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이 강요되는 세계에서: 해당화 (海棠花)
- 흐르는 강물
제가 어릴 때, 제가 다니는 학교와 집의 중간쯤 되는 마을에 정박아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니, 사연이 많아 미친 여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잣집 출신의 여인이었건만, 늘 옷은 헤지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돌아 다녔습니다. 방과 후에 아이들은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재미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치마를 뒤집거나 침을 뱉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 박기도 하였습니다. 깔깔대며 아이들이 그녀 주위를 빙빙 돌 때,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과 공포의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고여있는 눈물 조각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폭력은 독재자의 권력만은 아닙니다.
재미로 하는 놀림이 상대방에게는
핏빛 상처로
가슴에 아로새겨져
영원한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약자”라는 말은 슬픈 말입니다.
이 약자의 핏빛 가슴을
안희선 시인은 “해당화(海棠花)”의 붉은 꽃잎으로 형상화합니다.
재미삼아 하는 폭력에도 핏물 들고,
강요된 폭압에도 핏물이 듭니다.
폭력의 가속도로 날아가는 돌팔매의 돌멩이
소통되지 않은 관계의 거리만큼 돌멩이는 폭력의 상징으로 선명합니다.
피 묻은 돌멩이에 웃음짓는 아이들의 장난끼나
정치권력의 탐욕으로 똘똘 말린 폭력이나 같은 이름입니다.
"돌팔매, 피 흘려
해당화 (海棠花) 붉은
꽃밭"
힘은 악을 낳고, 모든 악은 폭력의 근원이 됩니다.
아이들의 장난에도
어른들의 권력 욕에도 관계 단절이 가져다 주는 폭력의
실재
사회적 위기는 폭력이 춤을 추듯 일어나
사회적 약자를 찾아
"죄지은 자, 모두 돌을 들어"
희생양 (scapegoat)을 찾아 헤매어
돌을 들어 “살해” (殺害)를 합니다.
그러므로 안희선 시인의 해당화 (海棠花)는
희생초 (犧牲草)라 이름지을 수 있을지요.
내 죄가 아닌 타인의 죄의 피 값을
대신해서
"땅바닥에 뒹구는,
실어(失語)의 얼굴들"
을 해당꽃이라 합니다.
고통으로 오는 아픔의 신음이 고통의 울부짖음뿐이겠습니까?
지옥 같은 소외
암흑 같은 버림받음의 경험의 절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음의 두 소절은 리얼리즘의 극치를 이룹니다.
"그 아픈 신음에,
소스라치는 오후의 적막"
폭력의 희생자로서 울부짖는
처절한 소외와 버림받음의 소리
그러므로 신음소리와 적막은 모순관계가 아니라 희생과 소외의 극단적
표현을 이루는 짝패가 됩니다.
"꽃들아 이제 그만,
이 죄 많은 세상을
용서해 주렴"
절망의 끝에 깨달음의 서광이 비칩니다.
이것은
꽃들의 희생은 죄를 씻는 담지자 (bearer)가 됩니다.
학대와
핏빛 고통을 즐기는
메조키스트적 자학이 아닙니다.
해당화 (海棠花) 의 선혈 같은 붉은 빛을 보십시오.
떨기 하나 하나에는
희생이 극복된 승화의 빛이 묻어 납니다.
짓밟힌 땅에서 고개들어 하늘 보는
해당화 (海棠花)의 붉은 용서의 인사.
시인은 해당화에서 쓰러짐을 본 것이 아니라
일어섬을 보고 있습니다.
절망의 핏물은 이렇게 꽃이 되어 승화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아무리 고달플지라도
절망의 나락으로 스며들지는 마십시오.
그럴수록
핏빛 꽃으로 활짝 피어
처연한 향기를 발하십시오.
4월의 길목에
이 시는 절망 속에 사는 여러분을
향한
헌화 (獻花)입니다.
☞ 안희선 님께서 남기신 글
돌팔매, 피 흘려
해당화(海棠花) 붉은 꽃밭
죄지은 자, 모두 돌을 들어
땅바닥에 뒹구는,
실어(失語)의 얼굴들
그 아픈 신음에,
소스라치는 오후의 적막
꽃들아 이제 그만,
이 죄많은 세상을
용서해 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