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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원주민 말살정책과 기숙학교(1)
처벌되지 않는 인종범죄
역사상 최초의 제국 아시리아는 피정복민들을 가혹하게 취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도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곳으로 강제이주 시키고 다른 민족을 이스라엘에 강제 이주시키는 혼합정책으로 정체성을 없애려 했다. 그 때 다른 민족과의 혼혈이 생겼는데 그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한다. 성경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괄시를 받는다.
아시리아 제국 이후에도 인지의 발달, 문명의 발달 등 인류는 수많은 진화 진보의 발달 단계를 거쳐 20세기에 이르렀는데 19세기 20세기에도 아시리아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이 타 민족, 타 인종에 대한 정체성의 말살, 인종 말살이라는 야만적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상대로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을 통해 황국신민화 정책이라는 민족 말살정책을 썼고 히틀러도 유대인, 집시를 상대로 말살정책을 썼다. 그러나 독일이나 일본은 패전국이 됨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비판을 받고 잘못을 인정해 역사적으로 정리가 되었다. 일본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만.
독일 일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인종범죄는 반인륜적 범죄로 취급되어 가해자가 법정에 서거나 처벌 받았는데 북미 대륙에서 유럽인들이 원주민을 대상으로 일으킨 인종범죄는 가해자가 처벌 받지도 않고 법정에 서지도 않는다.
2008년 6월11일 연방 총리 스테판 하퍼는 각료들을 대표하여 관람석 앞줄에 앉아 있는 원주민 대표들에게 과거 캐나다 정부가 행한 원주민 동화정책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연방총리의 사과는 기숙학교에서 원주민 소년 소녀들을 상대로 행해진 지나친 행위뿐 아니라 기숙학교 설립 그 자체에 대한 사과였다.

- 기숙학교 설립 배경과 폐쇄 -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에 처음 발을 들어놓고 모피교역을 할 때만 해도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은 별개의 존재였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 서로 필요에 의해 협력하며 경제적 이득을 나누는 사이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모피교역에서 농업으로 눈을 돌려 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문제가 달라졌다.
유럽인들이 국가를 세우고 유럽으로부터 대량이주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원주민들과 땅과 자원을 놓고 직접 경쟁관계가 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원주민들과 종전의 평화스러운 동맹관계는 끝났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골치덩어리로 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는데 “인디언 문제”는 단지 인디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디언들은 문명 전파의 걸림돌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문명의 전파”란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에 퍼져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유럽인들이 북미대륙에 퍼져 살며 토지를 개간하고 자원을 개발하는데 원주민(인디언)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자신들의 문명 속에 동화 시킬 것을 생각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인디언을 캐나다 국민의 일원으로 흡수해 인디언 부서도 없어지고 인디언이란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인디언 자치 대신 교육을 통해 이들은 캐나다 국민의 일원으로 흡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 영향을 받지 않게 부모를 떠나 교육을 시켜 원주민 문화, 전통으로부터 단절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럴 경우 원주민 보호지역을 강화 하고 또한 부족 전통의 단절을 위해 주택은 개인주택으로 토지는 공동에게 주지 말고 개인에게 분배 해서 시민화, 문명화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이 정해졌다.
기숙학교의 설립목적은 원주민들을 교육시켜 유럽-캐나다 문화에 동화 통합 시키는 것이다. 최초의 기숙학교는 1831년 온타리오 브란트포드에 세워진 모학 인디언 기숙학교다. 그 후 각 주, 준주에 기숙학교가 세워졌다. 앨버타 중에는 33개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정부는 캐나다 전역에 걸쳐 연방정부가 운영했던 기숙학교는 132개인것으로 확인했다. 1920년 인디언 법안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15세까지 기숙학교 참석이 필수적이었다. 이 법을 어기면 부모가 수감 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서서히 기숙학교는 줄어들었다. 1940년대부터 원주민 통합정책에 의해 원주민 자녀들도 주류 학교에 출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0년부터는 연방정부 인디언부에서 주관하던 기숙학교 운영을 원주민들이 넘기기 시작했다.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기숙학교는 1996년을 마지막으로 모두 폐쇄되었다.

- 기숙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많은 원주민 자녀들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왔다. 때로는 강제로 부모를 떨어져 오랫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교육을 받았다. 집에서 가까운 기숙학교에 들어간 경우에도 가족을 만나려면 학교당국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가족을 만나는 횟수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기숙학교에서 빈번히 생긴 일은 원주민 자녀들의 질병, 굶주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원주민 자녀들이 학교에서 사망율은 15-24%였다. 병에 걸린 자녀들은 귀가조치 되었는데 집에 돌아가서 사망하는 비율은 42%였다. 생존 가능성이 없는 자녀들이 귀가조치 되었다는 의미다.
극히 일부분의 원주민 자녀들이 적절한 교육으로 기숙학교에서 좋은 경험을 쌓았으나 대부분 질이 낮은 교육을 받았고 학업성취도가 낮아 약 3%의 원주민 자녀들이 초등학교 6학년 학력을 유지했다.
기숙학교 직원들의 40%는 전문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숙학교가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직원들이 모두 부적당한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열성을 갖고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들도 많겠지만 직원들은 원주민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돌봐주고 감독하는 일까지 맡았다. 저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동안 일인 삼역 사역 하는 것이 직원들에게는 스트레스였다.
기숙학교 생존자들을 조사한 원주민 추장 연합회에 따르면 기숙학교에서는 원주민 자녀들을 상대로 성적 학대, 구타, 상한 음식 강제로 먹이기, 굶주림, 속박 및 구금, 강제 노동, 원주민 언어 사용시 징벌 등이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원주민 자녀들은 원주민 언어를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원주민의 문화, 전통을 나타내는 것도 금지되었다. 원주민 말을 하는 경우에는 혀를 바늘로 찌르는 벌을 받기도 했다. 기숙학교에서 원주민 자녀들에 대한 학대는 광범위하게 행해져 정신적 학대, 가혹한 형벌, 질병, 심지어는 의학실험 대상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기숙학교 시절 겪었던 혹독하고 쓰라린 경험으로 입은 정신적 외상으로 원주민들은 정체성 상실, 가족상실, 언어 상실, 문화 상실을 겪고 있다.
자녀들이 장기간 부모,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면 부모들은 자녀 양육 방법을 잃어버리거나 소홀하게 된다. 또한 자녀들은 언어와 문화를 부모, 가족으로부터 전수 받을 기회를 잃어버려 문화의 단절 언어의 단절이 생긴다.
1990년 초반부터 기숙학교에서의 일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용기 있는 한 명 두 명의 증언이 알려지고 전해지며 이에 고무된 나머지 생존자들도 기숙학교 시절에 겪었던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시작했다.

기사 등록일: 201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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