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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출근하려고 새벽에 일어났는데 부모님 방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리며 잠시후 모친이 나오시며 "박정희가 죽었단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정말 박정희가 죽은걸 알고는 좋아서 마당에서 폴닥거리며 뛰다 출근하던게 생각납니다. 주안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했는데 주안역 광장에 검정테를 두른 박정희 사진이 나온 호외가 10월에 낙옆처럼 이리저리 뒹굴고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은 무심히 그 호외를 밟고 지나가고...
36년전 감격을 일깨워준 토마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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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날 캐나다에 유학온지 9년째 되는 날이 였다. 3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좋은 직장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연구생활에 몰두 하던 시절이 였다. 그 가난하였던 시대에 $100불짜리 미화 한장들고 그것도 문교부에서 시행하던 유학생 자격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만 유학이 허용되던 어려운 시기였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는 있다. 우리 시대가 지나면 그 공과는 역사가들이 판정할 것이다. 장면 시대의 그 혼란스러운 세상을 박대통령의 철권 정치로 경제를 부흥시킨 그 위대한 업적은 인정하여야 될 것이다. 말 안 듣는 X들은 구두 발길과 몽둥이로 다스리면서 경제 부흥을 일으킨 것이였다. 경부고속 도로 건설 반대한다고 김영삼등 소위 먹물 먹은 민주 인사들은 길거리에 덜어 눕던 시절이였다. 물론 인권 탄압과 독재 정치는 허물에 속한다. 그 말 많던 시대에 철권정치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영광스러운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 때의 솔직한 심정은 유신 헙법을 제정하지 말고 물러 났드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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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보고느낀것에 대하여 비평을 하는것은 발전을 위하여 좋은일 일것이다. 그러나 지나가는것을 그자체로 보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다. 좋은점도 나쁜점도 어느것에나 존재한다고 본다. 나름대로 판단할 일이지만 미래를 위하여 좋은점만을 보고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생각은 자유다. 자기의견만 옳다고 주장만은 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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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비님은 그때 이미 회사에 다니고 계셨었군요. 근처에 살았음 화식집에서 박정희 죽은날을 경축하며 사께한잔하는건데 아쉽네요. ㅎ
번영님도 이미 객지 생활하신지 꽤 지난때 박정희가 살해당했군요. "말 안 듣는 X들은 구두 발길과 몽둥이로 다스리면서 경제 부흥을 일으킨 것이였다. 경부고속 도로 건설 반대한다고 김영삼등 소위 먹물 먹은 민주 인사들은 길거리에 덜어 눕던 시절이였다"
제생각에 이렇게 쓰시는건 좀 과대 단순화입니다. 발길과 몽둥이가 아니라 지하실에서 비인간적인 고문, 살인, 투옥, 그리고 강간을 자행한것입니다 (저는 권력자를 위한 국가기관의 채홍은 강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고속도로반대자따위가 아니라, 박정희총통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던 사람들을 투옥하고 죽였던 것이구요.
물론 저는 박정희가 없었다면 남한이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박정희가 산업화측면에서 어떤 공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맞거나 틀리거나가 입증가능한 그런 주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박정희 찬양논자들과는 논쟁이 무익하다는것을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습니다.
제가 쓴글은 딱히 주장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박정희가 저지른 그 무수한 악행을 종식시켜준 궁정동 회식살해 사건을 기쁘게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경축한다는 글입니다. (이 궁정동 회식살인사건을 큰 슬픔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조의의 글을 올리시면 되는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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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있게 10몇년 이상을 통행금지에 묶어두면서 경제를 후퇴시킨 1970년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요.
경제 발전의 기초(기초만입니다)를 이루었다는 것도 있을수 있겠지만 이 통행금지와 독재로 경제탄압도 했었지요.
이로 인한 대한민국경제의 엄청난 후퇴란거는 이야기도 안하는군요.
뭔 교과서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박근혜씨의 부친에 대한 미화작업으로 그쪽의 가정 즉 후손을 포함하여 가계를 미화하려는 의도와
박근혜씨 부친을 이용한 기회주의로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공에 대한 합리화를 시키겠다는 꼼수가 더부러져서 꿍짝이 맞아서 진행하려는 뭐 이런류로 생각이 됩니다.
