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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죽은 후에 누가 천당에 갈 수 있나?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8353 작성일 2015-09-18 08:27 조회수 2952
종교인들은 죽은 후에 천당에 가서 이미 죽은 부모님들과 형제들과 친구들을 만나려는 꿈을 꿉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지극히 자연스러운 바램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밤 로또멕스가 당첨되어 55밀리언 달라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심일뿐입니다. 

그런데 제도적 종교가 율법을 만들고 이것을 신 또는 하느님의 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다 죄의 용서는 오직 종교쳬계 내부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짓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내부에서는 이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종교 밖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좋은 예로, 미국의 어느 주정부 관서의 공무원이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때문에 동성애결혼증명서 발급을 거절했다가 감옥에 갔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다는 약속 아래 석방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과 사회적인 책임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동성애결혼을 반대하는 믿음은 교회 안에서 가능할지 몰라도 교회 밖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느 특정 종교의 개인적인 믿음 또는 교리가 온 인류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극히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정치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물론 이 진실이 밝혀지면 현정권은 향후 50년 동안 재집권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소문입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것은 현정부를 무너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참회일뿐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정부와 언론의 거짓과 은폐에 분개해서 울었던 것이 아니라, 제 자신에게서 불의한 정부와 언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울음이 나왔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 아이들이 나의 자식과 같애서 양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써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솔직하게 재점검해야 합니다. 이 참사는 정치적인 잘못이고, 이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를 회피하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은폐된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종교적 전통을 새로운 전통으로 개혁하는 것이 종교개혁이었듯이 잘못된 믿음은 참된 믿음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죽은 후에 누가 천당 갈 수 있습니까? 물론 저는 천당지옥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있다면, 정부와 언론의 거짓과 은폐를 두둔하는 믿음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을 받아주는 천당은 하늘 위에 없습니다.

천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죽은 후에 가는 다른 세상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거짓과 은폐를 이 사회에서 몰아내고, 모두가 안전하게, 자유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즉 이 땅 위의 천당을 건설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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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side  |  2015-09-1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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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반대할 생각은 없으나 사후세계에 대하여 단정짓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라고 말한다면 어느 누구도 님과 언쟁을 벌이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언쟁을 유도하며 자신의 말재주를 과시하려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사후세계와 신에 대해서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존중하심이 옳바르다고 생각 합니다. 많은 기독교신자나 무슬림,,불교도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자도 있고 대단히 박식한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그들이 바보라서 교회를 다니며 절에 다니고 천당과 지옥을 믿는 건 아니지요.

동성애 역시 다수의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정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배척하고 죄악시하며 차별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지요. 각자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모처럼 고국에 들어와 내나라 내가족 내친구를 만나며 내가 누군인지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기로 마음 먹고 나니 싸울 일이 없군요.

제가 건방졌다면 사과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내사랑아프리카  |  2015-09-1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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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side님께서 종교에 대해서 좋은 comments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체계적인 언어를 갖고 있고 또 이러한 언어를 바탕으로 해서 형이상학적 구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이라는 허구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겨울연가\"에 반한 일본인들이 촬영장소를 방문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과 형이상학적 구성 능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겨울연가 촬영장소를 허구이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거나 과학적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하거나 반대로 그것이 실재한다고 증명하려는 일본인 팬들이 있다면 웃기는 일이겠죠.

종교적 신념체계와 과학의 이분법으로 나눠서 기독교인들은 신화적 진술을 과학적이라고 증명하려거나 과학자들은 신화는 과학이 아니므로 쓰잘데없는 것이라고 쌈만을 일삼는다면 참 메마를 것입니다. \"천당은 죽은 후에 있는 것이다.\"는 정의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늘봄님도 인지하신바구요, 문제는 이것이 과학으로 이끄는 좋은 정의가 되지 못하므로 과학에 전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처럼 분업화된 사회에서 과학적 명제, 개념, 정의, 이론은 철저히 과학적으로 되는 명제, 정의, 개념,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종교는 이러한 과학의 영역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나 창조론자들이 그러한 시도를 해서 도킨스 선생한테 핀잔을 많이 받지만요.

