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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늘봄님께 질문드립니다.
작성자 fishlover     게시물번호 8442 작성일 2015-10-10 12:01 조회수 2311

늘봄님은 딴 글에서 천국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이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천국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있다고 믿는 거나 없다고 믿는 거나 똑 같이 증명될 수 없고 죽을 때 까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괴리를 확실히 해결 하셨는지요? 그나마 있다는 주장은 성경이라는 책이라도 있습니다만 없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로 주장 할 수 있을까요?


만약 해결 하셨고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이해 시킬 수 있다면, 저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 들에게 예수탄생 만큼이나 큰 희소식이 될 것 같고요.. 만약 아직 해결하시지 못했다면 지금 게시판에 올리는 종교에 관한 모든 글들이 그렇게 큰 무게를 가지지 못하는 관념의 유희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신앙인으로써 영생의 문제, 구원의 문제, 천국과 지옥의 문제 만큼이나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긴급과제가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늘봄님이 퍼올린 "진보기독교가 교회문제는 제쳐두고 사회문제에 신경쓴다" 고 비난한 글과 일맥상통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있고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그 예수 때문에, 예수이름으로 지난 2천년간 자행된 살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고요. 없다고 믿는다면 이스라엘의 재건, 구약에 나타난 예수탄생의 예측, 그리고 인간의 기원과 자연의 경이로움 등이 마음에 걸리고요....


물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 속에서의 종교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법 없다" 라고 주장 할 수도 있겠죠. 동의 합니다. 마찬가지로 진보 기독교가 진보적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법 없겠죠. 늘봄님의 글을 읽으면 많이 헷갈립니다.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니까, 이 근원적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말에 어려운 과제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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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  |  2015-10-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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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신 내용들에 대한 답은 이미 2012-2013년에 50여회에 걸쳐 씨엔드림 종교칼럼에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금년 초부터 지금까지 38회에 걸쳐 써 온 종교칼럼에 진화 영성, 진화적 종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좋은 질문을 던져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약 2년에 걸쳐 답변했다고 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가장 큰 걸림돌이 고대 성서입니다. 우선 성서에 대한 칼럼을 몇 개 골랐습니다. 이것도 분량이 많습니다.

CN 드림 종교칼럼: (34) (2013년 5월 3일 – 6월 14일)
글쓴이: 최성철 목사 (캐나다연합교회)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 (2)
참 인간이 되는 길의 걸림돌 - 성서 근본주의

참 사람 예수의 정신에 따라서 성서와 종교체제를 근본주의에서 해방시키려는 역사적 예수 신학자들은 예수가 사용한 유대인의 모국어인 아람어, 고대 성서저자들이 사용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북아프리카의 초대 기독교 문서들의 콥틱어(고대 이집트어), 그리고 로마제국의 라틴어 정도는 능숙하게 번역하며,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철학 종교학 현대과학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수준의 학자들이다. 이 학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현대과학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초자연적이고 인격적인 존재로 왜곡하는 근본주의의 모순을 밝히기 위해서 초대 기독교의 문서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역사적 예수의 말과 행적을 탐구한다. 다시 말해, 1세기에 원초적인 예수의 정신과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정직하게 밝히려고 한다. 이 신학자들은 북미의 주류 교단들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며, 필자는 캐나다장로회의 신학생으로 멕길대학 종교학부에서 이러한 학자들로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을 배웠고 캐나다연합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은퇴하기까지 20년동안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전문적인 목회에서 실천했다.

역사적 예수 신학자들의 성서연구에 따르면 참 사람 예수는 제자들에게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깨달음의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요한 3장, 마태 5장) 그러나 예수가 로마제국의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예수의 기적을 문자적으로 믿었던 사람들은 생존의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예수의 정신을 따라 깨달음의 참 인간으로 사는 불편한 길을 포기하고 죽은 후에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서 영원히 잘 사는 안일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는 지구 위에 참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는 현세주의자였는데 후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정신과는 정반대로 내세주의자들이 되었고 이분법적인 종교체제를 강화했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에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을 왜곡하는 성서 근본주의이다. 성서 근본주의는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주장하면서 성서의 하나님의 의미를 크게 왜곡시켰을 뿐만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하나님으로 둔갑시켰고, 교회를 세상의 도피처와 천당가는 문으로 변질시켰다. 성서 근본주의는 참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가증시켰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은 성서 근본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성서 근본주의에 용감하게 저항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 프로이드, 니체, 본훼퍼, 아인쉬타인, 그리고 20세기의 역사적 예수 학자들은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성서 근본주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적용할 수도 없고, 인류가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곳도 없다고 선언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교회는 호모싸피엔스 인간의 본능적인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정직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천당/지옥, 축복/징벌의 이분법적 교리는 인간의 본능인 상상력과 창조력과 자율성과 잠재력을 무시하거나 죽일 수 없다.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너희가 나를 보았으면 너희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한 하나님과의 일체성은 교리적인 성육신의 언어 즉 예수의 신성이 아니라, 예수의 인간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육신(成肉身)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성이 외부로 드러나는 참 인간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 안에 살고 하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을 깨닫는 참 인간의 모습이 성육신이다.

사람들이 옷을 입을때 단추구멍이 잘못 끼워진 것을 발견하면 모든 것들을 풀어놓고 첫 번째 단추구멍부터 다시 끼우는 것처럼, 현대기독교인들은 2000년 전에 갈릴리 해변가를 거닐던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가 참 인간과 하나님과 생명과 세상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기존 종교체제가 강압적으로 주장하는 이분법적 교리들과 무엇이 다른지 분명하게 분별해야 한다. 역사적 예수를 되찾는 것은 성서 근본주의에서 해방되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대인들은 제한적인 어휘로 신비롭고 경이로운 하나님 체험을 은유적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고대인들이 삼층세계관에서 기록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으면 그들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현대과학의 양자우주관에서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지금까지 오랜세월 동안 고정관념으로 지니고 있던 성서에 대한 ‘오래된 렌즈’ 즉 ‘과거의 패러다임’의 이분법적 교리를 용감하게 내려놓고, ‘새로운 렌즈’ 즉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명의 의미, 하나님의 의미, 예수의 의미, 교회의 의미, 인간의 의미를 이해하면 생존과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참 인간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럽고 자유하게 살 수 있다.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기원, 호모싸피엔스 인간의 진화, 성서형성과정, 그리고 성서정경과정을 이해하면 성서 근본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이것은 기독교인의 신학과 신앙에 필수적이다. (참고: ‘기독교의 심장’, 마커스 보그)


성서의 저자: 하나님이 인간에게 쓴 책 -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한 응답 –
하나님의 작품 인간들의 작품
성서의 해석: 문자적 – 실제적 역사적이며 은유적
성서의 기능: 교리와 도덕의 계시 은유적이며 성례전적
신앙과 삶: 죽은 후의 내세 – 믿어야 구원받음 현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 오늘의 삶을 변형
이분법적 구원 우주적 만인구원
보상관계 – 죄/회개/용서 조건없는 사랑과 축복
타 종교들: 배타주의 – 우월주의 다원주의 - 상호문화주의
세계관: 뉴톤의 세계관 – 시계와 같은 기계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 하나의 생명의 망

‘과거의 패러다임’은 원초적인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 지난 1-2 백 년 사이에 생겨난 현대의 산물이다. 사실상, 지난 백여년 동안 과거의 패러다임은 많은 사람들을 양육했다. 많은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위로를 받고 사랑과 연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21세기에 과거의 패러다임을 강요하는 것은 더 이상 효과가 없다. 호모싸피엔스 인간은 본능적인 이성과 지성과 감성을 온전히 조화시키는 독특한 생물종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깨달으면서 진화하는 생물종이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체제는 과거의 패러다임을 떠나보내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대안으로 제시해야 한다.