참 이런 더러운류의 생각을 한국의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주입교육을 시키겠다는...
예전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국민교육헌장 열심히 외었었지요... 중학교때 유신교육을 받았었고...
제가 좀 생각이 짧아서리 배운것만 사실인줄 알았었습니다. 지금 50-60대 사람들이 주로 그렇지요.
이거 역사라는건 있었던 사실을 정확히 기록해서 그것만 가르치고 판단을 할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하는데..
판단력이 부족할수도 있는 어린학생들에게 숨길거 숨기고 지들한테 유리한 것만 주입식으로 가르치겠다는...
물론 저는 국적이 다르기 때문에 관계는 없지만 어디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를 보는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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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고종석이 박정희에게 띠우는 편지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1025211909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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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aa님--사실 그 박근혜가 벌이고 있는 그 교과서 돌대가리짓땜에 박정희의 더러운짓에 대한 얘기가 작년 10/26때본다 10배정도 되는거 같습니다. 이 돌대가리짓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길 바래보지만, 장담은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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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해소, 일과후 피로 푸는데 음주가무가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대포집에서 막걸리 한잔부터 방석집까지 형편과 능력에 따라 다릅니다만 박정희는 음주가무를 벗어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 공식적인 채홍사 였다는데 문제가 있는겁니다.
부인 잃은 남자가 혼자 살면서 풀어야 할 것은 풀어야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국가기관을 동원해 채홍작업을 했다는건 독재자의 권력남용입니다. 딸하고 같은 나이인 탈렌트 한모 양을 권력을 이용해 불러다 겁탈하려다 실패한 일 등등... 박정희 사후 밝혀진 일화는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올 정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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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79년 10월 16일에 청와대 구내 지하실에서 김형욱을 직접 총을 쏴 살해하였다.
바로 열흘 뒤에 청와대 안가에서 연회를 하는 도중에 부하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저세상으로 떠나게 되었다. 친일 매국노에 극단적인 기회주의자였던 박정희는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였으며 많은 민주인사를 억압하고 살해하였다. 그의 공과를 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지만 살인자이며 민족반역자에게 공과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무지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매우 흔하게 우리가 듣는 말이 있다. 나는 정치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고 말이다. 이것도 매우 무지한 발언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정치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런 말은 쏙 들어 갈 것이다.
어쨌든 그 민족반역자 박정희가 부하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것은 길이 길이 축하할 만한 일이다.
박정희의 비명 횡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거하게 술한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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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60대 되신분은 한분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60대 이상이신 분 중에는 좌 경향 진보 논객이 흔하지 않거던요. 한국 국민의 절대 다수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지지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인으로 못만들어서 안달을 하시는 분들은 마음이 편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는 분들은 본인들 일 것입니다. 타계한 박 대통령이 상처 받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지지하는 세력들이 차기에도 한국의 권력을 잡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캐나다에 이민와서 까지 같은 동포끼리 목에 핏대를 올리고 지난 역사를 갖이고 서로 다툴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어차피 한국에는 선거권도 없는 분들이 많고 캐나다에서 우리가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니까요. 어디서 글을 보니까 이런 말이 있던데요. 지금 자기 사는 삶을 지옥으로 만들려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라. 그러면 너에게는 지금이 지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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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리다고 무시하시는것 아니신가요? ㅎㅎㅎ
(궁금하실까봐) 저는 50살이고 박정희가 살해당할 당시 중1이었습니다. 박정희를 영웅시하시는 분들은 왜 그가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시면 되지, 무슨 국민성이니, 마음의 상처니 그런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직접 보거나 당해본적은 없지만 히틀러나 (4월 15일) 괴링 (10월 15일)이 죽은 날도 잊지 않고 경축합니다. 여담이지만 박정희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그 다음해쯤 히틀러나 괴링처럼 자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었죠 (물론 그 자살로 이끌때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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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나이로 남을 무시하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Justin Trudeau가 캐나다 수상이 되였는데 50 이시면 세상을 호령하실 나이 이십니다. 저는 이 계시판에서 논쟁이 붙었을 때에 저보다 젊어신 분이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한인 차세대가 시니어 세대 보다 더 똑똑하구나 싶고 한민족의 앞날이 더 밝다고 생각이 들거던요. 캐나다에 사는 우리 이민자 걱정을 먼저 합시다. 이역 만리 떨어진 모국 문제는 그기 사니는 분들이 Take Care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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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넘의 나이... 이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나이 따지는거보고서...
