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IS BEAUTIFUL
(아름다운 아프리카)
-시내 운
원시의 그림자
밀림과 사막을 틀어 안고
문명을 거부 하는
네 질긴 고집은
푸르디 푸른 가슴 으로
검은 생명을 받아 낸다
원초적 생명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삶이
야만 이더냐
미개한 종족 이더냐
인간 사냥의
올무와 덫에 걸려
검은 피 쩔어 붙은
족쇄를 끌고
노예 시장의 인육으로 팔리던
식민 통치의 아픈 역사 위에
그들의 지성
아그레이는 부르짖는다
" 자신의 피부 색갈을 자랑 스럽게 생각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고
검은 피부를
붉은 흙 먼지에
딩굴려 가며
기아와 분쟁의 소외된 땅에
인류의 진실을 안고
푸른 초원에
신의 빛과 향기를 발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아래
몸 부림 치는
아프리카여 ! 순수함 이여 !
너의 검은 몸은 아름답다
*********************************
시내운의 “아름다움”의 진실
- 내사랑 아프리카
1.
내가 아프리카에 대해서 관심을 "깊이" 가지게 된 것은 아프리카 종교와 인류학 이론 강의를 듣고 나면서 부터였다. 인류학이 쌓아 놓은 지식과 인간 이해는 앞으로도 인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이다. 인류학의 역사는 인간 이해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일그러뜨린 어두운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류학의 주요 대상은 아프리카였다. 선교의 목적으로, 식민지 경제의 경영을 목적으로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몰려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의 땅은 자로 그은 듯이 반듯반듯한 영토였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문명이 가한 거친 폭력이었다. “지도가 영토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이 식민의 대륙은 지도와 영토는 일치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지도에 그어진 선을 볼 때마다 나는 백인 범죄자들의 칼날 자국에 스며있는 핏자국을 발견한다.
2.
시내 운 시인의 이 시는 식민의 지도가 그어진 근대를 뛰어 넘어 아프리카의 원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원시의 그림자
밀림과 사막을 틀어 안고
문명을 거부 하는
네 질긴 고집은
푸르디 푸른 가슴 으로
검은 생명을 받아 낸다"
1연에 나타나는 “원시”는 “문명”의 대구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이 원시는 유럽 문명이 제시한 식민과 착취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거기에는 밀림과 사막이 서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자연의 공간적 순환체계로 작용한다. 문명이 만들어낸 현재에도 여전히 문명 이전의 “그림자”가 아프리카의 자기 정체성이 되어 “질긴 고집”으로 드리우고 있다. 이 고집으로 아프리카의 색깔이 여전히 간직된다. “푸르디 푸른 가슴”은 문명이 죽일 수 없는 아프리카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이것은 푸른 하늘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푸른 바다를, 아니 장중한 아프리카의 밀림을 연상해도 좋겠다. 이 자연의 모체 속에서 태어난 아프리카인. 그들을 “검은 생명”이라 하자.
3.
2연으로 넘어 오면서 이 생명에 서구, 백인, 근대 문명이 도래 낸 언어적 칼 날이 선명하다.
야만, 미개, 인간사냥, 올무, 덫, 족쇄, 노예, 식민통치
이 단어는 “문명”이라는 가치 하에 생성된 언어였다.
수단 근처에 “누어” (Nuer)라는 부족이 있다. 그들에게 소는 자기들의 모든 삶의 터전이었다. 먼지가 풀썩이는 땅에 검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그들의 일상은 시작된다. 소 방울 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은 옷 한 올 걸치지 않고 깔깔대며 뛰어 다닌다. 소의 오줌으로 손을 씻고, 말린 쇠똥으로 불쏘시개 삼아 밥을 지으며, 재는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썬크림이 된다. 때론 소가 벗이 되고, 때론 소가 생명의 양식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하루 해가 저문다. 이 누어의 삶을 섬찟하도록 그려내는 인류학자가 있으니 그가 에반스-프릿챠드 (E. E. Evans-Pritchard)다. 그의 연구를 더듬어 1960년대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필름은 아프리카 누어 족의 일상이 지루할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누어 족에 유럽 문명의 총, 칼이 들어가고, 유일신의 이념인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나 살해의 잔악함이 재연된다. 유럽의 노예, 미국의 노예, 이제 문명이 만들어낸 이념의 노예가 되어 서로를 죽이고 있다. 나는 그 누어 족의 한 사람을 캘거리에서 만났다. 눈자위와 입술, 이빨을 제외하곤 온 통 검디 검은 국제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지리적 차이와 시간적 간극을 넘은 그 우연한 만남에 한 동안 내 인식의 수용능력을 다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는 우리의 막연한 동경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이 만났던 곳이고, 우리의 이념과 편견이 실험된 실험장이고, 새로운 생명이 담지되는 가능성의 장이다. 이런 인식의 원리를 시내 운은 이렇게 인용한다.