마커스 보그는 자신의 저서 ‘기독교의 심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성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물론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있지만, 그 하나님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이며 성서가 가리키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도 알려지고 있는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성서의 하나님’ 즉 ‘예수의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이다. 이 사실은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을 배척하는 표지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정체성의 표지이다. 성서는 기독교인들에게 거룩한 경전이며, 성스러운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지난 20세기 후반에 교회를 떠난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성서 때문에 떠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성서를 보는 방식이 그들에게 더 이상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성서 문자주의는, 성서가 문자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무오설, 성서가 문자적으로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 그리고 성서가 문자적으로 도덕적이며 교리적으로 절대적이라는 주장을 강조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새로운 렌즈로 성서를 새롭게 읽으면, 참 사람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을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종교체제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참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쳐주고 자신이 참 인간의 모습으로 살았다.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은 예수가 깨달은 것처럼 ‘참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며, 기독교인으로 사는 목적은 참 사람 예수가 산 것처럼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예배는 참 인간이 되어 참 인간으로 사는 준비이고 훈련이다. 예배는 인간이 외부에 있는 하나님에게 무엇을 바치고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실재(Reality)를 몸과 마음으로 드러내어 참 인간으로 사는 길이다. 예배는 우주와 자연을 통해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다. 예배는 인간의 두려움과 고통과 절망에서 하나님의 용기와 기쁨과 희망을 갖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서를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는 원초적으로 이 세상이 멸망하기를 기다리는 종교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 빛과 소금이 되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죽은 후에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천당으로 올라가기 위한 내세의 종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순간의 영원함을 몸과 마음으로 사는 현세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자연의 법칙이 깨어지는 기적을 믿는 무당종교가 아니라, 참 인간성을 회복하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보호를 받는 이기적인 종교가 아니라, 인류에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희생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으로 선하게 사는 것은 보상심리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심으로 가득한 거래관계가 아니라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심없이 신뢰하는 관계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기독교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깨달음의 참 인간’으로 살기위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 (3)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기원 – 창조론의 모순

21세기의 많은 현대인들이 성서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축자영감설과 무오설과 문자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서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를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체제의 이분법적인 억지주장과 비상식적인말들을 더 이상 믿는체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TV와 인터넷과 DVD와 서적들을 통해서 현대과학의 우주의 생성과 생명의 기원, 기독교와 유대교의 역사, 그리고 성서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정보들을 일상생활에서 어렵지않게 접하고 있으며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종교와 신앙과 영성에 대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호모싸피엔스 인간인 기독교인들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 온전히 조화를 이루는 창조력과 상상력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성서를 ‘과거의 패러다임’에 따라서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는 것은 이미 지난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따라서 21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서 성서를 새롭게 은유적으로 읽으려고 한다.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의 원초적인 신학과 신앙은 믿지 못할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 근본주의는 참 인간이 되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 죽어가는 기독교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성서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seeing), 새롭게 다시 읽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왜냐하면 성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서를 이해하고 사는 것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읽기 전에 먼저 성서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 문서들을 언제,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기록하였고, 이 문서들이 어떻게 정경(Canon)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탐구는 한국과 전 세계의 주류교단 신학교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성서비평학’이다. 성서는 원초적으로 한두 사람이 단번에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 아니고, 또한 하늘에서 떨어진 책도 아니다. 사람들은 글을 쓸 때는 물론 읽을 때에도 자신의 세계관, 지식, 상식 또는 편견에 따라서 해석한다. 삼층세계관에서 기록된 고대성서에 대해서 21세기의 현대기독교인들은 아인쉬타인의 양자세계관 (Quantum worldview)의 새로운 렌즈가 필요하다. 사실상,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성서를 읽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흥미를 잃었을뿐만아니라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남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과거의 낡은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새롭게 은유적으로 다시 읽고 해석하는 방식이 성경의 진리를 해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오해한다.

인간은 생물종들 중에서 지능이 가장 높으면서도 불편한 진리 또는 궁극적인 진리를 모른척 내지는 못본체하는 우둔함이 있다. 다시 말해, 인류는 수 천년 동안 인간 경험의 한계와 지식의 부족함 내지는 무지를 사심없이 용감하게 극복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종교적 교리와 형식과 전통을 창작하고 그 안에 도피했다. 결국은 현세의 인간성을 무시한체 내세의 형이상학적인 신성을 하늘 위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자기만족 내지는 자기기만은 부족적 생존의 두려움이자 죽음의 두려움의 산물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생명을 잘 모르면서 하나님과 죽음 후의 생명과 영생을 안다고 주장하거나 추구하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의 인간성을 무시한체 예수가 깨달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자신의 인간성을 죄인으로 하찮게 여기면서 자신의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호모싸피엔스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것과 살아 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이로운 생물종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왜 나는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등의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은 신비스럽다. 인간은 우주와 지구와 자연현상과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탐구하는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생물종이다. 따라서 종교의 기능과 의미는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들을 자유하게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으면서 삶의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도록 격려하고 돕는 것이지, 종교체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분법적인 교리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지구상에 처음 생겨난 생명체 세포는 산소를 만들어냈고, 이 산소는 미래의 생명체들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산소는 지구의 대기 중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생물체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수십 억 년 동안 단세포 생물체들이 지구 대기권에 산소를 불어 넣어 주어서 지구상의 대기 중에 20% 정도의 산소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숫자는 증가일로에 있다. 이러한 생명의 기원을 모른체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탐구는 불가능하다. 최근에 NASA의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생명의 기원은 지구가 아니라 외계에서 비롯되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과학이 밝히는 사실은 생명의 각 개체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우연한 생명체이다. 우주와 지구의 시작과 생명의 탄생에 대한 과학의 발견은 인간은 미리 계획해서 만들어진 산물이 아니고, 누가 혹은 무엇이 인간을 계획적으로 창조해 낸 것도 아니다. 더욱이 생명은 우연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자연적, 물질적, 인격적인 신으로 숭상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깨닫고 보는 영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의 양자물리학과 천체학을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창조론은 물론 초자연적인 하나님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지질학에 의하면 약6천5백만 년 전경에 화성만한 크기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 것이 지구상에 우연적인 생명체의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 충돌의 ‘우연성’은 이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건들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지구는 정상 궤도에서 이탈되었고 기후의 패턴이 변했으며 생명체들은 대환난을 겪었다. 공룡들이 멸종하고, 지구 표면상에서 양서류 동물들의 지배가 무너졌다. 어떤 종류의 생명체들의 멸종은 또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의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 충돌의 우연성이 척추동물이 출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아무도 그런 대격변을 미리 계획하지 않았으며, 우주에서 흔하게 일어나듯이 그저 우연히 일어났다. 척추동물의 한 종류인 인간은 우연한 충돌의 기회로 탄생한 생물종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과학적인 사실이고 우주의 법칙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바르게 알면 인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인간성을 넘어선 죽음 후의 생명 즉 영생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라는 생명체들이 결합되어 탄생한다. 즉 정자와 난자가 결합되지 않으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것에 신적인 권능이 작용하거나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연한 결합일 뿐이다. 남자는 한 번의 사정에 수백만 마리의 정자를 배출한다. 이들 정자 한 개마다 서로 다른 유전 인자들을 지니고 있다. 여자는 월경 주기마다 한 개씩 난자를 배출하여 일생 동안 약450개의 난자를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한 개의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여 인간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이것이 인간의 생명의 특성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들은 ‘우연성의 산물’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생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명체의 자연의 법칙처럼 죽음이란 생명의 순환과정의 일부이다. 죽음은 불행한 일도 아니며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음은 하나님의 징벌이나 심판도 아니고, 정복하고 물리쳐야 할 원수도 아니다.

