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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문맹 1]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이 아니고, 절대적인 권위도 아닌 이유들을 밝힌다! |
작성자 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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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번호 12505 |
작성일 2019-11-19 11:21 |
조회수 21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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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앞으로 7-8회에 걸쳐 성서문맹퇴치에 대해 글을 올리려고 한다. 이미 씨엔드림 인터넷과 신문에 올린 글들을 수정하고 줄여서 올린다.
성서의 저자가 하느님이라면 하느님은
성서 원본을 남겼어야 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하느님이 쓴 책이라는 그 성서가
어디에서 발견되었으며, 어떻게 오늘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확실한 출처가 대단히 모호하다. 성서는 하느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 쓴 책이라고 우겨대는 성서근본주의자들의 축자영감설도
이해가 되는 이성적인 설명없이 단지 성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무작정 믿으라는 말도 설득력이 없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병적으로
세뇌되었다.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다! 원초적으로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책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책으로 쓰여졌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과
자연을 존중하는 성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책이다. 성서의 저자는 다른 세계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살았던 평범한 인간들이다. 물론 성서는 단번에 한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서 완성한 단행본이 아니다. 고대에 다양한 시대와 다른 지역들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성서 원본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원본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성서는 수많은 필사자들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 원본을 2천 년 전에 100-200년에 걸쳐 손으로 베낀 수많은 사본들 중에 극소수를 선택한 모음집이다.
인간이 최초로 글자를 발명하고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약 5천5백 년 전부터이다. 3천 년 전 구약 성서가 기록될 때와 2천 년 전 신약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통신수단은 대단히 원시적이었으며 오늘처럼 볼펜이나 종이에 기록하거나 컴퓨터로 기록을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오직 머리 속에 기억해
두는 것이 전부였다. 따라서 고대 사회의 저술형태는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가장 먼저 첫 번째
관찰과 깨달음이 있었으며, 이것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여과되고 첨가되어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떠돌아 다닐때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첫 번째 문서들(성서 원본)을 기록했다.
그리고 후대에 많은 필사자들은 원본들과 다른 사본들을 필사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하고 자신들의 주관적인 체험과 깨달음을 첨가했다. 이렇게 고대 사본들은 북아프리카와 중근동 지방과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수많은 필사가들에 의해 수백 년에 걸쳐 개정하고 수정하고
왜곡하고 편집해서 만들어졌다. 또한 이 사본들은 다양한 지역들로
흩어졌으며 지역에 따라 지방어들로 번역되었고, 번역판들은 또다시 다른 언어들로
번역된 것이 오늘의 영어 성경이고, 이것을 번역한 것이 한국어
성서이다. 지금도 전 세계 대학 도서관들과 박물관들에는 번역되지 않은 사본들이 무수히
많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서 기록에 사용된 고대 히브리어와 고대 그리스어는 현대어들에 비하여 극도로 제한적인 어휘들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문자적인 표현 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훨씬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문학형식이었다. 또한 성서 저자들은 역사적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였고, 삼층 세계관 속에서 지구가
얼마나 크고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아시아 대륙이나 한반도나 북미
대륙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고대인들은 천체학, 지질학, 생물학, 의학, 유전공학, 양자물리학이나 진화론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15세기에 갈릴레오와 코페루니쿠스가 지구는 돈다는 지동설을 발표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었으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성서저자들은 사람들이 질병이 걸리는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도 무지했으며, 생명의 기원이 우주에 있다는 천체학적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고대성서의 사본들 속에 깨달음의 참 인간이 되는 길과 예수의 정신인 우주적인
진리가 은유적으로 담겨있기 때문에 진실한 책이다.
기독교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책도 아니고 성전이나 동굴에서 단행본으로 발견된 책이
아니라, 3천 년 전부터 40여 명의 성서 저자들이 1천 년 동안 여러 지역과 시대적 상황에서 체험한 하느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은유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성서는 인류 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렇다고 성서가 역사책이라는 말이 아니다. 구약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가 변천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생존한 체험적인 이야기들이며, 신약 성서는 로마제국의 잔혹한
통치시대에 기독교 공동체들이 용감하게 예수의 정신에 따라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한 이야기들이다. 신구약 성서는 천여 년의 시대적 간격을 두고 발전한 두 공동체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느끼고 깨닫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느님의 실제(實際 Reality)를 인식하고,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낸 신앙 고백서이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 즉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인간의 작품이다. 인간의 작품으로서의 성서는 절대적인 계시가 아니라 많은 계시들 중에 하나이며, 인간이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하느님이 함께 있음’을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고대 성서의 율법들은 모든 시대와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라, 고대 팔레스타인의 신앙 공동체들의 주관적인 율법과 윤리적 가르침들이다. 성서는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을 위해 기록된 책이지 전 세계 인류가 반드시 믿어야 하는 유일한 경전이 아니다.