약간 엇나간 듯하지만, \"종교학\"이라는 학문적 수업 이전에 캘거리대학이나 알버타 대학(종교학과 없음)같은 대학에서 세계종교나 종교개론을 가르치는데 선생 어느 누구도 \"사후의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러한 신념의 역사나 현상을 가르칩니다. 그것을 믿고 안믿고는 추후의 일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도 종교개론이나 세계종교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종교학을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이 많습니다. \"천국/천당은 없어\"라고 단칼로 베 내기 보다는 \"천국\"에 대한 역사, \"지옥\"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문학자들이 단테의 \"신곡\"은 현대 세계관에 맞지않은 구닥다리로 보지 않고 그의 문학적 천재, 그리고 그가 그리는 세계가 갖는 문학사적 의미를 지금도 열심히 파고 있습니다. 그럴려면 \"중세\" 기독교 세계관도 열심히 파야죠. 사실, 현대 보수 기독교인들이 상상하는 천국과 지옥은 성서적이라기 보다는 중세 기독교의 영향이 큽니다. 어쨌든 신학교나 불교대학이 아닌 일반 대학에 \"Death and Afterlife\"라는 과목이 있는 것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개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의 한 자산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개설한다고 봅니다.

이른바 \"진보적 신학\"은 새로운 상상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종교적 \"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때는 종교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큰\"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꼭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소중히 받아들이고 그 비판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고 노력해야 하며, 무신론자들도 종교인들이 하는 신앙적 헌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진정한 다문화 다종교적 사회를 구축할 수 있겠죠. 종교간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종교인들이 무신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좀 더 빗나간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불교가 한 때 가장 중요한 종교지형을 형성한 것은 불교가 갖는 강력한 형이상학적 세계 때문입니다. 특히 정토종적 대중적 이해, 즉 극락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선교사들도 좋아했습니다. 한국의 무속이나 유교는 내세관이 거의 없어서 이 세 종교는 보완 관계에 있었습니다. 보통 혼합 또는 습합(syncretism)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사람이 아프면 주술적인 무당을 찾아가고, 사람이 죽으면 위폐를 절에 모셔 고인의 명복(명부전)을 빌고, 가족의 연속성을 향한 갈망으로 유교적 제사를 열심히 지냈습니다. 일본인들도 복을 빌려고 신사에 가고, 사람이 죽으면 절에 가고, 결혼식은 기독교식으로 많이 한다죠. 전형적인 종교 습합인데, 저는 이것을 상호보완적 관계라고 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기독교가 한국에서 갈등을 일으킬까요? 유신론에 기반한 기독교는 나름대로 완벽한 세계관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강력한 내세관요. 그래서 어느 종교보다 울타리가 강합니다. 이러한 나름대로의 완결된 체계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를 덜 필요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적 믿음에 대한 강력한 요청이 요즘 이뤄지는데, 늘봄님처럼 \"깨달음의 하나님\"도 그러한 요청의 일부고 저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Zeitgeist)은 거슬러 갈 수 없다고 봅니다. 즉 기성 보수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요청을 많이 인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오래전에 이러한 요청을 알고 있어서 흥미로운 책을 편집했는데 그 책이 [The Other Side of God: A Polarity in World Religions](1981)라는 책입니다. 여러 세계종교 속에서 보이는 내적인 믿음, 깨달음, 신비주의 등에 대한 재평가죠.

옆으로 많이 샜습니다.

피철묵  |  2015-09-1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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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식함과 진리를 깨닫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중세시대에도 박식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모두 천동설을 믿었습니다. 지금의 박식한 사람들이 미래에는 무식한 사람으로 판명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확신하는 것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내 생각에 천국이 가까운 것 같다." 내지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과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5-09-1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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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철묵님 말씀처럼, 박식함과 과학적 이해는 별로 상관관계는 없습니다. 책을 만권을 읽었다고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 발견이 우연일 경우에도 과학적 탐구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20억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성 이론으로 치자면 아인슈타인 한명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과학은 이론과 이론의 반증과 검증으로 되는 것이므로 보편적 언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그 이론이 반증된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진술이 아닙니다. 종교적 진술은 어떤 형태로든 거의 대부분 검증과 반증이 될 수 없으므로 과학으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과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바트 어만같은 성서학자에 따르면, 예수는 종말론적 기대를 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종교적 확신을 가진 지도자나 추종자들이 \"천국이 가까왔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보편 언어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것은 특정 종교의 사투리일 뿐입니다. 20억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믿고 확신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라엘리언들의 주장은 양자 모두 종교적 진술이라는 측면에서 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저의 이러한 주장을 싫어하겠지만 그 차이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없습니다. 그래서 보수기독교인들이 비교종교학을 싫어하는 이유도 됩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단정적인 진술이나 성명을 발표한다고 잡아가지 않습니다. 힌두교인들한테 가서 삼사라, 목샤, 아트만이란 없다라든가, 불교인들한테 가서 니르바나나 아나트만은 완전히 허구다라고 하면 더 이상의 대화는 진척되지 않습니다.