나이 드신분들이 하는 이야기중에 "어린놈이..."
그 때의 생각은 그랬지요.. 한국에서는 나이순으로 대통령을 하는게 맞는거 아닌가 하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은 어른으로서 남들에게 공경받을만큼 말하고 행동하라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만..
저도 직장생활을 1984년부터 했으니 토마님과 philby 님 의 중간쯤 될거 같습니다만..
예전에 어느분이 글 올리신거보고 글이란건 그렇게 올리시는게 아닙니다고 댓글을 단적이 있었는데요..
어느분이 목에 핏대를 올리시면서 서로 다투었다는 말씀인지 저는 글을 읽어보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말 보다는 여기 운영자님이 강조하시는 자신이 아는 사실에 곁들여서 의견을 올려주시는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예를들자면 박근혜씨 부친이 어떤면에서 위대한 지도자인지 clipboard 님처럼 있었던 사실을 나열하면서
이래해서 위대한 지도자다 라고 글을 쓰심이 타당하리라 생각이 되는데요..
막연하게 한국경제를 이끌었다. 이런식이 아니고, 어떤 프로젝트에서 박근혜씨 부친이 어떻게 하고 등등
이렇게 글을 써주시면 여기 방문하는 저같은 젊은이 혹은 어린넘이 이해를 쉽게 할수 있을거 같습니다만..
번영님께서는 수학을 잘하시고 학생들을 가르치셨던 분이시니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하듯이 이래서 이거다 라고 설명을 해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나이까지 드신 번영님께서 야 피타고라스 그거 식이 맞아. 사람들이 다그래..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아서요..
박근혜씨 부친은 위대한 지도자라고 말씀 혹은 주장을 하시는데요..
이런것에 대해서 디테일을 적어 주신다면 이해하기가 상당히 쉬울것 같아서 부탁을 드려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주로 위에 다른분들이 적어주신 내용과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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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직 생활을 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학교 다닐적에는 수학과목이 가장 쉬웠고 국어 과목이 가장 어려웠던 기억은 생생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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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드립니다. 제가 잘못 알았었나보군..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신것으로 이해를 했었는데요..
박사님이란 직위만 가지고 섣불리 판단을 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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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이 어떻게 납치되었고 어떤 경로로 박정희로부터 사살되었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근거도 없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박정희를 비난한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런 유치한 짓 하지 않습니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분들은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억지로 논리를 펴지말고 박정희를 존경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박정희를 숭배하시는 분들의 유일한 근거인 조국의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는 논리도 벌써 프레이저보고서에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뭔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으려면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를 한 후에 들이대시기 바랍니다. 또한 나이는 대화를 하고 토론을 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고 글을 쓰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근거도 없는 추정으로 글을 쓰는 것은 오히려 글쓰는 사람을 초라하게 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고 충고하는 바입니다.
[김형욱 실종 전말 ‘코리아 리포트’ 원본 입수]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에게 사살됐다"
회고록 포기 설득 200만달러 지불 대가로 유인 사살 , 사체는 행려병자로 위장 화장시켜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5/10/16 [22:47]
미 국법원이 지난 1979년 10월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에게 이례적으로 빨리 사망판결을 내린 것은 ‘김형욱이 청와대지하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살됐다’고 기록한, 이른바 ‘코리아리포트’ 때문인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연방법과 뉴저지주 주법은 실종자는 사망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후 목격일[last seen]로 부터 5년이 지난 이후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다고 규정돼 있지만 김형욱은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실종된 뒤 1년6개월이 채 안된 1981년 3월 30일 사망판결이 내려졌다.