성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말도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의 영감은 성서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적으로 무시한체 하느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썼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이런 책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불러주는대로 받아썼다는 문자(소위 하느님의 말씀)를 믿기 보다는 하느님을 살아내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사람을 주목해야 한다. 성서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의미를 살아내는 삶의 비전과 방식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또한 하느님의 영감으로
썼다는 말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에 모순과 오류투성이다. 그러나 성서는 깨달음의 참 인간성과 하느님의 궁극적인 진리가 보이지 않게 담겨져 있기 때문에 진실한 책이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신약 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고대 성서 본문의 온전한 의미와 뉘앙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대 언어들을
이해해야 한다. 성서 원본을 수많은 필사자들이 수 백년 동안 베낀 수많은 사본들이 얼마나 정확한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고대어를 알지 못하는 대다수의 현대 기독교인들이 고대 성서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성서 원본의 히브리어 구약 성서 사본과 그리스어 신약
성서 사본을 라틴어와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한 현대 성서들도 원초적인 성서 본문의 뜻을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또한 축자영감설의 성서가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계시라면 하느님은 성서 원본을 보존했어야 하고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수준 높은 지적 능력이나 고대어를 배우지 않고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록했어야 한다. 고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어휘의 숫자가 대단히 제한적이어서 한 단어가 다양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대 문서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하느님이 영감을 불어넣어 오류가 하나도 없는 고대 성서 원본은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현대어로 번역된 성서가 문자적으로
오류가 하나도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성서 근본주의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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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궁금하고 의아하고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들이 많았는데 목사님의 칼럼을 통해 상당수 이해를 했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감사드리며 추천 누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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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들이 생각나네요.
마태복음 24장11~14절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요한계시록 22장 18~21절
18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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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거에 님처럼 성서근본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서를 저의 백과사전, 과학책과 역사책, 그리고 모든 문제의 해답집으로 믿었드랬습니다. 그러나 캐나다에 와서 맥긱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했습니다.
제가 자유게시판에 앞으로 계속해서 올리는 성서문맹퇴치의 글들을 읽으시면 성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올리고 있던 교회동창회의 글들도 읽으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 21세기에 2천-3천 년 전에 기록된 고대 성서를 새로운 렌즈로 새롭게 읽어야 성서가 진실한 책이 됩니다.
님께서 하루속히 성서문자주의에서 해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서와 예수를 해방시키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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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 하세요. 교회를 이야기하고, 성경을 이야기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파괴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실체를 알아서 올바른 신앙을 지켜 내시도록 몇 자 적습니다.
글의 순서는
1.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 요약
2. 종교다원사회(Multi-Religious World)에서의 성도의 삶
1.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
먼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을 여섯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적인 종교들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형성된 ‘구원의 길’이다. 각 종교인들은 각각 다른 길을 거쳐 구원을 받는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셋째, 각 종교의 배후에는 궁극적 신적 실재(Ultimate Divine Reality)가 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 힌두교 등은 인간이 각각의 문화 조건하에서 신적 실재를 그린 서로 다른 그림이다.
넷째, 각 종교는 자기의 고유한 것을 유지하면서 타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다섯째, 다른 종교를 자기가 믿는 종교의 잣대로 평가는 것은 잘못이다.
여섯째, 인간이 궁극의 신적실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종교의 가치는 경험에 있고, 그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 인간 역사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응하는 여부에 따라 ‘배타주의’(Exclusivism),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로 구분한다.
‘배타주의’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며, 그분 외에는 세상의 구원자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성경의 문자적 영감설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에 해당한다. ‘포용주의’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기정사실로 보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을 뜻하는데 타종교에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대화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크게 개신교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카톨릭의 노선, 이 범주에 적용될 수 있다.
세 번째로 ‘다원주의’는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를 동등한 선상에 두고서 상호 인정하고 협조하고 대화하는 태도이다. 배타주의와 포용주의는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을 넘어선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를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인간 반응으로 보며 모든 종교는 진지한 상호간의 대화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종교를 성숙 시켜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의 경험, 인간의 지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인간에게서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지 않으면 인간은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길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 신구약 정경 형성사와 본문비평 (textual criticism)은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성경의 어떤 부분들을 사람들의 고백 정도로 여기게 하는 학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이고, 유일한 구원자로 믿지 않는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죽은 것으로 끝났는데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인정하지 않고, 궁극의 신적 실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 이슬람, 힌두교등 타종교에서 바라보는 동일한 신적 실재라고 말한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과, 세상을 사랑하사 예수님은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종교 간의 대화와 연합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다. 영혼 소멸설을 주장한다. 이것은 현대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즉 절대적 가치를 무너뜨린 상대주의(Relativism), 절대 신을 부인하고, 신과 자연, 인간은 하나라는 범신론(pantheism)이 그들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화론을 믿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신사적이고, 타당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설교를 들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명백한 사탄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종교다원주의 영향을 받은 유럽과 북미의 교회들이 약화되고,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유일성이 필요하지 않는데, 다른 종교들에도 구원이 있다는데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사탄의 의도대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2. 종교다원사회(Multi-Religious World)에서의 성도의 삶
우리가 한 가지 인지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종교다원사회라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사상적 구별에서 오는 것이라면 종교다원사회는 기술적인 구별이다.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가 우리들의 사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1) 성경진리로 무장하라
은행에서는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교육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은행은 수많은 종류의 위조지폐들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위조지폐라고 알려준다고 한다. 또는 어떤 은행은 진짜 지폐를 계속 보고, 만지게 한다는 것이다. 일주일, 한 달 동안 진짜만 살펴보게 하는 것이다. 어떤 교육이 더 효과적일까? 후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위조지폐는 계속해서 만들어 지기 때문에 진짜지폐에 대한 지식과 감각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새로운 위조지폐도 찾아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사회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참 진리,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이단과 사이비, 종교다원주의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최소한 성경적 세계관의 틀이 되는 네 가지 주제는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바로 창조, 타락, 구속, 심판이다.
