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9월 김제동과 법륜스님이 함께 한 밴쿠버 <청춘 콘서트>에 1천 3백명이 몰리며 대 성황을 이룬바 있죠.
법륜스님이 캘거리에서 강연을 갖습니다. 11월 5일(수) 오후 6:30분 캘거리 다운타운 공공 도서관입니다. 상세 안내는 CN드림 지면 광고 혹은 여기서 행사 안내 게시판을 참조하세요.
동영상) 방송인 김제동이 말하는 '주님 이야기'입니다. 재미 있어요
작성자 운영팀 게시물번호 7604 작성일 2014-10-06 08:13 조회수 6340
쓰신 글이 운영원칙에 어긋나는건 전혀 아니구요. 다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게 있어서요.
님이 쓰신 글은
법륜스님을 존경하고 그분의 강의를 열심히 듣는 분들, 그리고 캘거리에 법륜스님 강연회에 참석하려는 분들에 대해 \"썩어 돌아가는 세상은 무시한체 나만 잘살고 천국 가려는 사람\"으로 비추어 질수 있을것 같아서요..
또한 \" 적어도 캐나다에서 법륜스님을 사랑 하시는 분들이라면 부처님이 원하시는게 과연 무엇인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쓰셨는데 이것도 마치 부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동떨어져 사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제가 지난 몇주간 법륜 스님 강좌를 들어본 경험에 의하면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의 강의를 듣는 분들은 부처님이 원하시는게 무엇인지를 찾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쓰신 취지는 이해하곘으나 자칫 특정인들을 비하하는 내용이 될수도 있을것 같아 한마디 적어보았습니다.
지금 유럽 각처를 돌면서 즉문즉담모임을 가지시는데, 다음포털에서 씨리즈로 실렸고 지금은 8편이 나와 있습니다. 제 8편인가 헝가리 한국현지공장관리자에 대한 법륜스님의 답변은 정말 brilliant 하시더군요. 아마도 불교적 연기법을 체득하신 분이라 항상 타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심지가 무척 깊으신 듯 하였습니다. 각 집회 때마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 중에서 선별해서 올려서 어떤 질문과 답변이 오갈지는 모르겠지만, 유투브보니 친구와 싸워서 안만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애인과 헤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년이 된 아들이 집을 나가서 안들어오고 연락 끊고 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등등,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것도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의 즉문을 즉답하시는 것은 정말 탁월하고 배울 바가 많다고 봅니다. 그러고보면, 스님들도 법정 스님도 있고, 민중불교를 주창한 여익구 선생이나 법성스님도 있고, 민주화운동을 하시던 지선스님도 계시는데, 제가 판단하는 법륜스님은 요즘 인기있는 개신교의 상담가들이 하는 역할을 불교에서 하시는 것으로 보이구요.
그런면에서 아쉬운 면이 좀 있더군요. 몇 편 못봐서 판단하기는 그렇구요. 제가 판단을 잘 못했다면 다른 분들이 아, 그렇지 않다고 지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분의 한계이고 또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즉문즉답하실거면 구태여 서구여러나라를 돌아 보실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불교에서는 존재의 세 가지 속성을
무상(無常) (everything is impermanent)
고 - 불만족성[苦] (suffering)
무아(無我)(no permanent soul or self)
라고 하는데, 뭐니뭐니해도 불교의 핵심은 고통의 문제와 씨름한 종교인데
\"고통의 사회성\"을 깊이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바둑님의 질문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생활처세가 즉문즉답의 주류가 된다면 아쉬운 점이 많이 남을 것입니다. 사람들 구미에 맞겠지만, 또 사람마다 추구하는 입장이 다르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종교 소속을 떠나서 교민사회에서 가장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신 분은 최성철 목사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따온 예언자와 사제(제사장)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사회학적 유형론을 제시했는데, 현실을 따독거려주는 사제로서의 법륜스님과 새로운 변화를 제시하는 예언자로서의 최성철 목사님의 차이를 읽습니다. 여기서 사제와 예언자는 기독교라는 틀에서 읽기 보다는 종교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틀로 보시면 좋을 것 같구요.
http://www.burtonbeyond.com/id23.html 제 자신의 판단이지만, 두분이 만나면 좋은 대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드는군요.
바둑님께서는 최목사님께서 에드먼튼에 계시니까 좋은 대화 많이 나누시면 될 듯하구요.
옆으로 좀 샜습니다. 죄송...
저희 아버님 (70대)과 약 한달전 통화를 하다가 세월호 이야기를 꺼냈는데 글쎄, 유가족들 시위를 비판하시고 그들 때문에 경제가 나빠졌다면서 한탄 하시길래 너무 놀랐어요. 세월호 사태가 어느새 정치적인 사안으로 되어 버린것에 놀랐구요, 더 크게 놀란것은 이번 총선 결과를 통해 대한민국에 저희 아버님처럼 생각하는 분이 반대로 생각하는 분보다 더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죠.