이 처럼 미국 법원이 김형욱에게 조기사망판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형욱의 죽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제출돼 법적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이며 그 증거는 ‘코리아 리포트’와 르몽드지 보도임이 법원 제출 증거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는 어떻게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한국으로 송환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에게 권총 살해됐는지 그 내막이 상세히 기술된 코리아리포트와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몽드’지를 입수해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짚어 보았다. 박우진(취재부기자)
▲ 미국법원제출 코리아리포트 원본 ⓒ2015 Sundayjournalusa
뉴저 지주 버겐카운티지방법원 확인결과 김형욱실종관련 사망선고재판에서 유족측 변호인인 얼레인 치럿 변호사는 일명 코리아리포트로 알려진 8페이지의 불어판 원문을 증거로 제출했으며 또 다른 변호사인 알란 싱거 변호사도 동일내용을 보도한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몽드’지를 증거로 제출했다. 한때 일본주간지에 일부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던 ‘코리아리포트’의 그 원문문서가 법원에 김형욱사망의 유력한 증거로 제출됐고 법원이 이를 사망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판단, 조기에 사망판결을 내린 것이다.
얼 레인 치럿변호사는 1981년 3월 30일 법원에 코리아리포트 원문을 ‘P8-E’증거로 제출하면서 자신이 영어와 불어 등 이중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므로 법원의 허락을 받아 원문은 증거 A로, 영어번역본은 증거 B로 각각 제출한다고 덧붙였다.
< 선데이저널>이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지방법원 김형욱실종 사망선고 재판서류에서 찾아낸 이 불어문건에 따르면 미국내 중정책임자인 정태동공사는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임무를 수행한 뒤 ‘닥터 하인즈 초대성공’이라는 전문을 보냈고 프랑스내 중정책임자인 이상렬공사는 김형욱을 납치, 한국으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한 뒤 10월 7일 실종당일 프랑스시간 밤 12시 ‘닥터 하인즈 서울행’이라는 전문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김형욱의 중정내 암호명은 ‘닥터 하인즈’이였다.
박정희-김형욱, 서로 배신자 맞고함
중 앙정보부는 프랑스 중앙정보부 공사 이상렬에게 김형욱을 파리의 안가로 데려갈 것, 마취 시킬 것, 소포로 위장해 대한항공편으로 서울로 보낼 것, 돌발 상황 발생 시 암살할 것 등 4가지 구체적 행동요령을 하달했으며 김형욱과 가족들과의 연락을 36시간동안 차단하는 것이 작전성패의 중요한 요소라고 적고 있다.
특 히 이 문서는 김형욱이 부마사태가 발발한 1979년 10월 16일 청와대 구내 지하실로 끌려갔으며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김형욱에게 ‘더러운 배신자’라고 고함을 질렀고 김형욱은 박대통령에게 ‘배신자는 당신이다, 나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라고 소리쳤으며 박대통령이 직접 두발을 발사, 김형욱을 제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5 Sundayjournalusa
문 서는 또 오작교 작전의 배경, 김형욱 회고록을 둘러싼 협상과정, 김형욱이 1979년 8월부터 2차례이상 파리를 방문해 회고록 포기 대가로 돈을 받아간 과정, 김형욱이 이상렬을 신임하게 된 배경, 이상렬의 중앙정보부 들어오기 전 행적등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 비 스미스 판사는 바로 이 문서와 르몽드지 보도내용, 그리고 김형욱의 부인 신영순의 증언 등 3가지를 근거로 김형욱이 실종된 지 5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1년 6개월만에 사망선고를 내렸다. 김형욱 사망판결문에 따르면 1980년 3월 30일 재판을 통해 김형욱에게 사망을 선고한다고 돼 있으며 사망 판결문에는 이보다 조금 늦은 1980년 4월 9일자 스탬프가 찍혀 있다. 미국언론들도 3월 30일 사망선고를 받았다며 일제히 보도했다.