"아그레이는 부르짖는다
'자신의 피부 색갈을 자랑 스럽게 생각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고"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은 유럽과 북미가 전가한 검고 우울한 대륙이 아니라 흑인 자신들의 자기 의식의 표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프리카라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생명, 바로 검다는 것에 대한 재인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검다는 것은 인위적 색깔이 아니라 차라리 무채색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색이 검은 색이며 자연의 흰 모래 위에서 검은 색은 찬란한 빛을 발한다. 문명이 만들어낸 언어적 기호인 인종차별의 언어, 흑과 백은 결코 아프리카를 규정하는 색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이라는 백인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희게 되려는 눈물나는 열등감의 투쟁. 그런데 아그레이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의 발언은 이보다 더 본질적인 아프리카의 생명의 기원과 가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4. 3연에서 2연의 성찰이 다시 교차되며 희망의 언어를 낳는다.
“검은 피부를
붉은 흙 먼지에
딩굴려 가며
기아와 분쟁의 소외된 땅에”
그렇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아프리카의 시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항거는 미래를 향한 다짐이다. 노예, 식민, 착취라는 죽음의 문명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의 피. 이것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내려운 생명의 유전이며 핏줄기이며, 이 생명에 가해진 폭력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인류의 진실을 안고
푸른 초원에
신의 빛과 향기를 발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아래
몸 부림 치는
아프리카여 ! 순수함 이여 !
너의 검은 몸은 아름답다”
이러한 자각이야말로 아프리카가 담고 있는 메시지이며, 인류를 향한 전령사의 외침이기도 하다. 생명의 시원을 담고 있는 아프리카, 그 생명을 낳고, 키운 초원과 햇빛. 그 속에 생명 탄생과 양육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5. 관심은 공감을 일으키고, 공감은 인연의 다른 표현이다. 시내 운의 이 시는 아프리카에 대한 단순한 관심이 아니다. 이것은 인연이 빚어낸 관심이요, 아픈 공감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외침은 어쩌면 그의 생명의 일부를 아프리카에 둔 부모의 마음일 수 있고, 인류의 생명에 대한 믿음의 끈이 이어주는 소통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공감하고 아파하지 않는다면 아프리카는 없다.
(아름다운 아프리카)
-시내 운
원시의 그림자
밀림과 사막을 틀어 안고
문명을 거부 하는
네 질긴 고집은
푸르디 푸른 가슴 으로
검은 생명을 받아 낸다
원초적 생명
자연에 가장 가까운 삶이
야만 이더냐
미개한 종족 이더냐
인간 사냥의
올무와 덫에 걸려
검은 피 쩔어 붙은
족쇄를 끌고
노예 시장의 인육으로 팔리던
식민 통치의 아픈 역사 위에
그들의 지성
아그레이는 부르짖는다
" 자신의 피부 색갈을 자랑 스럽게 생각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고
검은 피부를
붉은 흙 먼지에
딩굴려 가며
기아와 분쟁의 소외된 땅에
인류의 진실을 안고
푸른 초원에
신의 빛과 향기를 발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아래
몸 부림 치는
아프리카여 ! 순수함 이여 !
너의 검은 몸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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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운의 “아름다움”의 진실
- 내사랑 아프리카
1.
내가 아프리카에 대해서 관심을 "깊이" 가지게 된 것은 아프리카 종교와 인류학 이론 강의를 듣고 나면서 부터였다. 인류학이 쌓아 놓은 지식과 인간 이해는 앞으로도 인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이다. 인류학의 역사는 인간 이해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일그러뜨린 어두운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류학의 주요 대상은 아프리카였다. 선교의 목적으로, 식민지 경제의 경영을 목적으로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몰려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의 땅은 자로 그은 듯이 반듯반듯한 영토였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문명이 가한 거친 폭력이었다. “지도가 영토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이 식민의 대륙은 지도와 영토는 일치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지도에 그어진 선을 볼 때마다 나는 백인 범죄자들의 칼날 자국에 스며있는 핏자국을 발견한다.
2.
시내 운 시인의 이 시는 식민의 지도가 그어진 근대를 뛰어 넘어 아프리카의 원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원시의 그림자
밀림과 사막을 틀어 안고
문명을 거부 하는
네 질긴 고집은
푸르디 푸른 가슴 으로
검은 생명을 받아 낸다"
1연에 나타나는 “원시”는 “문명”의 대구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이 원시는 유럽 문명이 제시한 식민과 착취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거기에는 밀림과 사막이 서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는 자연의 공간적 순환체계로 작용한다. 문명이 만들어낸 현재에도 여전히 문명 이전의 “그림자”가 아프리카의 자기 정체성이 되어 “질긴 고집”으로 드리우고 있다. 이 고집으로 아프리카의 색깔이 여전히 간직된다. “푸르디 푸른 가슴”은 문명이 죽일 수 없는 아프리카의 영원성을 상징한다. 이것은 푸른 하늘을 의미할 수도 있겠고, 푸른 바다를, 아니 장중한 아프리카의 밀림을 연상해도 좋겠다. 이 자연의 모체 속에서 태어난 아프리카인. 그들을 “검은 생명”이라 하자.