그럼, 종교적인 \"깨달음\"이란 존재할까요? 제가 \"단정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따위 \"깨달음\"이란 없습니다. 오직 지식만이 진리입니다. 끝없이 앎을 추구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면 되지 왜 구태여 종교라는 말을 붙이며, 영성이라는 말을 붙이며, 깨달음이라는 말을 쓸까요? 명상 따위는 왜 하나요? 제가 볼 때 아무것도 과학적 지식에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앉으나 서나 과학적 진리, 사실탐구,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즐거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늘봄  |  2015-09-19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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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어를 만들어 기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신, 하느님, 삼층 세계관, 천당, 지옥, 천사, 마귀, 공중에 떠다니는 영혼, 귀신, 사탄, 등등 에 대한 상상을 문자화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들이 실제로 물질적으로 인격적으로 인간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단지 인간의 뇌의 작용일뿐입니다. 지난 주 씨엔드림 종교칼럼의 한 부분을 여기에 퍼왔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언어는 세계를 창조했으며, 언어에 따라 세계의 모습은 다양하게 변해왔다. 즉 인간의 언어는 종교, 예술, 문화, 과학을 만들고 발전시켰다. 특히 과학 이전 (비과학시대)의 문화에서 고대인들은 당시의 극히 제한적인 어휘들을 가지고 종교적 언어를 창안했으며,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종교를 만들었다. 고대 언어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여러가지 모호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고대 언어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의미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과학 이후(과학시대)에 인류문명이 발달하고 의식이 깨어나면서 인간의 어휘는 급격히 증가했고 사회도 전문분야들로 세분화되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과학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살면서 언어의 과학적인 사용과 비과학적인 사용을 분명히 구분한다. 과학에서는 모든 것이 정확성, 보편성, 명료함에 달려 있다. 과학적 방법은 상식적이며, 인간 역사상 처음으로 실제로 거대하고 강력하며, 잘 조직화된 지성의 조화를 이룬,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현대 과학은 ‘인식된 사실의 세계’와 ‘선택된 가치의 세계’를 아주 효과적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전통적 종교체계는 여전히 과학적 ‘사실’(fact)과 정신적 ‘가치’ (value)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 물론 비과학시대의 고대 경전들은 사실과 가치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에게 삼층 세계관이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가치와 사실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첨단과학시대에 삼층 세계관은 더 이상 쓸모없는 골동품이 되었으며, 우주진화 세계관과 우주 이야기가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이 되었다. 현대 과학은 공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세계’와 ‘검증할 수 없는 세계’를 차별한다. 물론 창조론자들은 이 차별을 거부한다. 21세기의 종교는 이 두 세계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전통적인 종교들은 각자의 전통을 재해석하여 이 두 세계가 통합된 ‘우주진화적 종교’로 전환해야 한다. 사실과 가치는 동일하게 소중하다. 그러나 사실과 가치가 통합된 우주적인 지혜가 더욱 소중하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5-09-1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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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톰 페인(Thomas Paine)은 [이성의 시대] (The Age of Reason)라는 책을 써서 기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비판했지만, 과학적 발견을 제 1준칙으로 삼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사람들이 과학적 세계와 함께 신화적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산업화 이전에는 종교생활을 제대로 못했던 인민대중까지 산업화이후는 대중적 종교운동을 확신시켰죠. 우리가 말하는 근대성(modernity)이라는 개념은 바로 계몽주의의 등장과 산업화를 의미하며, 과학적 세계관을 기본으로 깔고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근대성의 등장은 신화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사실, 과학의 발달로 3층적 세계관을 믿는 사람들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이러한 삼층적 세계관적 인식을 필두로 신화적 인식은 사라져야 되지만, 사실은 이 근대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가고(myth-making) 있습니다. 진화적 인식도 이러한 신화만들기에 일조를 하고 있죠. 이것이 바로 신종교(new religions)의 등장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적 세계관이 빛을 잃은 곳에 새로운 세계관 또는 신화적 세계가 형성됩니다. \"우주적 진화\"(cosmic evolution)라는 인식은 신지학의 창시자 블라밧스키도 갖고 있었습니다. 늘봄님께서 주장하시는 \"‘우주진화적 종교’로 발전될 이상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종교 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합니다. 경쟁에 뒤쳐진 종교는 소멸하고 가격파괴와 대형마트를 만들어 경쟁 우위에 있는 종교는 살아남습니다. 현재 진보적 기독교는 경쟁에 밀렸고, 소멸될 위기에 있습니다. 물론 보수교회가 진보적 교회로 변화되는 싸이클을 인정한다면 어짜피 완전 소멸은 안될 것입니다. 그동안 보편적 신화론을 제시한 기독교가 힘을 상실한 자리엔 여러 \"파편화된 신화\"(fragmented myths)가 자리를 대신합니다. 개인적 주장과 하나의 운동과 제도로서의 종교는 다릅니다. 요즘, \"I am spiritual, not religious\"말은 통합된 신화론을 갖는 대신 파편화된 신화를 갖는 사람들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지 신화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신화론의 등장이죠.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종교의 소멸을 원한다면, 또는 유신론의 종말을 원한다면, 도킨스 선생은 종교비판운동도 열심히 하는 것과 동시에 정치비판, 사회비판을 더 강화해야 하며, 결국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대체할 유토피아 또는 이상적 복지국가를 이 땅에 구축하면 됩니다.

