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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ll/패티김 |
작성자 T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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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5128 |
작성일 2006-10-07 16:11 |
조회수 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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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 더 잔인한 게 없다는 말은 그리움보다 더
잔인한 게 없다는 말과 동의어다. 세월이 모든 걸 부숴뜨릴지라도 사랑의 심지로 박혀 있는 그리움은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랑도 영원히 불타고 있을 수만은 없다.
사랑은 시간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참된 광채를 획득한다.
-박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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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ll / 패티김
Till the moon
deserts the sky Till the all the seas run dry Till then I'll worship
you.
Till the tropic sun grows (turns) cold Till this young
world grows old My darling, I'll adore you.
***
You are
my reason to live All I own I would give Just to have you adore
me.
Till the rivers flow upstream Till lovers cease to
dream Till then I'm yours, be mine.
Till 푸른 밤하늘에 달빛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하것 Till 찬란한 태양이 그 빛을 잃어도 사랑은 영원한 것 오 그대의 품안에 안겨
속삭이던 사랑의 굳은 맹세 Till 강물이 흐르고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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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1938∼): 서울출생인 그의 본명은 '김혜자'
세계적 스탠더드 팝 가수 '패티 페이지'의 이름을 따서 '패티김'이라는 예명을 얻었다.
1959년 여고를
졸업하고 '사랑의 맹세'(Till)로 데뷔했다. 박춘석이 작사한 외국곡으로 원래는 Tom Jones가 불렀던 곡이다.
"틸(Till), 푸른 밤하늘에 달빛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한 것,
Till, 찬란한 태양이 그 빛을 잃어도 사랑은 영원한 것"
이라는 데뷔곡부터가 사랑 노래이다. 언제나 그의 노래는 사랑 그리고
이별의 상징 같은 존재다.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그리고 뉴욕 카네기홀에서 대중가요를 부른 첫 번째 한국인이다.
8·15 해방과 6·25 동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주둔하게 된 미 8군의 무대에서 활약 할 때에는 서양음악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보급하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가 스탠더드 팝의 '영원한 디바'(diva, 프리마돈나)라고 불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길옥윤(1927~1995)이 패티김의 음악적 동반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길옥윤은 대중음악의 작사가·작곡가 섹스폰 연주가인데 그 능력을 유감없이 보였다. 그는 1943년 경성치대에
다니다가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고, 광복 직후 그룹 '핫 팝'을 결성하여 연주활동을 해 왔다. 1966년 패티김이
'4월이 가면'을 취입하고 길옥윤과 결혼한 사건은 유명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 꿈속의 사람, 사월이 가면 떠나간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길옥윤의 작사·작곡과 패티김의 노래는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맞는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7년 계속됐지만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한 그들의 노래는 영원하다. 길옥윤은 서양음악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한국적
색깔을 가진 음악을 보급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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