▲1981년 3월 31일자 버겐레코드기사 53면 ⓒ2015 Sundayjournalusa
코리아리포트는 ‘오작교작전’등으로 일본 언론 등에 내용 중 일부가 보도됐고 국정원 진상보고서에도 ‘10월 16일 청와대 살해설’이 여러 가설중 하나로 언급됐으나 8페이지의 불어문서, 그 전문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 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오작교작전’과 ‘청와대살해설’이 기록된 코리아리포트가 언론보도나 하나의 소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국법원이 이를 근거로 김형욱 실종 1년6개월만에 조기에 사망을 선고했다는 점이다. 김형욱의 정확한 실종내역, 즉 사망인지, 행망불명인지, 그렇다면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다면 왜 죽었는지는 36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코리아리포트도 중요한 단서임에 틀림없다.
오작교 작전 특명 1호가 김형욱 납치
이 코리아리포트에 대해 주섭일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경찰 수사발표[발표일은 1980년 1월 24일]뒤 10여일쯤 지나 발신처미상 노란 봉투 등기물이 자신에게 이 보고서가 배달됐다’며 ‘문체로 봐서 프랑스인이 작성한 문서가 분명해 프랑스 정보기관이 슬쩍 흘러준 것으로 추측했다’고 말했었다.
▲ 1981년 3월 31일자 뉴저지 일간지 기사 - 3월 30일 김형욱사망판결과 중거로 제출된 코리아리포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2015 Sundayjournalusa
김 재규도 박정희 대통령 시해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을 때 1979년11월 3일부터 11월 8일사이에 간수헌병에게 ‘중요한 것이니 미스터 박이 잘 간직하고 있다가 밝혀야 할 상황이 오면 밝히라’며 ‘10월 10일부터 20일 사이, 김형욱은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 3인이 있던 청와대 지하사격장에 끌려왔으며 차지철 경호실장이 권총 3발을 발사해 사살하고 사체는 행려병자로 위장,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간수헌병이 국정원 진상조사위원회에 진술한 내용으로 182-184페이지에 기록돼 있다.
김 형욱은 한국으로 납치된 뒤 경복궁과 청와대간 연결된 지하벙커의 박대통령 앞으로 끌려와 박대통령 지시에 의해 살해됐다고 월간조선이 보도하기도 했으며 김재규의 부하 박흥주대령이 10.26직전 시내 술집에서 만난 친구에게 김형욱이 산채로 납치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월간중앙에 보도되기도 했었다고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 58페이지에 기록돼 있다.
또 10.26당시 중정 일본책임자로 김재규의 동서인 최세현박사 또한 ‘어떤 식으로든 김형욱을 한국으로 납치할 수 있는데 굳이 외국에서 살해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김재규가 10.26을 결행한 것은 김형욱의 죽음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국정원 진상조사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언론과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등이 청와대 살해설을 보도하고 보고서에 남겼으며 간수헌병 등이 전한 김재규의 주장은 미국법원이 김형욱의 조기사망선고의 근거로 받아들인 코리아리포트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죽인 뒤 사체는 벽제화장터에서 화장
국 정원 진상조사위원회 보고 중 외국 폭력배를 고용해 파리의 숲속에서 살해하고 낙엽으로 덮었다는 내용은 중정요원들이 김형욱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에 결정적 허점이 있다. 김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은 채 소지품과 외국인들의 살해했다는 말만 듣고 백% 죽음을 확신하고 본부에 성공을 타전할 수 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2015 Sundayjournalusa
양 계장 닭모이설은 작전을 수행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소 황당하다. 과연 우리에게 그러한 임무가 부여됐을 때 전혀 사용해 본 적도 없는, 낯선 양계장의 기계에만 자신의 운명을 걸고 이 무서운 일을 처리하기는 힘들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완벽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을 익숙하지 않은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양 계장 분쇄기에 김형욱을 밀어넣은 뒤 분쇄도중 기계가 고장을 일으켜 작동이 정지된다면 속수무책인 것이다. 그대로 두고 달아난다면 발각될 것이요, 그렇다고 분쇄되지 않은 부분을 도로 빼내서 가져간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자기완결이라는 수칙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무리한 점이 많은 것이다.