허, 그런데 세월호의 진실보다 \"정치인으로\" 매우 모자란 대통령 보호하는데 온 국민이 전일적 합일을 향해 가는 한국을 보면, 그런 시대는 쉽게 안 올 겁니다. 사람들은 \"역사적 박정희\" (The historical Park)을 말해 주면 엄청 싫어하고, 신화적 인물(mythical figure)로서의 박을 이야기하면 고마워 죽을려고 하는데요. 그러니 현상과 요청은 다르죠.

내사랑아프리카  |  2015-09-1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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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께서 "이것들은 단지 인간의 뇌의 작용일뿐입니다."라고 하셔서 생각나는데, 아래 어느 댓글에서 칼 융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말씀하셨던 것같은데요. 제가 알고 있는 한, 융은 오히려 종교나 영혼의 실재를 뇌작용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과학적 발견이 종교적 활동이나 영성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과학도 독립적인 위치를 갖고 있지만, 우리 문화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과학의 영향은 우리의 삶에 상당합니다. 만화, 영화, SF 소설 등도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늘봄님께서 "... 이 두 세계가 통합된 ‘우주진화적 종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언제 그것이 가능할까요? 과학은 계속 발전되는데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산물에 제한 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과학은 지혜보다 지식이 더 앞선다고 보구요.

종교는 과학이 아닙니다. 삶의 의미와 그 궁극성을 찾는 것입니다. 기독교로 보면, 창조설화는 고작 신구약 성서에서 3장에 불과하고, 편집된 것을 감안하면, 분량은 더 적습니다. 옛날에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보다 오히려 생로병사에 더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과학이 아니며 우리는 왜 아픈가? 불행과 고통에 의미란 있는 것일까? 왜 악한 넘들은 잘 살고 권력을 떵떵거리며, 착한 사람들은 이토록 불행한가? 그런 질문들을 기독교는 기독교식으로, 불교는 불교식으로, 힌두교는 힌두교식으로 하였고, 그 이론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생로병사를 이해하려 했구요. 이런 전통적 방식이 맘에 안든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그런 질문에 나를대로 "확신에 찬" 때로는 "절대적" 해답을 주려 했습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은 그런 답은 전혀 make sense하지 않다고 부인하구요.

창세기 3장이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된 것은 종교적 진술을 과학화하려는 창조론자들이 부풀려 놓은 것이죠. 우리가 이들의 주장에 계속 obsessed 될 필요가 있을까요?

lakeside  |  2015-09-20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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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사후세계는 과학이나 지혜로 증명디는 것이 아니지요.
저는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아직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종파가 있고 일부 목회자의 잘못된 언행에 혼란스럽지만 어느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일이고
최신첨단과학도 종교가 허구라는 것 또한 증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신앙은 믿음인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해도 믿는 자와 밎지 않는자들로 나뉘겠지요.