모든 호모싸피엔스 인간 각자 속에는 의식(Consciousness)에서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에 이르는 생물체 인간의 진화 과정이 담겨져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의식의 진화를 통해서 자아의식을 깨달았다. 좋은 실례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인간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자아의식의 깨달음의 생물종임을 고백한다.

성서 근본주의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하늘 위에 있는 초자연적이며 전지전능하며 인격적인 존재이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더러운 죄인이라고 단정한다. 성서 근본주의는 지질학과 천체학과 현대물리학과 유전공학을 무시한체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생성은 고대성서의 문자들에 근거해야 한다고 비상식적인 주장을 고집한다. 성서 근본주의는 하나님이 약 6000년 전에 ‘미리 설계한대로’ 6일 동안에 하늘과 땅과 인간과 만물을 ‘완성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우주의 진화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종교와 과학은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상호보완하는 관계이기때문에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죽이는 것은 물론 종교 자체도 영양실족에 빠져 죽고만다. 안타깝게도 성서 근본주의에 얽매인 종교체제는 참 인간의 정체성인 존엄성, 자율성, 창조력, 잠재력, 가능성을 무시하고, 비성서적으로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이분법적 신학을 창작했다. 다시 말해, 이분법적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즉 성서를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면 징벌과 지옥을 면치 못한다고 위협한다. 그러나 호모싸피엔스 인간은 종교체제가 창작한 교리적인 중개인없이 스스로 깨달아 참 인간이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종교의 역할은 인간의 자율성과 잠재력과 상상력과 창조력을 격려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약 138억 년 전에 빅뱅으로 시작된 우주는 미리 설계되어 완성된 확실성(Certainty)의 세계가 아니라, 불확실성(Uncertainty) 속에서 영원히 진화하고 팽창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불확실성의 우주에서 가슴으로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고 깨닫는 것은 인간의 특성이며 책임이고 이것이 성서의 핵심사상이다. 현대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은 성서 근본주의를 떠나보내고, 인간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우연히 생겨난 생물체이지만 우주적인 하나님의 특성 즉 신성을 지니고 있는 성스러운 생명체임을 깨닫고,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과 삼라만상을 통해서 드러나는 실재(Reality) 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지금 여기에서 몸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순간마다 가슴으로 하나님을 느끼면 죽음 후의 영생을 깨달아 알 수 있다. 여기에 이분법적인 심판이나 축복이나 구원은 없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 (4)
우주는 하나의 생명의 망 – 이분법적 구원론의 모순

고대 유대인들이 기록한 신구약성서의 원초적인 핵심사상은 보상과 징벌, 천당과 지옥의 이분법적 구원론이나 축복론이 아니었다. 약 3000년 전의 유대인들과 약2000년 전의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삶이 고통과 절망 속에 빠지더라도 하나님은 영원히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모든 인간들과 공평하게 현존한다는 ‘우주적이고 조건없는 사랑’(Universally Unconditional Love)을 신뢰했고 그것을 ‘은유적으로’ (metaphorically) 기록했다. 현대기독교인들은 삼층세계관의 고대인들이 고백한 ‘하나님 경험’을 문자적으로 읽기보다는 21세기의 양자우주관에 적용할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해야 고대성서는 거룩하고 진실한 책이 된다. 성서 근본주의는 17세기에 계몽주의의 부산물로 생겨났으며, 단지 19-20세기의 소수의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주장되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 현대에 일어난 성서 근본주의는 종교와 과학을 분리시킴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장벽을 쌓았으며, 이것은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의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1920년대 이전까지 인류는 은하계(galaxy)에 대해서 거의 몰랐다. 1950년대에 와서 우주는 팽창한다는 사실과 우주의 시작은 빅뱅(Big Bang)에서부터 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인공위성에 부착된 허블 천체망원경 덕분에 하나의 은하계 안에 수 백억 개의 별들이 있고 또한 하나의 우주 안에 수 백억 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지구가 속해있는 우주 이외에 또다른 우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00년대 말에 와서 우주는 약 130-140억년 전에 탄생하였고, 지구는 45억 년 전에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70년대에 지질학계에 혁명을 일으킨 판구조론(Plate-tectonic)이 발견되었고 지구의 모든 지각변동들의 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3000년 전 내지 2000년 전에 성서를 기록한 고대 유대인들은 이러한 현대과학의 우주관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과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삼층세계로 가장 높은 하늘 위에는 하나님과 신들이 살고, 중간층에는 인간들이 살고, 맨 아랫층에는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천동설과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까지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의 모습은 평평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성서저자들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신적 체험을 신화와 시(詩)를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기록하였다. 하나님 체험을 인간의 제한적인 언어로 문자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전체는 은유(metaphor)이다. 21세기의 현대과학의 우주관을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들도 황홀한 신적 체험을 표현할 때에 음악과 미술과 시를 통해서 은유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천지를 만든 창조주로 고백하는 기도의 언어와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려는 예배의 언어는 다분히 은유적일 수 밖에 없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우주의 나이는 빅뱅으로부터 약 138억 년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약 40억-50억 년 전에 생겨났으며, 지구 상에 생명은 약 8억 년 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인간이 나타난 것은 약 2백만 년 전에서10만 년 전에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이 세계가 창조된 목적은 인간을 위함도, 어떤 생물을 위함도 아니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저자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들은 이러한 지질학적-천체학적인 정보를 뒤집어 엎는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수백 년 동안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성서저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독특한 환경에서 개인적 내지는 공동체적 경험을 기준으로해서 ‘주관적으로’ 자기 존재의 가치가 소중함과 내면으로부터 느끼는 신비함과 경이로움을 ‘함께 있는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현대과학에 따르면 지구상의 최초의 생명의 모습은 미리 설계된대로 만들어진 ‘완성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해 갈 미완성의 단세포였고, 그 세포는 자신 속에서 세포의 핵을 분할시켜서 두 개의 살아 있는 세포로 만들어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포 분열의 과정은 이 지구상의 수 억 년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무엇이 이런 극적인 변화를 시작하게 했는지, 왜 우연히, 혹은 우연하지 않다해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도록 했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물론 고대성서는 이러한 과학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책이 아니라, 생명이란 경이롭고 신비스러움을 고백한 책이다. 단세포들이 수 천만 년 동안 개별적으로 있다가 어느 시기에 세포들이 모여 집합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포들이 진화를 통해서 생물체들의 세계가 탄생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각각의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이제는 더 이상 홀로 외롭게 담당하지 않고 다른 세포들과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진화과정은 다세포 생물체들이 발전하는 생명의 신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지구상의 생명의 발전에서 다음 단계의 중요한 변천은 생물체들이 바다를 떠나 육지로 나왔을 때 일어났다. 즉 식물들과 동물들이 바다 밖으로 나가서 육지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알을 낳는 바다 생물에서 알을 낳는 양서류로, 마침내 알을 낳는 파충류로 진화해 갔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최근에 북극에서 발견된 화석이 밝혀주고 있다. 3억 5천만 년 전에 파충류가 지상에서 번성하다가 1억8천5백만 년 전에서 6천5백만 년 전 사이에 거대한 공룡들의 형태로 지구를 점령했다. 과학자들은 거대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생명들의 미래가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그 엄청난 충돌로 거대한 파충류들은 멸종했고, 6천 5백만 년 전에 몸 속에 알을 낳는 온혈 동물인 포유류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생명체들이 특수한 환경에서의 생존의 능력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는 과정의 열쇠가 되었다. 이러한 진화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생명체들에게 의식(consciousness)이 나타났는 데 그것이 언제,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의식은 단순히 환경에 대한 적응과 생존에 관련된 생명체의 특성이며, 의식을 지닌 생명체는 시간 속에서 살지만 시간의 경과, 과거에 대한 기억, 지적인 의미는 없었고, 미래를 위한 계획이나 욕심도 없었다. 이 생명체는 시간이란 단 일차원적이고 끝없는 현재일 뿐이며, 그들은 순간의 위협에만 반응한다. 그들은 과거의 위협을 기억하고 미래의 고통에 대비하려고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의식의 출현은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엄청난 발전이었고, 그 후로 수천만 년 동안 계속 발전되어 왔다.

