감동이 있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다, 지극한 정성은 하늘도 감동한다고 말하잖아요. 이런 감동이 오도록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감동이 오도록 기도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하지요.
감동이 오도록 기도를 하면 가피가 생깁니다.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정성을 기울이면 가피가 생깁니다. 하는 짓이 어리석어도 열심히 하면 주위 사람이 도와주지 않습니까. “아이고, 하는 게 가상해서”라는 말을 하잖아요. 도와줘 봐야 돈 떼이는 거 뻔히 알고도 하는 게 하도 가상해서 빌려줄 때 있지요? 이렇게 감동이 와야 해요. 이렇게 기도는 감동을 줍니다.
부처님이 감동하셨다고 말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감동한 것입니다. 옛날에 관세음보살님한테 기도했더니 누가 양식을 소에 싣고 가져오더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 가피 내용을 보면 누가 가져옵니까? 사람이 가져옵니다. 즉 사람이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천지 기운이 바뀝니다. 우리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을 넘어서면 천지 기운이 바뀔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한 기적은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경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해탈, 열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해야만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 가운데 기적이며 최고의 부처님 가피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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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문제는 이미 제 나름대로 정리를 했기 때문에 동어반복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정토종이 아닌 정토사상에 관련해서는 법륜스님께서 “타방정토, 유심정토, 미래정토”로 틀로 설명을 하시고 이 틀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시는 것같은데, 이 부분은 clarification이 좀 필요합니다. 이것은 법륜스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판단할 수 없구요. 저의 이해가 낮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위의 세가지 정토관이 원시불교의 형태는 아니라고 보구요. 대승불교에서 갖는 틀이 아닐까요? 짐작컨대, 이것은 대승불교에서도 정토사상의 틀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들이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Pure Land Buddhism이란 독자적인 주제로 공부를 한 적이 없어서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제가 공부한 것은 주로 중국과 한국의 선종사였습니다.
저는 법륜스님의 강좌의 비디오에 비친 분들이 보면 이른바 중년의 보살님들이 대부분이더군요. 거사님들도 많지만요. 이분들은 이미 불교에 깊이 귀의한 분들이 많은 듯했는데 저의 오해일 수 있습니다. 교회다니는 고등학생도 스님께서 유명하시니 참석해서 질문하는 장면도 봤지만요. 이런 면에서 정토회는 종교조직 또는 종교사회운동 또는 종교개혁운동입니다. 정토회(JTS가 정토회가 맞다면)가 예산이 20억이 넘고 빌딩이 있다면, 이것은 법륜스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도화를 향한 종교조직입니다. 해외지부도 여러 곳이 있구요. 배워가는 중이라서 속견은 금물이겠지만, 이것은 다른 여타한 불교나 기독교조직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몇년 전 Richard Madsen의 [Democracy’s Dharma]라는 타이완 종교적 현황에 대한 책을 서평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대만에서 불교와 도교 조직이 어떻게 사회자선과 봉사활동을 통해서 사회의 존경을 받고 발전해 나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국의 불교 학자가 대만의 이러한 혁신운동을 높이 평가한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즉문즉답이 불교적 교리 문답이 아니고 생활문답 그리고 처세문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법륜스님의 카리스마와 리더쉽, 그리고 사회봉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지적한 오데아의 다섯가지 난제는 어느 종교조직이든, 사회운동이든 직면해야 하는 문제일 것같고, 그러한 난제를 이론화시킨 것이라서 정토회도 이런 딜레마의 개연성을 내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제에서 약간 벗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종교이해에 대한 편의를 위해서 첨가합니다. 종교의 정의는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의를 내리는 것과 종교학계에서 정의내리는 것은 다릅니다. 신화(myth)에 대한 이해도 같은 맥락입니다. 신화는 엉터리나 가짜 이야기, 미신이라는 대중적 이해와 신화는 신화를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이야기로서 종교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라는 종교학적 이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종교의 정의에 대해서 흥미로운 사례가 두가지 있습니다. 싸이언톨로지의 경우, 당사자들은 종교조직이라고 하는데, 유럽정부는 종교조직이 아니라고 합니다. 종교조직일 경우, 세금을 면제받을 수 있거든요. 이와는 반대로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TM)의 경우, 자신들은 종교조직이 아니라고 합니다. 종교조직일 경우, 명상강좌를 개설해서 돈을 받으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학자들은 이 두 단체 모두 종교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하죠. 괜히 제가 참견해서 정토회를 사랑하고 법륜님을 존경하는 분들에게 누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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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의 불찰이지만,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위의 글의 논지를 다시 인용합니다.
//어떤 종교든 교리화는 불가피합니다. 교리는 종교적 신념을 논리적, 조직적으로 발전시킨 노력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폴 틸리히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물론 교리가 다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근접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결코 역사적 예수로 돌아갈 수 없고 , 역사적 붇다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봄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에서 발전되고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변질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신것은 시간과 공간에서의 종교적 변용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물론 원시적 형태의 예수의 가르침이나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재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성신학자 휘오렌자가 여성신학적 재건을 외친 것도 그런 방법 중의 하나겠죠.//
여기에 첨가하여, 불교 역시 얼마든지 초기 경전으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불교적 재건을 꿈꿀 수 있겠죠. 어떤 종교든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미래에의 새로운 전망을 향하여 자기 갱신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근본불교로 되돌아가든,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자기 갱신을 하든 그것은 종교 조직 자체의 몫입니다. 또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방법도 있겠죠. New Religious Movements가 거기에 속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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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문화의 부산물로써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변화합니다. 그러나 원초적인 스승(부다,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이 문화의 변천 속에서 변질되거나 상실되면 종교는 죽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쇠퇴해가는 원인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법륜스님도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법륜스님이 속마음으로 '종교로서의 불교'를 숨기고 겉으로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주장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스님께서 사심없이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전파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제도적 종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자유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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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의 위의 말씀에 저의 소견을 달려다가 평행선을 긋는 것 같아서 생략하겠습니다.
전에 부탁드렸듯이, 선언적 말씀과 몇마디 하시기보다는 본격적으로 계몽적인 글을 차분히 올려서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늘봄님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건방진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항상 진리탐구의 끈을 놓지 않는 늘봄님이 인상적이구요.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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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은 무었을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부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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