늘봄  |  2015-09-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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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으로 무엇을 믿든지 그것은 믿는 사람의 권리이고 자유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것도 권리이고 자유입니다. 전통적인 종교가 만든 '믿음'이란 것은 조건부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잘못되었습니다. 믿음을 주장하는 믿음체계는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믿는 것(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정의했고, 오랜세월의 전통과 형식을 지키는 것을 믿음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교회 내부에서는 이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교회 밖 세상에서 이것을 강요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모순입니다.

신앙(faith)은 믿음(belief)과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혼돈하여 같은 말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씨엔드림의 지난 주 종교칼럼 중에서 다음 부분을 인용합니다. 21세기의 신앙에 대한 글입니다:

"현대과학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종교와 신앙과 믿음은 과학이 발견한 공개적 계시 즉 과학적인 우주 이야기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해야만 하는 때가 도래했다. 인간은 우주진화 과정에서 지구 상에 출현했고, 계속해서 자의식의 범위와 자의식을 가진 자유를 확대시켜 나가고자 노력하는 자율적이고 진화적인 생물종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미는 되어감의 과정이다. 끊임없이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어주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현재 모습보다 몇 단계 앞서 살아간다.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신앙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시대와 상황의 의미를 인식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적인 신앙을 갖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앙이란 종교적 단체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며, ‘믿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신뢰하는(경계 넘어 개방하고 포용하는) 방식이고, 보는(인식하는) 방식이고, 사는(실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신앙(faith)은 믿음(belief)이 아니다. 진보적인 기독교신학의 선구자인 돈 큐핏은 이렇게 말했다: “신앙은 의지의 문제이다. 어떤 형이상학적 교리들이 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논증에 의해 신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마음으로 통회하게 하고, 우리가 어리석고 눈이 멀었음을 보여주는, 그래서 종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도록 설득하는 언어의 사용에 의해 신앙이 생겨난다.” 첨단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세계를 초월하는 인격적이고 전지전능한 신/하느님에 대한 상식적이고 적절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다. 삼층 세계관의 고대 언어로 기록된 경전들이 표현하는 신/하느님은 이 시대에 맞는 의미와 현대어로 재해석해야 한다. 참된 신앙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첨단과학시대에 살면서 고대 언어를 사용하는 신앙은 모순이다. 21세기의 신앙은 우주진화 세계관에 어울리는 과학적인 언어와 사고를 지녀야 상식적인 신앙이 된다. 삼층 세계관의 종교들이 가르친 믿음은 이원론적이고 절대복종해야만 했던 ‘보상심리의 조건’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을 우주진화 세계관의 우주적이고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신앙으로 전환해야 한다." (참고: ‘떠나보낸 하느님,’ 돈 큐핏)

토마  |  2015-09-20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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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의 글은 그것의 의도나 사실관계에서 그렇게 시비걸릴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덧글이 많네요. 천국따위의 거짓에 휘둘리지 말고, 지금 살고 있는 사회를 더 친절하게 만들자는 늘봄님의 말씀에 "라이크" 하나 던지고 갑니다.

늘봄  |  2015-09-2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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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믿음에 대한 글이 씨엔드림 종교칼럼(9월 11일자)에 실렸습니다. 여기에 소개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앙’(faith)이란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믿음 즉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의심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는 ‘믿음’(belief)과 동일한 말로 착각한다. 엄밀히 말해서, 신앙과 믿음은 정반대되는 말이다. 종교적 신앙이란 초자연적인 신/하느님을 무조건 믿는 ‘부족적 믿음’이 아니다. 신앙은 선하신 하느님을 향한 복종이라해도,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다. 신앙이란 자율적인 영성 즉 종교적 요청에 대한 자유로운 결단이며, 종교적 가치들을 탐구하기로 스스로 결단하는 것이다. 신앙은 자율적 자기 인식과 자기 초월을 이루어가는 삶의 방식이며, 절망과 암흑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힘이다.