2백만 년 전에서 4백만 년 전 사이에 영장류의 동물 가운데서 훨씬 큰 두뇌를 지닌 인간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인간은 아닌 생물종이 나타났다. 이들 가운데서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라는 중요한 진화현상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어떤 순간에 갑자기 이루진 것이 아니라 오랜세월이 지나면서 일어났다. 어떤 과학자들은 자아의식으로의 진화를 5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며 이 생물종을 호모싸피엔스 인간이라고 한다.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생물종이고, 이 세계는 과거와 달리 엄청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호모싸피엔스 인간의 시작은 대략 20만 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아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을 갖는 유일한 생물종이다. 이 두려움 외에도 이성과 감성과 영혼을 인식할 수 있는 특별한 생물종이다. 인간은 시작부터 죽음과 생존의 두려움때문에 죽음 후의 생명 즉 다른 세상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신의 축복과 사랑 속에 사는 것을 꿈꾸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종교에 대한 매력이 일어났고 여러가지 형태의 종교가 인류사회에 탄생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죽음 후에 다른 세상에 가서 영원히 잘 살아보겠다는 꿈이 무엇이 잘못인가? 특히 이 세상에서 빈곤과 불치병과 폭력과 착취와 탄압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죽음 후의 영생일 것이다. 암흑과 같은 절망 속에서 영생의 꿈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만든 종교체제는 죽음 후의 생명을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하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영생을 죽음 후의 영원한 풍요로운 축복으로 누구에게는 가능하고 누구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상업적이고 정치적인 이분법적 교리를 창작했다. 역사적 예수는 이러한 이분법적 제국신학과 성전신학을 거부했고, 영생은 지금 여기에(Here and Now) 모든 인간의 내면과 관계들 가운데에 공평하게 임했다고 선포했다.

우주와 지구는 빅뱅으로부터 하나의 근원과 기원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개체들은 상호의존관계 속에서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들과 식물들과 동물들은 서로의 생명없이 생존할 수 없다. 어느 한 개체가 죽으면 전체가 죽고 한 개체가 잘 되면 전체가 잘 된다. 이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예수의 정신이고, 예수의 만인구원의 진리이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으로 사는 길은 몸과 마음과 영으로 이 진리를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참고: ‘The Integral Vision’, Ken Wilber)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 (5)
성서의 형성과 발전 배경 –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의 모순

현대기독교인들은 성서를 읽기 전에 가장 먼저 고대의 기독교 문서들이 어떠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기록되었고 그 내용들이 수백년 동안 어떻게 발전되었으며 또한 수백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 정경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책도 아니고 성전이나 동굴에서 단행본으로 발견된 책이 아니라, 40여 명의 성서저자들이 1000여 년 동안 여러 지역과 시대적 상황에서 체험한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은유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성서원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는 처음 기록된 이후 수백년 동안 많은 필사자들의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서 필사되었으며, 수많은 사본들이 유포되었다. 2세기 중반부터 기독교인들은 사본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주관적인 사본을 만들어 정경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군가 주장하는 정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라고 결정할 수가 없었으며, 이렇게 계속된 정경화 과정은 수 백년 동안 복잡하기만 했다. 성서의 형성과 발전배경을 이해하면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고 암기하고 무작정 믿는 경전이 될 수 없다. 축자영감설과 무오설과 문자주의을 주장하는 성서 근본주의는 성서 속에 담겨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과 창조력과 상상력을 무시한다. 그러나 성서가 밝히려는 참 인간성의 의미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의미와 신성을 이해할 수 없다.

신구약성서는 인류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렇다고 성서가 역사책이라는 말이 아니다.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변천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생존한 체험적인 이야기들이며, 신약성서는 로마제국의 잔혹한 통치시대에 기독교 공동체들이 용감하게 예수의 정신에 따라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이야기들이다. 신구약성서는 천여 년의 시대적 간격을 두고 발전한 두 공동체가 자신들의 역사 속에 ‘함께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에게 응답한 신앙고백서이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깨달은 ‘인간의 작품’이다. 인간의 작품으로서의 성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가 아니라 많은 계시들 중에 하나이며, 인간이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증거한 책이다. 성서는 고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체험한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성서는 ‘인간성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기록될 당시의 문화들의 언어와 개념들과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성서는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 책이지 하나님이 신앙을 고백한 책이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기록한 책도 아니고 문자적으로 믿어야 하는 교리책도 아니다. 성서에 대해서 이렇게 접근하면 성서에 대한 여러 문제점들이 해소된다. 즉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들과 과학 사이의 충돌은 사라진다. 또한 고대성서의 율법들은 모든 시대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고대 팔레스타인의 신앙공동체들의 주관적인 율법과 윤리적 가르침들이다. 성서는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을 위해 기록된 책이지 전 세계 인류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다.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이해하는 ‘하나님의 영감’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성령의 활동 즉 ‘하나님이 외부에 떨어져 있는 타자(他者)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함께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은 성서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적으로 무시한체 하나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썼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이런 책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현대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은 ‘문자’를 강조하기 보다는 성령체험에 의해 감동된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성서저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느끼고 깨달은 것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했다고 고백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들이 기록한 책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썼다는 말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에 모순과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는 깨달음의 참 인간성과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가 보이지 않게 담겨져 있기 때문에 진실한 책이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서본문의 온전한 의미와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대언어들을 이해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는 글자가 없는 아람어로 말했다. 예수가 아람어로 가르친 진리들이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지 40여 년 후에 마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최초의 복음서를 기록했다. 예수의 아람어가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성서원본을 수많은 필사자들이 수 백년 동안 베낀 수많은 사본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고대어를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현대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성서원본의 히브리어 구약성서 사본과 그리스어 신약성서 사본을 라틴어와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한 현대성서들도 원초적인 성서본문의 뜻을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축자영감의 성서가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라면 하나님은 성서원본을 보존했어야 하고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나 고대어를 배우지 않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했어야 한다.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어휘의 숫자가 대단히 제한적이어서 한 단어가 다양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문서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불어넣어 오류가 하나도 없는 고대성서 원본은 현대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현대어로 번역된 성서가 문자적으로 오류가 하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성서 근본주의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왜 성서원본을 보존하지 않았는가?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수 백 년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해서 원본에서 사본으로 또다시 사본에서 사본으로 베낀 것들 중에 극소수 ‘주관적으로’ 선별하여 편집한 책이다. 심지어는 어느 사본이 원본을 처음으로 베낀 첫 번째 사본인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현대성서는 원본이 아니며 오류투성이의 사본들의 모음집이다. 현대성서를 이루고 있는 사본들과 대다수의 사본들은 시간적으로 원본보다 수 백년 후의 것들이기 때문에 원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본들이 그 시대의 참 인간성의 의미와 우주적인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리를 은유적으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