청 와대지하실에 끌려와 살해당했다는 주장과 관련, 청와대에 그 같은 지하사격장이나 터널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일부에서는 이 같은 주장을 일축했었다. 그러나 최근 청와대인근 삼청동에서 지하터널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고 있다. 청와대내부는 특성상 이 같은 터널이 발견돼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지만 담장을 사이에 둔 삼청동일대에 이 같은 터널들이 한두개도 아니고 수십개씩 발견됐음이 TV를 통해 알려졌다는 것은 청와대 내에도 이 같은 터널이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양계장 닭모이설은 황당한 소설
김 형욱의 실종 또는 사망과 관련, 여러 설이 분분하며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고 미국법원의 판단 근거라고 해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미국법원이 청와대살해설을 근거로 김형욱 조기 사망선고를 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코리아리포트에 근거하자면 사살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모두 6명으로 경호원 3명을 제외하고 박대통령과 김재규, 차지철, 김형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간 수헌병에 따르면 김재규는 이미 전말을 설명했고 김형욱은 죽었을 것이므로 말이 없다. 그렇다면 박대통령과 차지철 두 사람 중 10월 26일 숨지기 전 주위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대통령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혹시 차지철은 김형욱의 실종 또는 죽음에 대해 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차지철의 부인은 그 같은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부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차 지철 전 경호실장이 김형욱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진 10월 16일부터 자신이 김재규에게 살해되는 10월 26일까지 열흘간의 짧은 기간에 누군가에게 김형욱실종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과연 차전실장이 그 전말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까, 그렇다면 그 전말은 코리아리포트와 일치할까’ 어쩌면 그 의문은 조만간 풀릴지도 모른다.
1페이지 | ‘오작교작전은 반체제인사에 대한 특수임무’
오 작교작전이란 한국 중앙정보부[KCIA]에서 수행하는 특수임무를 일컫는 암호중 하나이며 이는 보안, 납치, 파괴와 연관된 한국중앙정보부에게 익숙한 임무들이다. 오작교작전은 특수임무 즉 해외에 피신중인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에 대한 납치와 암살을 일컫는 것이다, 이 임무가 주어진 이유는 1977년 해외피신중인 주요인물들이 한국 정치에 대한 반대활동을 두드러지게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1977년 6월 김형욱이 미국의회에서 엄청난 증언을 함으로써 비롯됐고 11월에는 한때 외무부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충격적 진술이 잇따랐다.
2페이지 | ‘오작교작전 첫대상은 김형욱 ‘닥터 하인즈’
오 작교작전의 첫 번째 대상은 김형욱이었다, 프레이저청문회에서 유신정권의 치부를 드러낸 김형욱의 증언에 분노한 박정희대통령은 복수를 생각했고 더구나 김형욱은 회고록을 작성중이라 틀림없이 18년간의 박정권에 대한 기밀누설을 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를 체포하기로 결심하고 중앙정보부에 임무수행명령을 내린다. 그 뒤 중앙정보부는 미국내 중정책임자인 정태동공사에게 작전수행지시를 내린다. 김형욱을 일컫는 암호는 ‘닥터 하인즈’였다. 정태동은 이전의 중정책임자 즉 육군출신의 김용환, 해군출신의 양두원[실제로는 해병 출신임]과는 달리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소지한 인텔리였다. 1979년 7월 정은 뉴저지 알파인 김형욱의 집 부근의 한 식당에서 김형욱을 만나 회고록 포기를 설득하게 된다.
3페이지 | ‘프랑스에 이상렬있으나 김형욱 혼자 가라’
김 형욱의 자필회고록과 바꾸는 조건으로 50만달러를 제시했으나 김형욱은 스위스계좌로 2백만달러 이체를 요구함으로써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어진다, 이튿날 정태동 김형욱은 몰루신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고 ‘정’은 2백만달러를 받아들이며 선금으로 스위스계좌로 50만달러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정’은 이 거래를 책임지는 사람이 김형욱 부하로 일했던 프랑스내 중정책임자 이상렬이므로 김형욱에게 혼자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로 가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날도 두 사람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김형욱은 2백만달러 일시불로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곧 김형욱은 돈을 전달받을 때 아내와 자식들이 동행하면 납치의 위험성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 중앙정보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맏아들이 김형욱의 경호원역할을 해왔다.
