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3년만에 모국을 방문했을 때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보았다.
일제가 조선반도를 식민지 삼으려는 야욕을 드러낼때쯤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하기 위해 1907년 서울에 만든 서대문 형무소는 이후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저항하던 많은 투사들이 이곳에 수감되고 돌아가셨다.
해방 이후에는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같은 마음으로 투쟁에 나섰던 투사들이 일본놈들이 아닌 같은 동포의 손에 잡히어 고통 받고 고문을 당했던 슬픈 비극의 현장이다.
이후 안양 교도소로 시설들이 이전되면서 1984년 10월 폐쇄된 후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독립투사와 민주투사 유가족들의 애절한 청원으로 건물 철거가 중단되었고 1988년 2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복원작업을 거쳐 98년 11월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1907년 당시에는 경성감옥으로 칭하였다가 1923년 현재의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었으며 원래 500명 수감 시설이었으나 이후 증축을 거쳐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289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해 보니 가족단위 방문객도 많았지만 어린 학생들의 단체 관람도 많이 눈에 띄었다. 문화 해설사가 곳곳을 함께 다니며 한 시간 넘게 상세히 설명해주었는데 그냥 돌아보는 것 보다는 이곳의 역사와 참상을 이해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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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가면 볼만한 문화유적지가 참 많다. 지난 가을 갔던 곳 중에서 특히 종묘, 비원이 크게 인상적이었고 문화해설사를 통해 재미있고 흥미롭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서울을 방문하게 되면 이런 유적지를 돌아보며 우리의 역사의 뿌리를 찾아보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 같아 이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서대문 형무소 매표소를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메인 건물이 나오는데 이곳 지하에는 취조실과 고문실이 재현되어 있고 당시 고통 받던 모습들이 마네킹으로 만들어져 있어 옷깃을 저미게 만들며 모진 고문 속에 지르던 비명이 스피커를 통해 재현되어 일제와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부당하고 불법으로 고문 받고 핍박 당하던 투사들의 비참했던 모습을 눈에 그려지며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당시 고문받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이분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는지를 조금이라도 느껴볼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교수형으로 많은 독립투사들이 운명을 달리했던 사형장 앞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학생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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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에는 수많은 위인들이 갇히고 고문을 당했는데 주요 인사들로는 유관순, 안창호, 윤봉길, 김구, 신채호 선생 등이 있으며 해방 이후에는 문익환, 백기완, 문영환, 리영희님도 그 목록에 있다.
우선 문익환, 문동환님은 캘거리와 인연이 꽤 깊다.
위 두 분은 문재린 목사의 자제이며 슬하에 문익환, 문동환, 문영환 세 아들을 두었다.
1985년 별세한 고 문재린 목사는 1971년 캐나다로 이민 왔으며 40여년전 캘거리에 한인교회를 세우는데 주축 역할을 해주셨고 그의 3남인 문영환 교수 (전직 연변 과학기술대학 교수)가 현재 캘거리에 거주하고 있다.
아래는 캘거리에 초대 한인교회가 세워질 당시의 역사 기록이다.
https://cndreams.com/news/news_read.php?code1=2345&code2=1&code3=270&idx=-2603&page=0
둘째 아들 문동환님은 개신교 목사로 한신대학교 교수를 역임한바 있고 형인 문익환님과 민주화 운동에 매진했다. 이후 1988년 평화민주당 소속으로 13대 전국구 국회의원과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동포 단체에서 통일 운동을 했으며 2019년 3월 별세하셨다
문동환님은 2008년 캘거리를 방문해 강연회를 가진바 있으며 당시 행사 기사는 CN드림에서 볼 수 있다.
https://cndreams.com/news/news_read.php?code1=2345&code2=0&code3=210&idx=699&page=0
큰 아들 문익환 목사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민주투사이자 통일운동가였으나 살아 그분이 간절히 원했던 통일은 생전에 보지 못하셨다.
아래는 본지에서 막내인 문영환 교수와 가진 2003년 가진 인터뷰 기사이다.
https://cndreams.com/news/news_read.php?code1=2345&code2=1&code3=270&idx=4604&page=0
서대문 형무소에는 문익환, 문동환님께서 지내셨던 방이 따로 만들어져 그분들의 생애와 업적이 포스터로 전시되어 있다.
그 외 평소 리영희, 백기완님의 방이 있어 들어가서 자료를 살펴보았다.
리영희님은 저서 <우상과 이성> , <전환시대의 논리>, <분단을 넘어서> 그리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등은 명저로 인정받으며 70~80년대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이상과 포부를 심어주었고 올바른 세상에 눈을 뜨게 만들어준 분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다.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출생한 이분은 경성에서 고학하다가 해방을 맞은 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 후 항해 쪽 일을 잠시 하다가 영문학에 심취해 이후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 한국전쟁이 터져 국군 장교로 통역관 일을 했다.
이 와중에 미군들의 한민족을 대하는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이 와중에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갖은 악행과 부패에 찌든 이승만 정권의 모습으로 인해 진보성향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로 반공법 2년 실형을 받은 바 있으며 이후 일본 도쿄대, 미국 버클리대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8년 한겨레 신문 논설고문으로 취임하고 1995년 한양대 교수에서 정년 퇴임했다. 2010년 12월 81세 일기로 별세하셨다.
리영희님의 방에 마련된 포스터에 있는 문구가 크게 눈에 들어왔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쉽게 굴종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그분의 호령이 가슴에 크게 와 닿았다.
그분의 말을 일부 옮겨본다.
자기 생활의 주인이 되어야지, 물질은 중요하지 않아. 설명 모자 500개. 넥타이 300개를 가진다고 해서 그 물질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니? 오히려 물질이 주인이 되고 물질의 예속물이 되는거야.
정신의 혁명이 필요해.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루어야지. 물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는 착취와 강압과 사치와 타락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타락이 중대한 병이야. 이 타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만큼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적 기품이 높아지게 되지.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풍요 속에 매몰되지 말고,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과 결정의 주인이 되는 거야. 자기를 상실하고 의식 없이 생활하면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지.
물론 자발적으로 이런 노예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자본주의에서는 그저 소비에서 낙을 찾으려고 하는 풍습이 많으니까.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나의 인생은 그저 낙오자일 수 밖에. 계속 낙오자의 길로만 걸어왔고. (생략)
백기완님은 진보정치인으로 보수성향인 분들께는 거부감이 있겠으나 정치성향을 떠나 그분의 애국심과 통일의 염원은 모두가 인정해주어야 할 부분이다.
1954년부터 61년까지 이분은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에 온 힘을 다 바치셨으며 이후 독재정권에 항거하고 통일운동에 매진하셨다. 1932년 생으로. 그분이 일제시대 때 어른이었다면 당연히 항일투사로 나섰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21년 2월 별세)
위 사진은 <통곡의 미류나무>로 1921년 전후로 사형장을 이전할 당시 심은 것으로 알려진 미루나무이다. 사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사형수들이 이 나무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2020년 8월 100여년의 수명을 다하고 쓰러졌다. 사형장의 역사와 함께 이 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쓰러진 그대로 전시보관중이다.
쓰러지기 직전인 2016년 4월 뿌리에서 한 그루의 미루나무가 자생하여 슬픈 역사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