그냥 그게 여론이고 국민의 뜻인가 보다라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들정도예요. 정권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런 비극은 더욱더 생기고 사회적인 비리와 불합리는 더 커질건데 (실제로 박근혜 정부 이후 민주주의가 오히려 퇴보하고 있죠. 전교조 문제도 그렇고 경제 활성화 문제도 그렇고) 정권 교체 가능성은 잘 안보이고..
결론을 짓자면, 세월호 사태와 법륜스님 방문건을 묶어서 통째로 비판하는 건 좀...
제가 기독교인 되지 못한 이유중 가장 큰 것을 해결해 주신것 같아 많이 행복 했습니다
고통의 사회성 역사 중요한 부분이란 점은 동의합니다. 다만 이번 강연은 고통의 개별성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 문제 내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물론 가능은 하지만 그 자리의 취지에서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내주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법륜 스님도 물리적 한계를 가진 인간인 만큼 그 한계 내에서 행동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스님 본인이 가진 역량을 가장 최고도로 발휘하는 게 뭔가에 대한 고만을 많이 하면서 그에 맞게 여러 일을 진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 개인적인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사회를 바꾸어보려면 삼십년은 노력해야 한다고 만일결사를 한다는군요. 만일결사의 목표는 아마도 몇 가지 주제에 걸쳐 정해져 있는 걸로 압니다. 사회 정의 같은 걸 추가하면 좋겠지만 정토회는 자기 역량에 맞는 목표를 전하고 그걸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한다고 합니다. 다른 목표들은 다른 사람들이 세우고 일구어 가야할 부분 아닐까 싶습니다. 세월호 문제만 하더라도 이번 박근혜 방문시 시위하던 분들이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앞장 선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교의 사회윤리와 실천이 뭔지 많이 듣고 싶어집니다. 불교의 연기법은 바로 고통의 사회성과 뗄래에 뗄 수 없지 않나요? 그냥 생각해 본 소립니다. 불교학자 Trevor Ling의 [Buddha, Marx, and God: Some Aspects of Religion in the Modern World]은 식민지 경험을 한 남아시아 불교국가들에서 한 때 사회주의를 열심히 받아들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무소유와 맑시즘의 무산자 계급과 통한다는 것을 체득한 것이죠. 이것은 post-colonialism의 반응일 수 있지만, 불교가 사회적 인식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링의 이 책은 좀 오래된 감이 있지만, 남아시아 불교국가의 식민지 후기 때의 상황을 잘 전해준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죠. 글쎄요. 한국 주류 불교는 사회윤리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용옥 선생이 불교 승려들 승복벗고 맞장 뜨면 어떨지 궁금해진다고 일갈한 적 있습니다. 제 기억컨데 [나는 불교는 이렇게 본다]에서인가에서요. 어쨌든, 불교에 대해서 뼈아픈 말일지 모르지만, 불교의 사회적 인식과 참여가 기독교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지 않나요? 저의 편견을 풀어 주세요.
불교의 사회윤리와 실천에 관해서라면 사실 대승불교 운동 자체가 사회 윤리적 실천과 큰 관련을 가지고 발전해 온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의 중요한 경전인 유마경에서 유마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합니다. 유마경에서 유마는 부처를 대신하여 설법을 하고 문수보살 등보다 더 우위에 있는 존재로 나오는데, 그런 존재가 아픈 이유가 중생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이전 불교의 중심이 성문연각과 같은 수행자라고 하면 대승 불교의 중심은 보살이고, 보살 사상이 가장 중요한 교리를 형성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 대승 보살의 대표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세운 서원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전생에서 환란을 당해 죽으면서 만약 누구든 자기 이름을 한번이라도 부르는 사람은 모두 구제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관세음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데 그는 지옥에 빠진 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열반에 들지 않지 않고 성불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중생이 모인 곳이 사회라고 할 때 그들을 구제하여 함께 성불하겠다는 대승불교의 이념은 고통의 사회성을 근본으로 하여 그것을 넘어서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념이 한국 불교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수능 기도나 영가 천도 같은 기복적인 성격이 불교로 오해 받는 수준까지 나아간다는 것이겠습니다.
그 부분은 기독교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가르침은 사랑일 것인데, 그 사랑을 실천한다는 교회와 교인을 만나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운 게 오늘의 한국 기독교 같습니다.
둘다 아주 훌륭한 지도자인 부처와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만 결국 따라가는 것은 세상의 권력과 돈, 명예 아닌가 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정토회가 출발하여 오늘에 이른 곳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교에서는 정토회를 주목하고 그 대표인 법륜 스님을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불교적 세계관에 기반하기 때문에 그 시작이 개인적인 수행과 정진에 두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은 바로 개인적 수행과 정진에 들어가기 위한 첫 단추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시작되어 정토회의 수행 프로그램인 깨장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각종 기도 정진이나 사회 봉사를 하는 과정과 그것을 하는 사람들끼리 의견 등을 나누는 나장이라는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