4페이지 | ‘4페이지 정태동, 협상성공뒤 하인즈박사초대성공 전문
김 형욱은 정태동과의 대화를 녹음하기를 요구했다, 김형욱은 ‘나는 쉽게 납치될 사람이 아니란 것을 명심하시요’라고 말했고 정은 ‘우리가 김대중 납치 때의 쓰라린 경험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정태동은 중앙정보부 본부에 ‘닥터 하인즈 초대성공’이라는 암호 전문을 보낸다, 김형욱과 정태동이 합의를 본 것은 다음과 같다 ‘김형욱은 파리에서 이상렬을 만나 그와 함께 스위스로 가서 50만달러 수령을 확인한다. 그 뒤 자필회고록은 백만달러를 지불받을때 교환한다’였다. 1979년 8월 10일 김형욱은 전 가족과 함께 파리에 도착, 호텔 GEORGE V에 짐을 풀고 다음날인 11일 이상렬에게 연락한다.
5페이지 | 이상렬은 원충연반란제보뒤 김형욱에게 발탁
이 상렬이 소령시절 원충연 반란사건을 중앙정보부에 제보함으로써 이상렬은 출세가도를 달리고 베트남에 파견됐으며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김형욱 직속 부서에서 일했다. 김형욱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이상렬은 김형욱에게 중앙정보부 활동에 신물이 났다며 캐나다나 미국으로 도피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위스 취리히의 은행에서 김형욱과 그의 가족앞에서 이상렬은 준비한 50만달러를 김형욱의 계좌로 이체시켰고 김형욱은 만족스러워하며 이상렬에게 현금 2만달러를 지불한다. 그 뒤 김형욱은 경호원역할을 한 그의 장남과 함께 카지노에 가기 위해 두 번이나 파리를 방문하고 자연스럽게 이상렬과 만나게 되며 잔금지불에 대해 이야기한다.
6페이지 | ‘마취 뒤 소포로 위장, 대한항공으로 서울보내라’
[1979년] 9월 30일 프린스턴대를 막 졸업한 그의 장님이 10월 3일 취업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에 김형욱과 동행하지 못했고 김형욱은 혼자서 에어 프랑스를 타고 파리로 간다, 파리에 도착, 리츠호텔에 숙소를 정한뒤 이상렬과 함께 바카라를 즐기기 위해 그랑체롤카지노를 방문했고 이상렬은 다시 김형욱을 안심시키기 위해 몇십만달러[숫자가 잘 안보임, 6자리]가 있다면 해외로 도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이상렬은 중앙정보부로 부터 상세한 납치 지시명령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김형욱을 파리의 중앙정보부 아지트로 데리고 간다 2. 마취를 시킨다 3. 소포로 위장해 대한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보낸다 4. 급작스런 상황이 벌어질때는 암살한다 김형욱의 가족은 안전이 염려돼 파리의 호텔로 정기적으로 확인전화를 함으로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기 위해서는 아지트로 부터 항공기 출발까지 적어도 36시간이 이상렬에게 필요했다.
7페이지 | 10월 7일 돈 잃자 중정운영 일본클럽으로 유인
그 러므로 김형욱의 가족과의 전화연락을 끊어야 했으며 이 때문에 김형욱에게 호텔을 바꾸기를 설득한다, 김형욱의 심리를 이용해 리츠호텔은 너무나 알려진 호텔이라 프랑스 거주 한국인들의 눈에라도 띄면 중앙정보부 요원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한 비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10월 7일 아침 김형욱은 웨스트엔드호텔로 숙소를 바꾸지만 호텔변경에 대해 가족에게 연락하는 등 아주 중요한 사항을 간과하게 된다. 그 뒤 이상렬은 ‘내일 스위스에서 지난번처럼 남은 금액을 전달하면 모든게 끝날 것이므로 오늘 밤은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두사람은 그랑체롤에 가게 되고 저녁 7시쯤 계속 돈을 잃고 있던 김형욱에게 기분전환삼아 일본인이 운영하는 비밀클럽에 가자고 이야기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일본말로 클럽 예약하는 것을 보여준다. 당연히 전화를 받은 상대는 아지트의 요원이었고 일본인여인이었다.