무엇보다도 성서는 대단히 ‘인간적인 책’이다. 성서는 단번에 한두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서 완성한 단행본이 아니라, 다양한 시대와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원본이 기록되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원본은 많은 필사자들에 의해서 베껴졌고 후대의 필사자들은 여러 사본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주관적으로 베껴 자신의 사본을 만들었다. 인간이 글자를 발명하고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약 5000년 전부터이다. 3000년 전 구약성서가 기록될 때와 2000년 전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통신수단은 대단히 원시적이었으며 오늘처럼 볼펜이나 종이에 기록하거나 녹음기로 녹음을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오직 머리 속에 기억해 두는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고대사회의 저술형태는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가장 먼저 첫 번째 관찰과 깨달음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여과되고 첨가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되어 전달되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떠돌아 다닐때 누군가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해서 ‘첫 번째 기록’(성서원본)을 남겼다. 그리고 후대에 많은 필사자들이 원본을 필사하면서 자신들의 주관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첨가하거나 본문의 내용을 삭제했다. 다양한 사본들을 또다른 필사자들이 필사할 때에 또다시 자신들의 생각을 첨가하고 사본의 내용을 변개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기록에 사용된 고대 히브리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현대어들에 비하여 대단히 제한적인 어휘들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문자적인 표현 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훨씬 효과적이고 일반적인 문학형식이었다. 또한 성서저자들은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였고, 삼층세계관 속에서 지구가 얼마나 크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아시아 대륙이나 한반도나 북미 대륙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고대인들은 천체학, 지질학, 생물학, 의학, 유전공학, 양자물리학이나 진화론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15세기에 갈릴레오가 지구는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었으며, 코페루니쿠스가 천동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성서저자들은 사람들이 질병이 걸리는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도 무지했으며, 생명의 기원이 우주에 있다는 천체학적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고대성서의 사본들 속에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과 예수의 정신인 하나님의 우주적인 진리가 은유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에 진실한 책이다.

기독교교회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잃고 쇠퇴해가는 가장 큰 원인은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에 있다. 특히 현대과학의 교육을 받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종교체제를 거부하고 떠났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교회를 떠나 ‘교회 동창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이해하지 못해서 떠났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성서 이외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길들을 발견했다. 기독교인들은 성서 근본주의에서 해방되어야 새로운 하나님, 새로운 예수, 새로운 인간을 깨닫고 참 인간으로 살 수 있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 (6)
구약성서의 발전사 - 성서 근본주의의 모순

구약성서는 약 1000여년 동안 고대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시대에 따라서 그 내용이 발전되었기 때문에 지극히 ‘인간의 책’이다. 또한 성서원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대신 오랜세월 동안 다양한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개되고 발전된 사본들이 전해져 내려왔다.

중동 지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주전 약 3000년 경이었으며, 주전 약2500년 경에 레바논 남쪽지방에서 단지 30개의 글자만 사용하는 간단한 필사체(Ugaritic Scirpt)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물론 영어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주전 약1200년에 알파벳이 발명되기 전까지 고대의 필사자들은 약300개의 글자를 알아야 했다.

유목민이었던 유대인들이 구약성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에 히브리어는 그들의 고유한 언어가 아니었다. 물론 유대인들의 조상은 아람인들이었고, 그들은 문자가 없는 아람어를 사용했다.(신명기 26:5)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의 후손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 지방언어를 수용하여 자신들의 히브리말로 발전시켰다. 성서를 기록할 당시에 문서를 기록하는 방식은 파피루스 또는 양피지에 식물이나 동물에서 채취한 먹물을 사용하여 날카로운 나무가지나 돌조각 또는 새깃털 등으로 썼다.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던 고대사회의 출판방식은 글자 하나 하나를 필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는 필사자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사본들이 만들어졌다. 더욱이 고대사회의 문맹율은 98%로 높았기 때문에 필사자들이 본문을 베껴 사본을 만들었는데 능력이 안되는 필사자들은 형편없이 부정확한 저질의 사본들을 만들었다.

구약성서의 언어인 고대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고, 단어와 줄 사이에 여백이 없기 때문에 어디에서 말이 시작되고 끝이 나는지 읽는 사람의 재량에 달렸다. (예를 들자면, GODISNOWHERE) 따라서 수많은 필사본(manuscript)들은 서로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을뿐만아니라 오류와 모순투성이었다. 기독교 초기에도 구약성서의 많은 사본들이 유포되었으며, 사람들이 성서를 멋대로 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대교의 마조레테스 그룹의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표준화 작업으로 마조레틱 본문(Masoretic Text)을 만들었다. 한국의 공동번역성서의 구약은 마조레틱 본문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설과 문자주의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하늘 위에 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6000년전에 하늘과 땅과 만물을 6일 동안에 창조했다고 믿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인물들의 수명을 모두 계산하여 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우주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주장은 지질학과 인류학, 등의 현대과학을 무시하고 있다. 천체학에서 우주의 나이는 빅뱅으로부터 시작되어 약130억 년 내지140억 년이다. 지구의 나이는 약 40억 년 내지 50억 년쯤 된다. 바다에서 생명이 가장 처음 출현한 때는 약 8억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 생명이 바다를 떠나 원시적인 양서류의 모습으로 육지에 올라온 것은 약 4억 5천만 년 전이다. 1억 년 전에는 파충류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공룡이 대표적인 파충류이다. 파충류가 멸종하고 포유동물이 등장하여 오늘까지 약 6천만 년 동안 지구를 주도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은 약 400만 년 내지 200만 년에 등장했으며, 호모 사피엔스 인간은 5만 년 전에서 20만 년 전에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서 근본주의의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시작을 성서에서 찾는다면 아브라함이 첫 조상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역사상 실재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역사학자들은 그의 시대를 주전 19세기경으로 본다. 아브라함 전승에서 성서 근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1) 첫째로,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호모싸피엔스의 등장 시기가 20만 년전이라면, 유대교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인 아브라함이 탄생하기 전 19만 8천 년 동안 이미 인류는 존속해왔다는 뜻이다. 인류 역사의 0.8%를 빼놓고 거의 모든 인류역사 동안 구원의 계시를 하지 않고 인류를 방치한 하나님이라면 참 이상한 하나님이다. 성서 근본주의가 주장하는대로 성서 즉 구원의 계시가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진리라는 것은 모순이다. (2) 둘째로,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최초의 기록들과 관련된 자료들은 주전 10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아브라함 전승이 문서로 기록될 때까지 약 800년에서 900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구전(口傳) 속에서만 존재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목민들의 야영지 캠프화이어 주변에서 약800년에서900년 동안 전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900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엄청나게 발전되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하나도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되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고 문자 그대로 진실하다는 주장은 모순이다.

또한 모세가 율법서들을 직접 기록했다고 가정한다면,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에 약 400년 내지 550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세의 연대를 주전 1250년 내지 1400년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서들이 기록되기까지 오직 구전으로만 400년 동안 전해졌는데 그 내용이 조금도 변질되지 않고 원래대로 전해졌고 한 점도 틀림이 없다는 성서 근본주의는 모순이다.

성서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으로는 구약성서가 최초로 문자화된 기록은 예루살렘 주변에서 일어났으며, 그 연대는 대략 다윗 왕이 죽은 후 주전 960년경일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율법서에 있는 모세의 행적과 말들이 성서에 문자화되기까지 적어도 300년이 경과한 후이다. 또한 이것이 주전 500년경에 에스라에 의해서 오늘의 모세오경으로 새롭게 편집되기까지 적어도 400년이상 경과했다. 다시 말해, 수 백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성서본문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시대적 상황과 문화에 적합하게 발전되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현대기독교인들이 성서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서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지구(와 우주 전체)가 6일 동안에 그것도 별로 오래되지 않은 6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창세기 1-3장); 아담과 이브가 실제 인물들이었으며, 그들의 타락 때문에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는 주장(창세기 2-3장);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짐승들 한 쌍씩만 방주에 태워 구원하였고 나머지 모든 생명체들을 파괴시킨 세계적인 대홍수를 일으켰다는 주장(창세기 6-7장);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똑같은 언어를 말했는데 나중에 가서야 서로 다른 언어 집단들로 나뉘어졌다는 주장 (창세기 11장); 하나님이 아말렉 족속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과 아기들까지 모두 죽이도록 명령했다는 주장 (사무엘상 15:3); 하나님이 노예제도를 제정하여 정당화했다는 주장(구약과 신약 모두에 등장); 하나님은 두 종류의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주장(레위기 19:19); 하나님은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종속될 것을 명령했다는 주장; 결혼은 오직 남자와 여자의 의식이라는 주장; 예수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며, 예수가 문자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을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악마의 자녀들이라는 주장(요한복음서 8:44); 예수가 재림하면 인류의 대부분은 파멸될 것이라는 주장, 등등 이다. (참고: ‘성경을 해방시켜라’, 존 쉘비 스퐁)