신학자 쇠렌 케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신앙이란 그 깊이가 100km가 넘는 바다 위에 떠가는 것과 같다’ 고 했다. 다시 말해, 신앙은 우리가 살고 행동하는 존재의 바다를 신뢰하는 것이다. 신뢰의 반대어는 의심이나 불신앙이 아니라, 불신, 걱정, 염려이다. 따라서 신앙의 참된 의미는 ‘신뢰’이다. 21세기 과학시대의 신앙은 138억 년이라는 심원한 시간과 공간의 우주진화 이야기를 신뢰하는 것이다. 우주 이야기의 과학적인 공개적 계시는 ‘사실’이며, 이 사실은 종교인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뜻/ 계시’이다. 다시 말해, ‘신앙’은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는 온우주-전체적인 실재-통합적인 실재-하느님에 대한 ‘신뢰’이며, 삶의 현실 전체를 ‘보는 방식’이고, 진화적 온전함을 살아내는 ‘삶의 방식’이다. 신앙과 신뢰와 보는 방식과 삶의 방식은 각기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종교들은 신앙이란 가면을 쓰고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교리를 만들었다. 교리는 인간의 온전함을 돕는 수단이기 보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교회와 회당과 사찰 즉 종교체계를 보호하기 위해 신자(정회원)와 불신자(비회원)를 구분하는 장치 즉 이단을 정죄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삼층 세계관에 기초한 이분법적 믿음과 교리를 강조하는 한, 종교는 어쩔 수 없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이고, 부족적인 집단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전통적인 종교들이 죽어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신앙을 몸(뇌)/마음(영), 내세/현세, 천당/지옥, 징벌/축복, 심판/구원, 등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

일찍이 톨스토이는 ‘하느님’을 살아내는 삶으로 보았다: “실제적인 현실과 삶은 모든 것이다. 삶은 하느님이다. 만물은 변하며 앞뒤로 움직이는데, 그 운동이 바로 하느님이다. 삶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고, 하느님에 관한 의식 가운데 환희가 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신앙은 내세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세에서 온전히 사는 것이다. 종교적 세계는 단순히 관계론적 삶의 세계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생활, 즉 진정으로 진실하며, 살아낼 수 있으며, 생산적인 새로운 형태의 종교생활을 발전시키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하다. 신앙생활이란 교회/사찰에 다니고, 교리를 관념적으로 믿고, 기도하고, 십일조(헌금) 바치고, 죽은 후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참고: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 . "

로그  |  2015-09-2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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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참 안타깝습니다. 천당과 지옥이 있던 없던 개인적인 생각을 굳이 공론의 장에 끌고 나온 의도가
뭔지 궁금합니다. 싫어면 그만이고 안믿어면 그만입니다. 사견은 집에서 가족끼리나 가까운 지인끼리
의논 하시는게 어떠 신지요?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시엔 지면에 실리는 종교칼럼을 카피해서 온라인에 다시 올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늘봄  |  2015-09-2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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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종교(religion) ,신앙(faith) , 믿음(belief)의 어원을 살펴보면, 종교는 '관계'(relationship)라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생명체들과 자연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종교 교단과 인종 만이 축복받고 구원받고 천당가고 하는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신앙은 '신뢰'(trust)라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특정 교리를 믿어야만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전체적인 실재-통합적인 실재 (이것이 하느님의 의미)를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의 어원은 '사랑'(be-loving)입니다. 믿지 못할 것, 믿기 어려운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등을 징벌이 무서워서 또는 축복과 구원을 받기 위해 억지로 강제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것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종교, 신앙, 믿음은 죽은 후 내세에 가는 문제가 아니라, 현세에서 사는 방식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5-09-2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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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님의 주장과 저는 반대의 측면에서 논의가 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이군요. belief와 faith의 구분은 그렇게 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종교 안에서 beliefs 있겠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자 각자의 몫입니다.

그건 그렇고, 늘봄님의 주장은 이른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양 대척에 있구요. 늘봄님의 글에 \"참된\"이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오는 것은 늘봄님의 \"신학적\" 경향성 때문이라고 보구요. 제가 여기에서 제시한 것은 특정 기독교나 종교의 \"참된 신앙\" 또는 \"참된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의 종교적 봉헌 또는 헌신에 대한 것입니다. 그 믿음 또는 신앙이 무슬림의 것이든,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것이든, 무당의 것이든, 싸이언톨로지의 것이든, 여호와 증인의 것이든, 통일교의 것이든, 라엘리언의 것이든, 저는 관심 없습니다. 이들 각각이 갖는 신념체계와 행위(beliefs and practices)의 차이는 비교론적 접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하면 되는 것이구요.