8페이지 | 10월 16일 청와대 지하실서 김형욱 사살
이 상렬은 중앙정보부의 지시내용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는 김형욱을 아지트로 데려갔으며 마취를 시키고 이른바 ‘소포’는 쉽게 통관돼 한국행 대한항공 비행기에 실렸다, 10월 7일 파리시간으로 밤 12시, 프랑스 중정책임자 이상렬은 전문을 날렸다 ‘닥터 하인즈 서울행’, 바로 이 사건 뒤 이상렬은 런던을 통해 서울로 들어간다, 오작교 작전의 성공으로 그는 이후 중정 전남 지부장으로 승진한다, 10월 16일 부산에서 폭동[부마항쟁을 의미]이 일어날 때 김형욱은 중정요원들에 둘러싸여 청와대 지하에 위치한 한 장소로 끌려가서 박대통령과 재면하게 된다.
김 형욱은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박대통령이 ‘더러운 배신자’라고 첫마디를 던지자 ‘배신자는 당신이다, 나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라고 소리친다, 중정부장 김재규, 대통령수석경호원[경호실장을 의미]차지철, 그리고 또 다른 3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박대통령은 욕설을 퍼부으며 김형욱에게 직접 두발을 발사, 제거했다.
선데이저널 USA 박우진 기자 http://www.sundayjournal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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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글의 덧글이니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확인된 사실관계에 대한 제 이해만 밝힙니다. 1. 김형욱은 최장수 중정부장으로 못돼처먹은 악행의 수준은 입에 담기 어려울정도였고, 이게 박정희의 총애를 산이유. 2. 박정희에게 팽을 당한후 박정희의 못된짓을 미의회에서 고스란히 증언. 3. (박정희 빡돌아 저새끼 어떻게좀 하라고 지시한게 매우 매우 매우 유력하나) 일단 밝혀진건 김재규의 살해지시 4. 김형욱 빠리에서 실종 5. 몇일있다 박정희 살해.
못된짓을 일삼던 두명이 (지시한자, 지시대상자 모두) 제명에 못죽었다는 권선징악적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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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유럽 여행 때 김형욱이 마지막 밤을 보냈다는 웨스트엔드 호텔을 가봤어요. 곁으로 보기에 별로 좋은 호텔이 아니었는데 누군가의 꼬임에 빠져 이 호텔로 왔다지요. 그 전날만 해도 리츠호텔에 머물렀다고 하더라구요. 악인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호텔... 그 후 실종되었고 악인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김형욱과 박정희는악에 관한 한 쌍벽을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가까운 인척되는 어느 분도 제법 힘 있는 자리에 있었는데 김형욱 등쌀에 못 견뎌 캐나다로 이민 와서 살다 최근 세상을 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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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비님의 파리 역사기행은 아주 다양하셨군요. ㅎ 근데 김재규 살해지시도 확인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네요. 중정이 관여되었다는것만은 확실하지만요 (그렇다면 물론 김재규, 박정희 모두 빠져나갈 수 없겠요.)
오늘따라 궁금해서 이것저것 보았는데, 그 양계장살해가 상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가설들은 믿음이 안가구요. 그사람 주장은 박정희 지시라는 거구. 암튼 언제 읽어도 흥미로운 사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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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양계장에 무게가 가거든요. 이번 파리 갔을 때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양계장도 가보려 했어요. ㅎ .여태 있는지는 몰라도.
청와대 살해설이 믿음이 안 가는 건 프랑스 정보기관 눈을 피해 살아 있는 사람을 마취해 데려 온다는 게 어렵고,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일본, 독일과 외교마찰을 빚었고 그걸 해결 하느라 고생께나 했는데 김형욱 납치사건은 프랑스와는 외교마찰 없이 부드럽게 넘어 갔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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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규명위원회의 발표는 어이가 없을정도입니다. 중정에서 동구권 깡패고용 살해?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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