성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 속에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이야기 책이지 역사책이나 과학책이나 교리책이나 도덕책이 아니다. 성서는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체험한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물론 성서저자들은 당시의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화들과 전설들의 문학형식을 빌어서 자신들의 깨달음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은유적으로 기록한 것을 현대인들이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또한 성서저자들은 이미 수백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구전 전승)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면서 자신들의 주관적인 견해를 삽입하여 기록했다. 더욱이 이야기들을 전하는 이야기꾼들의 말솜씨가 내용을 발전시키는데에 크게 작용했던 것을 상상하면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구약성서는 한두 사람이 단번에 완성한 단행본이 아니다. 각기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기록된 다양한 책들로 구성된 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공동체들 속에서 발전되어온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편집한 책이다. 따라서 성서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은 모순이며, 성서의 문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라는 직역주의는 비상식적이다. 더욱이 고대 성서저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기록하기 보다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은유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고대성서를 은유적으로 읽고 현대어로 전환하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교리적인 기독교인이 되기 보다는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 (7)
신약성서의 발전사 - 성서 근본주의의 모순

예수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죽은 후, 신약성서가 아직 기록되기 전에,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삶의 이야기들이 여러 지역에 구전으로 유포되었다. 예수전승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달될 때에 이야기꾼들의 능력에 따라서 첨가와 삭제와 편집을 통해서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결국 신약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환경들에서 발전된 예수전승들의 모음집이다. ‘예수전승’이란 예수라는 인물을 하늘에서 내려온 초자연적인 하나님으로 숭상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깨달음과 가르침 그리고 예수가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몸소 살았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는 예수의 인물론이나 자서전이나 역사책이 아니라 예수의 깨달음과 정신에 감동된 사람들의 새로운 삶과 신앙의 고백서이다. 예수가 죽은지 약 20-30년이 지난 후, 예수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전승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기록하기 시작했다. 물론 27권의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한두 사람이 단번에 완성한 단행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약성서원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수 백년 동안 많은 필사자들에 의해서 베껴진 서로 다른 수많은 사본들만이 남아있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신약성서는 많은 사본들 중에 주관적으로 선별한 극소수의 모음집이다. 또한 신약성서시대에 유대인들의 모국어는 아람어와 히브리어였지만, 성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결국 현대신약성서는 원본도 아니고 수많은 사본들 중에 소수이고 또한 번역서이기 때문에 축자영감설과 무오설은 비상식적인 주장이다. 또한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책이나 문자들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기록된 문자들이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이며 열린 가슴으로부터 들리는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물론 성서저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고백했다.

신약성서를 보면 마치 표면적으로는 아무 의미없이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의 무늬들이 어지럽게 섞여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중하게 보면 서서히 삼차원의 그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약성서는 저자들이 다양한 전승들을 수집하고 편집하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만든 책이기 때문에 삼차원 방식으로 보아야 겉으로 보이는 문자들 뒤에 가려진 심오한 메시지가 표면으로 드러난다. 또한 성서읽기 방식은 고고학적이고 지질학적인 발굴작업과 대단히 흡사하다. 문자들 이면에 여러 층들로 뒤 덮여있는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 성서를 다시 새롭게 읽는 방법이다. 우리가 원하는 보물은 문자들 위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삼차원 방식으로 읽는 것을 ‘성서비평’이라고 하며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주류교단의 신학교에서 필수과목에 들어간다. 위키백과는 성서비평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한다. “성서비평학은 근대 서구 신학계에서 등장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1957년에 장공 김재준 목사에 의해 소개되었다. 오늘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신학교가 아닌 이상에야 신학교에서 가르칠 정도로 성서비평학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에서도 한글 성서번역 시 필사자들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든지 하는 목적으로 사본에 추가한 즉, 원본에 없는 문장을 빼고, 그 자리에 '절없음'표시와 '어떤 사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라는 각주를 적거나, 괄호 처리함으로써 본문비평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존중하고 있다. 복음주의 신학계에서도 일부의 학자들은 성서비평학을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게 하는 건전한 성서읽기라고 이해한다. 보수적 복음주의 또는 기독교 근본주의의 입장은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에 근거하여, 성서비평학에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다.”(www.ko.wikipedia.org) 그러나 성서비평이 3백년 이상 지속되어온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일반 교인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때문에 현대기독교가 성서 근본주의에 빠져 쇄퇴해가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다. 성서비평은 전문적인 학자와 목사들의 독점품이 아니다. 일반인들도 성서보는 렌즈를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성서 27권의 순서는 쓰여진 연대순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책들을 가장 먼저 쓰여진 순서대로 살펴보면, ‘진짜 바울’이 데살로니카전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고린도후서, 로마서를 썼고, 이후에 복음서 저자들과 ‘가짜 바울들’이 진짜 바울의 신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거나 아니면 반동적으로 썼으며, 쓰여진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서, 야고보서, 골로새서, 마태복음서, 히브리서, 요한복음서, 에베소서, 요한계시록, 유다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누가복음서, 사도행전, 데살로니카후서, 베드로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베드로후

늘봄  |  2015-10-10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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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신중하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믿던 안믿던 그것은 각 사람에게 자유입니다. 저는 성서 근본주의자들이나 은유적으로 읽는 사람들이나 모두 존중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어야만 구원-축복 받고, 성서를 은유적으로 시적으로 읽으면 심판-징벌 받는다는 이분법적 신학/신앙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름을 존중해야 합니다. 천당축복 지옥징벌을 믿고 싶은 사람은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위협하거나 공갈협박해선 안됩니다. 믿고 축복받고 천당 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이단이니 사탄이니 악마니 하는 엄악한 말은 삼가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하루 순간순간 자유하게 행복하게 의미있게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천국에서 사는 것이고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늘봄  |  2015-10-1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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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고 정신이었습니다. 북미의 명문 대학교에 속한 종교학부/신학부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신학생들이 졸업한 후에 예수의 가르침대로 목회하지 않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람 끌어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예수의 복음을 엉뚱한 '자기 복음'으로 변질시켜 말장난을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고령화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시 살리려면 성서를 근본주의에서 해방시키고, 하늘 위에 하느님을 땅으로 해방시켜야 합니다.

fishlover  |  2015-10-11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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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께,
상상을 넘는 긴 답변 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최대한 성실하게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긴 댓글에도 불구하고 저의 고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렇다 저렇다...끝없이 반복되는 진술만 있지 그 진술을 믿을만한 근거는 제시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님의 진술의 신뢰성을 완전히 훼손해버린 문단을 발견하고 아래에 복사해 올립니다. 과학을 자주 언급하고 활용을 하셨는데 전혀 과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지질학에 의하면 약6천5백만 년 전경에 화성만한 크기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한 것이 지구상에 우연적인 생명체의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그 충돌의 ‘우연성’은 이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 조건들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지구는 정상 궤도에서 이탈되었고 기후의 패턴이 변했으며 생명체들은 대환난을 겪었다. 공룡들이 멸종하고, 지구 표면상에서 양서류 동물들의 지배가 무너졌다"


혹시 스스로 오류를 발견하시지 못할까 봐 요약했습니다.
혜성이 충돌했다-->생명체가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공룡들이 멸종했다: 이 공룡들은 어디서 났을까요?