3.
2연으로 넘어 오면서 이 생명에 서구, 백인, 근대 문명이 도래 낸 언어적 칼 날이 선명하다.
야만, 미개, 인간사냥, 올무, 덫, 족쇄, 노예, 식민통치
이 단어는 “문명”이라는 가치 하에 생성된 언어였다.
수단 근처에 “누어” (Nuer)라는 부족이 있다. 그들에게 소는 자기들의 모든 삶의 터전이었다. 먼지가 풀썩이는 땅에 검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그들의 일상은 시작된다. 소 방울 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은 옷 한 올 걸치지 않고 깔깔대며 뛰어 다닌다. 소의 오줌으로 손을 씻고, 말린 쇠똥으로 불쏘시개 삼아 밥을 지으며, 재는 작열하는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썬크림이 된다. 때론 소가 벗이 되고, 때론 소가 생명의 양식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하루 해가 저문다. 이 누어의 삶을 섬찟하도록 그려내는 인류학자가 있으니 그가 에반스-프릿챠드 (E. E. Evans-Pritchard)다. 그의 연구를 더듬어 1960년대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필름은 아프리카 누어 족의 일상이 지루할 정도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 누어 족에 유럽 문명의 총, 칼이 들어가고, 유일신의 이념인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나 살해의 잔악함이 재연된다. 유럽의 노예, 미국의 노예, 이제 문명이 만들어낸 이념의 노예가 되어 서로를 죽이고 있다. 나는 그 누어 족의 한 사람을 캘거리에서 만났다. 눈자위와 입술, 이빨을 제외하곤 온 통 검디 검은 국제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지리적 차이와 시간적 간극을 넘은 그 우연한 만남에 한 동안 내 인식의 수용능력을 다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는 우리의 막연한 동경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이 만났던 곳이고, 우리의 이념과 편견이 실험된 실험장이고, 새로운 생명이 담지되는 가능성의 장이다. 이런 인식의 원리를 시내 운은 이렇게 인용한다.
"아그레이는 부르짖는다
'자신의 피부 색갈을 자랑 스럽게 생각 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갈 자격이 없다' 고"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은 유럽과 북미가 전가한 검고 우울한 대륙이 아니라 흑인 자신들의 자기 의식의 표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프리카라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생명, 바로 검다는 것에 대한 재인식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검다는 것은 인위적 색깔이 아니라 차라리 무채색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색이 검은 색이며 자연의 흰 모래 위에서 검은 색은 찬란한 빛을 발한다. 문명이 만들어낸 언어적 기호인 인종차별의 언어, 흑과 백은 결코 아프리카를 규정하는 색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이라는 백인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희게 되려는 눈물나는 열등감의 투쟁. 그런데 아그레이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의 발언은 이보다 더 본질적인 아프리카의 생명의 기원과 가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4. 3연에서 2연의 성찰이 다시 교차되며 희망의 언어를 낳는다.
“검은 피부를
붉은 흙 먼지에
딩굴려 가며
기아와 분쟁의 소외된 땅에”
그렇다. 우리는 결코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아프리카의 시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항거는 미래를 향한 다짐이다. 노예, 식민, 착취라는 죽음의 문명 속에서도 살아남은 생명의 피. 이것은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내려운 생명의 유전이며 핏줄기이며, 이 생명에 가해진 폭력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인류의 진실을 안고
푸른 초원에
신의 빛과 향기를 발하기 위해
뜨거운 태양아래
몸 부림 치는
아프리카여 ! 순수함 이여 !
너의 검은 몸은 아름답다”
이러한 자각이야말로 아프리카가 담고 있는 메시지이며, 인류를 향한 전령사의 외침이기도 하다. 생명의 시원을 담고 있는 아프리카, 그 생명을 낳고, 키운 초원과 햇빛. 그 속에 생명 탄생과 양육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5. 관심은 공감을 일으키고, 공감은 인연의 다른 표현이다. 시내 운의 이 시는 아프리카에 대한 단순한 관심이 아니다. 이것은 인연이 빚어낸 관심이요, 아픈 공감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외침은 어쩌면 그의 생명의 일부를 아프리카에 둔 부모의 마음일 수 있고, 인류의 생명에 대한 믿음의 끈이 이어주는 소통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함께 공감하고 아파하지 않는다면 아프리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