늘봄님께서 \"어떤 특정 교리를 믿어야만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전체적인 실재-통합적인 실재 (이것이 하느님의 의미)를 신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캐나다나 미국이나 전형적인 종교시장입니다. 현재 종교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기 구미에 맞는 상품을 취사선택하는 것이니 자본주의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앞서야 될 듯 하구요.

좀 엇나간 것이긴 하지만, 사족을 붙이자면, 늘봄님께서 \"교리는 인간의 온전함을 돕는 수단이기 보다 사람들을 통제하고, 교회와 회당과 사찰 즉 종교체계를 보호하기 위해 신자(정회원)와 불신자(비회원)를 구분하는 장치 즉 이단을 정죄하기 위한 수단이였다.\"고 하셨는데, 연합교회 교역자 출신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놀봄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연합교회는 조직상 정회원(members)과 준회원(adherents)을 구분하구요. 당연히 visitors는 이런 조직의 논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준회원은 교회 회의에서 참여는 할 수 있지만 의결권은 없습니다. 어떤 조직이건 membership은 있는 것입니다. 정회원의 역할을 못하면, 준회원으로 강등될 수 있고 또 제명당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강령에 위배되면 당연히 그 회원은 제명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회원이 아닌 사람들이 회원행세를 해서 그 조직에 깽판치는 것을 막는 면도 있습니다.

이와 아울러 여러번 언급했지만, 하나의 조직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그 조직의 강령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종교라면, 당연히 교리가 있고 교회 헌법이 있고, 또 각 회원이 지켜야 할 준칙이 있습니다. 저는 늘봄님께서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지금 열심히 싸우고 계시는지 잘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아직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지 않은 \"운동\"(movements)일 경우에는 이런 강령이나 교리, 조직체계 등이 정리되지 않은 경웁니다. 빅터 터너는 이것을 communitas(반구조)라고 하는데, 1960년대의 반문화 운동에서 히피들의 공동체가 그런 경우고, 성 프란시스코의 탁발회 초기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어떤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면 성프란시스코 수도회와 같이 발전되는데 그러면 수도회를 유지하기 위한 강령이 필요하죠. 여러 히피운동들은 그런 제도화된 조직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금방 해체되어 버렸죠.

다시 연합교회로 되돌아가서, 연합교회는 교역자들에 대한 제도화가 가장 잘 된 교단중의 하나라고 알고 있습니다. 풀 타임 교역자는 1년에 한달 유급 휴가 주죠. 두주 동안 설교 안할 수 있는 리딩 위크도 주죠. 또 월급도 경력에 따라서 교단에서 매년 지침을 내려서 각 지역의 개별교회가 목사 월급 함부로 착취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풀타임 일 경우 한주 40시간 정해졌습니다. 게다가 각 교회는 의무적으로 목사 은퇴후를 대비한 연금을 위한 돈을 따로 내야 하구요. 그래서 은퇴하면 굶어죽지 않고 소박하나마 여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제가 들은 바로는 캐나다 일부 교민 교회들은 전도사나 부교역자들을 데려다가 쥐꼬리만한 월급, half time 월급주면서 일은 풀타임 이상으로 시킨다고 합니다. 혹시 그런 교회 다닌 분들 한 번 잘 살펴 보구요. 이 모든 것이 제도화가 잘된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의 차이입니다. 연합교회는 목사안수를 받은 교역자와 그렇지 않은 평신도 교역자와의 봉급 차이가 연봉으로 보면 몇 천불 나지 않습니다. 거의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제도화가 억압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도화된 연합교회에서 교역자는 목숨 떼어놓고 일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열심을 가진 교역자도 있겠죠. 교단에서 정해놓은 월급을 주지 않거나 오버타임 일시켜 놓고 돈 안주면 그 교회 제명당하거나 문 닫아야 합니다. 요즘 법을 바꾼다고 했지만, 연합교회 문을 닫는 경우는 교역자 봉급이나 스텝봉급 그리고 교회 유지비를 제대로 못할 때 그런 경우죠. 아무리 돈이 없는 교회도 교역자를 half time으로 고용할 수 있을 지언정, 고용해서 풀타임으로 일 시키지 못합니다. 심지어 4분의 1 또는 5분의 1 이라는 파트타임도 있습니다. 4분의 1은 일주일에 10시간 일하면 됩니다.

prosperity  |  2015-09-20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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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심오한 지식을 갖이신 늘봄님과 내사랑아프리카님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두분은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 진실이라 판단하십니까 아니면 역사적 허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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