그 외에도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표현에 있어서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 입니다. 끝없는 논란만 될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봄  |  2015-10-11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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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답변이 마음에 닿지 않으신 것에 대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성서 근본주의가 기독교의 큰 장애물이 된다는 교육은 유럽과 북미의 명문 대학교들에서 가르치는 필수적인 내용입니다. 제가 5년 동안 시무한 임마누엘토론토한인연합교회에서 성서문맹 퇴치의 일환으로 수요성경공부 모임의 교재를 소개하겠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삼층세계관의 창조론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저와 함께 다음의 교재들을 가지고 공부하면서, 성서를 새롭게 읽는 방식을 터득하고, 무엇을 믿기 보다 몸과 마음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생애에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놀라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은퇴하며 그 교회를 떠날 때에 교인들은 고백하기를 '우리는 이제 다시 뒤돌아 갈 수 없습니다' 고 저에게 감사표시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희망을 갖고 양심과 상식으로 가르치고 목회하면 교회는 살아 난다는 진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새롭게 다시 읽기 (마커스 보그 , 연세대학교 출판부)
기독교의 심장 (마커스 보그 , 한국기독교연구소)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 (존 쉘비 스퐁, 한국기독교연구소)
가장 위대한 기도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마커스 보그 & 존 도미닉 크로산, 한국기독교연구소)

토마  |  2015-10-1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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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fishlover님 질문은 과학자들에게 해야 되는 질문인거 같습니다. 천국이 있다는것, 또는 없다는것 모두 증명할 수 없다는 말씀은 순수논리학적 입장에서는 맞는 말씀이고, 과학자들도 논리적으로는 수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과학자가 직업적으로 심각하게 고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것입니다. 왜냐면 그 두개의 가설은 얼토당토성에서 천양지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데, 천국이론은 아마 초자연적 권능을 가정하고 있는 얘기일겁니다. 그 초자연적 신이 모든걸 다 만들어 냈다는 것이구요. 이런 가설은 과학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즉각 폐기되어야 하는 가설입니다. 왜냐하면, "그럼 도대체 그 신은 어디서 왔느냐"라는 물음에 부딛히기 때문이죠. 이건 조그만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현상보다 더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를 가정하는것으로 과학적 가설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을 상정하지 않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연주의자들도 생명이 어떻게 첨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단지 단순한 복제생명이 어떻게 현재 우리가 보는 모든 식물, 동물로 다양한 종을 이루며 변화해왔는지 그 big picture 기전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최초생명발생에 대한 그럴듯한 몇몇 가설을 제안하고 있죠. 이런 가설들은 "하나님 가설"에 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실현가능성이 있는 진짜 가능한 설명들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에게는 "하나님 가설"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그저 unintelligent 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는거죠).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는 천국존재론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unintelligent 한 얘기일뿐이죠. 아주 오래된 거짓말이라 사람들이 그게 얼마나 웃긴건지 조차도 모르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 여담...

저는 어떤 기독교인들이 몰몬역사를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는걸 본적이 있느데, 그 몰몬역사의 말안됨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것의 말안됨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둘다 똑같이 unintelligent한 얘기지요. 그걸 듣고 웃는 그 기독교인에게 "그게 그렇게 웃긴데 어떻게 종교를 믿느냐"고 물어본적이 있습니다. 몰몬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거짓말이어서 더 웃기게 들리는 것일뿐입니다. 엘비스가 아직 살아서 돌아다닌다는것이 웃기게 들리는것과 같은 이치죠. 토마올림.

David Gil  |  2015-10-11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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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always look for new theories and new things in academic world. Are new theories always better than the "old" one? The answer is "No." There has been always people or groups that attempted to oppose Christian beliefs since the Crucifixion of Jesus. However, Christian beliefs on God, Jesus, Heaven and others, whether other call it "Old" or "Not up to date", are "current." A Christian is a person who follow Jesus. Christian does not just "know and realize" things about God and this world. A follower of Jesus does "Accept the teaching of Jesus" and then "Walk with God" in the created world. It does not matter what the great schools teaches people in their Theology class. Those does not mean anything. People will invent new theory and new stories to become a famous scholars. What is important to us is the eyes to see how the Christian beliefs were held firm by those who believe and walk with God. When I say "Walk with God", I mean they have fellowship with God just like a person walks with his friend.

토마  |  2015-10-1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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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really have any problems with anyone following his/her faith. But I would like to correct your (mistaken) belief about scientists' motivations to "invent new theories". It's usually intellectual curiosity rather than mercenary gains that makes them commit to their work.

내사랑아프리카  |  2015-10-1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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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봄님의 말씀에 대부분 동의하구요. 토마님의 과학과 종교 발언에 대해서는 100% 동의합니다. 종교가 과학을 이기려고 하면 안됩니다. 종교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생로병사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미와 체계를 갖는 것은 그 사람이나 집단의 자유이구요. 과학은 이미 확립된 방법이기 때문에 과학의 자율성을 침해해서는 안됩니다. 늘봄님처럼 과학적 진리 또는 사실과 종교적 상상력을 결합해서 이런 신학작업하는데 잘못된 것도 전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늘봄님은 지나치게 신학적인 것같구요.

남을 존중한다고 하지만, 거짓이니 어쩌구 하는 것은 상당히 편견이 강한 것 같구요. 비교종교학을 공부했다고 하지만 종교학이 갖는 개론적 태도를 이분은 전혀 갖지 않아 보여요. 종교연구에서 진화론적 과정을 택할 수도 있고 사회학자들의 공시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토마님께서 퍼오신 분처럼 우리는 "사실 우리 부모님의 아들이자 그냥 아저씨 일뿐"이라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보구요. 사명감 갖고 설교를 안해도 될 것 같아요.

토마님께서 "저는 어떤 기독교인들이 몰몬역사를 들으면서 배꼽을 잡고 웃는걸 본적이 있느데, 그 몰몬역사의 말안됨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것의 말안됨과의 차이는 없습니다. 둘다 똑같이 unintelligent한 얘기지요."라고 하셨는데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전통 기독교인들이 몰몬교를 그렇게 보면 안됩니다. 배꼽 잡고 웃기 전에 나도 그럴게 될 수 있다는 비교적 시각도 중요하죠. 전에 언급했지만, 저는 무당의 신이나 기독교신의 우월을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종교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아요. 늘봄님의 '신학" 사상은 일반 세속학문적 기준에서 볼 때 가장 합리적이고 사람들에게 수긍하지만 한 시대의 표현이라는 겸손도 필요할 것 같구요. 늘봄님께서 "천당축복 지옥징벌을 믿고 싶은 사람은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위협하거나 공갈협박해선 안됩니다."라고 하셨는데, "따라서 교회는 고령화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시 살리려면 성서를 근본주의에서 해방시키고, 하늘 위에 하느님을 땅으로 해방시켜야 합니다."라고 늘봄님도 "공갈 협박"하시면 안됩니다.



fishlover  |  2015-10-11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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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님께
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럼 도대체 그 신은 어디서 왔느냐" 라는 질문은 매우 타당한 분석 같습니다. 그래서 unintelligent 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현대과학자들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빅뱅 이론은 어떻습니가? 빅뱅이 발생할려면 빅뱅을 품고있는 최초 알갱이의 존재를 가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알갱이도 결국 우주의 일부 일테고 도대체 이 알갱이는 과연 어디서 왔느냐는, 똑같이 unintelligent한 결과에 도달하지 않나요? 저는 과학자가 아니라서 빅뱅을 체계적으로 공부한적 없읍니다. 빅뱅이론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제가 언급한 "천국이 없다고 믿을때 생기는 몇가지 의문들" 에 대한 설명은 아직 어느분 한테서도 듣지 못하고 있어서 여전히 답답하네요....

토마  |  2015-10-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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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빅뱅이론을 설명할 지식은 없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빅뱅이 140억년전쯤에 일어난것을 부정하는 과학자는 없는것으로 압니다. 그럼 그전에는 모냐? 이 질문 역시 역시 생물체의 최초발생은 어떻게 된거냐의 물음과 같은 처지에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가설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존재"와는 달리 훨씬 더 그럴 가능성이 있는 가설들이 제안되어져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what before the big bang으로 구글하면 여려 얘기들이 나옵겁니다. (저두 몰라요.)

빅뱅전 상태를 확실하게 모른다는 것이 "하나님 가설"의 가능성을 털끗만큼도 높여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가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도 매우 안전하게 기각할 수 있습니다.

토마  |  2015-10-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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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러버님의 의문들 지금 올라가서 보았는데... 저두 신학/과학 둘다 전문가가 아니니 그냥 심심풀이정도로 답변드리는 것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이스라엘의 재건--이건 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럽에 살던 성공한 유태인들이 재정적 지원을 하여 유대인의 나라를 하필 거기에 만들기 위해 조직적인 massive 이민운동을 벌이고, 영국과 미국의 협력을 득한뒤, 남의 땅 한복판에 자기나라를 마침내 세워버린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요한계시록땜에 미국복음주의자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그 소가 웃을 얘기가 바로 종교가 현대사회에 주고 있는 해악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수탄생의 예측: 이건 독립적 예측사건이 아니니, 희얀할게 없죠.

인간의 기원: 인간의 기원은 최근의 유전자 분석으로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우리 현대 인간돠 해부학적으로 같은 인종은 2-3십만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했고, 이들중 몇몇이 아프리카를 걸어나왔는데, 그들이 다른 아시아와 유럽에 존재하던 다른 hominid를 멸종시키고 (그리고 그들과 interbreed하면서) 유럽, 아시아, 북남미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자연의 경이로움.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방향으로 인간이 진화해 왔을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호수, 푸른 산, 예쁜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지요. 어둡고, 말라있는 사막을 아름답게 느끼지는 않는 경향이 있씁니다. 즉 인간이 살고 싶어지는 곳, 아름답다고 느끼는 곳은 먹을것, 마실것이 풍부한 환경이란느것이죠. 즉 이런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존과 재생산에서 잇점을 가졌을거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EO Wilson은 biophilia hypothesis 라고 불렀습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5-10-12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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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에서 강조하는 것인데, 이것 자체는 해악이라고 저는 보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그들의 문학적 상상력에 경탄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신념은 정치나 다른 이념과 결합되어 현실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 사회에 tension을 불러 오는데요.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당시 의식있는 유대인들도 반대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fishlover님은 교회에 다니지 않은 분인 것 같은데, 종교와 기독교 성서에 대해서 통속적으로 이해하는 것 하고 일반 학계에서 논의되는 것을 구분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수탄생의 예측"은 예측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인들이 히브리 성서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전유(appropriation)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배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구약 성서가 아구가 잘 맞는 것을 보고 매혹되기도 하죠. 당시 기독교인들도 히브리 성서를 믿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전까지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과 다른 종교에 속한다고 자신들을 동일시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의 일부 또는 종파였다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기존 유대교와 독립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신약을 받아들이지 않죠. 당시 기독교인들도 유대교 종파의 일종이었으므로 기독교가 히브리 성서를 훔쳐 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개념을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하죠.

내사랑아프리카  |  2015-10-1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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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통일교(The Unification Church)에서 구약시대=>신약시대=>성약시대의 유형론을 제시하며 문선명 선생을 통해 계시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통일교회에서 히브리성서와 크리스챤 성서를 훔쳐 갔다고 말할 수 없고, 몰몬교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philby  |  2015-10-12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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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 계로가 스승에게 귀신 섬기는 것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 가라사대 "내가 산 사람 섬기는 일도 모르는데 어찌 귀신 섬기는 법을 알랴."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 세상일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 후에 일을 알겠습니까? 제가 공자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 입니다.

피철묵  |  2015-10-1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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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방끈이 짧아서 비교종교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제가 알기로는 서양의 비교종교학은 개신교, 카톨릭, 회교 정도에 대해서 다루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경우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불교, 힌두교, 유교, 회교에 대해서도 섭렵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동양의 시각에서 본 기독교와 종교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걸로 유명한 것 같습니다. 논어 강의 중에도 (아마 15강 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종교에 대해 심층분석하고 있는데 유투브에도 그 강의만 삭제되어 있습니다. 아마 기독교 세력에서 압력을 가해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유투브에 남아 있는 강의 하나를 소개드립니다.
https://youtu.be/UASWwUFmwzg

내사랑아프리카  |  2015-10-12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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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알고 있는 한 요즘 비교종교학이란 분야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종교 전통을 섭렵하기도 힘든데 세계의 여러 종교를 섭렵하기란 불가능하죠. 종교학 초기에 야심찬 학자들이 많았으나 그 비교한 것이 역사적 맥락이나 지역적 맥락을 간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로 "비교종교"라는 과목을 가르치는 학교는 별로 없다고 봅니다. 보통 종교 개론 시간에 의례, 상징, 신화 등의 유형으로 나눠 공부를 하구요. 종교현상학이라는 분야에서 시도를 하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세계 종교를 한 데 묶어서 책을 내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비교종교"이라는 엄밀한 방법론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구요.

피철묵님께서 비교종교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한정한다는 말씀은 아마도 종교철학에 신존재증명과 관련된다고 보구요. 서양의 학자들이 서양종교에 한정하는 것은 없습니다. 종교사상의 비교는 철학자들이나 기독교신학 또는 교학불교(신학에 맞먹는)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의 신화, 의례나 상징연구를 통해 여러 종교현상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한 학자는 멀치아 엘리아데와 그의 후계자 조나단 스미쓰라는 사람이 있고, 각 세계종교의 철학적 핵심을 비교한 학자는 니니안 스마트라는 학자가 두드러집니다. 한 종교 전통에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으면 취직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야심찬 기획을 하는 학자는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용욕 선생의 경우는 비교종교학을 한 것도 없고 비교철학에 대한 방법론적 추구나 각론을 한 것도 없습니다. 그의 요한복음강해는 비교철학이라기보다는 동양학 학자가 제법 재밌게 주해한 정도구요. 다양한 종교를 잘 아는 것 하고 방법론적 기초를 갖고 비교한 것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그런 면에서 김용옥 선생이 비교종교학자에 방법론적 기초를 놓았다든가 그러한 무리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습니다. 김용옥 선생의 해박한 지식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어떤 형태든 비교를 하니까 종교학의 기초는 비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교종교라는 말이 애매해서 어떤 사람들은 History of Religions 그냥 Religious Studies로 쓰구요. 보통 이상적인 형태는 두개의 종교전통이나 본인의 종교전통과 다른 종교전통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토마  |  2015-10-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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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쉬러버님은 사라지시고 조위에 음악에 대한 글을 올리셨네요. ㅎ 아무리 답변이 시원치 않아도 이런건 에티켓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무렵, 블루제이즈 5차전이 야구가 곧 시작한다는 생각에 미쳐 짐을 싸고 맥주집으로 갑니다. ㅎ

fishlover  |  2015-10-14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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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여러 답변들에 대해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놓혔네요...미안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든, 안믿든, 엉터리로 믿든....우리의 생각과 상관없이 천국이 있던지 없든지 둘 중에 하나는 분명 진실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면서 천국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이해하기 어렵고요...
아무튼 나름대로의 답변들 감사합니다.


토마  |  2015-10-1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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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셨군요. 섣부르게 판단한점 사과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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