(1)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
(2)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타락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온 인류는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3)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셨던 메시야,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4)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때는 심판주로 오신다.
사도행전 3장 18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스데반, 베드로, 바울과 같은 신약의 인물들은 구약과 예수님의 연속성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구약에 정통한 사람인데 그가 예수님을 부활하신 분으로, 구원자로 인정하고 있다.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면 종교다원사회에서 비 진리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2) 십자가의 영성으로 살아가라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본질적인 기독교는 OK, 하지만 현실의 기독교는 NO라고 말한다. 이것은 한 측면에서 신자들의 삶에서 그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교회의 성장지상주의, 더 크게 더 크게 건축하는 교회, 교권주의, 비상식적이고, 타락한 교회지도자들의 모습, 복 받으라고 외치는 샤머니즘적 변질된 복음, 이기적인 성도들의 삶의 태도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고, 등을 돌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복음의 본질이 아닌 현실기독교의 보이는 모습에 상처받고,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필자도 교회 지도자로서 무한 책임을 느끼고,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얼굴을 뜨겁게 한다. 교회가 스스로 올바른 길로 가려고 하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있기에 밖에 버려져 밟히고 있는 현실이다.
하늘의 달은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반사하며 지구를 비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십자가 영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내가 죽어지고 예수가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사람관계가 쉽지 않다. 질투, 시기, 조롱, 왕따, 이유를 모르는 미움까지... 그 속에서 자기를 죽이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누가는 누가복음 6장 27,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성도들은 희생하고, 섬겨야한다. 쉽지 않지만 끝까지 참고, 끝까지 죽어져야한다. 또한 나누며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붙들어야 할 십자가 영성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들이며,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몸부림친다면 성령님은 새 힘 주셔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시고, 감
당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인간사랑, 자연사랑, 인류사랑을 외치지만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편협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것들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성도들을 통해서 더 차원 높게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두서 없는 글이지만 종교다원사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문헌: 서철원저 종교다원주의 외 다수 }
손승희목사
캘거리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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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rason 님
저는 댓글쓰면서 남의 글 문장들을 토씨하나 안 틀리고 옮겨다놓고 마치 자기가 다른 글들을 참고해서 쓴 것처럼 올린 것은 또 처음 봅니다.
불과 10 초 간 글 조직검사결과로도 이 글 몇 몇 문장들이 브니엘 신학교 최덕성 교수라는 분의 기고문 'WCC는 종교다원주의이단'에서 그대로 베껴 온 것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조용히 댓글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맨 뒤에 '참고문헌 모모외 다수 운운하는' 두리뭉수리한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사례 하나
"배타주의’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며, 그분 외에는 세상의 구원자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포용주의’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기정사실로 보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을 뜻한다." (최교수 기고문)
"배타주의’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으며, 그분 외에는 세상의 구원자가 없다고 보는 견해이다. 성경의 문자적 영감설을 믿는 복음주의 교회들이 이에 해당한다. ‘포용주의’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기정사실로 보면서 기독교 밖에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각을 뜻하는데 (ezrason 님의 댓글)
사례 둘
‘다원주의’는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를 동등한 선상에 두고서 상호 인정하고 협조하고 대화하는 태도이다. (최교수의 기고문)
‘다원주의’는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종교를 동등한 선상에 두고서 상호 인정하고 협조하고 대화하는 태도이다. (ezrason 님의 댓글)
삭제하지 않고 수정할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댓글 전문을 복사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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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문맹 2]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성서와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다!
21세기에 다원주의는 과학적으로 우주의 법칙이고, 신앙적으로 예수의 가르침이고, 성서적으로 성서의 핵심이고,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통합적인 공동의 삶의 길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다원주의는 138억 년 우주 역사의 자연적인 흐름이다. 이 주류를 역행하는 것은 자살행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사회와 지구촌에 대한 폭력과 테러행위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에게 상호문화주의 즉 다원주의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이단이나 악마가 아니라 천사의 모습이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의 길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는 모든 악의 뿌리이다’ 라고 하며(참고: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종교는 모든 것의 독소이다‘ 라고(참고: ‘신은 위대하지 않다’ God Is Not Great: How religion Poisons Everything) 기존 종교를 비판하는 그들의 가장 큰 이유는,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교회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우월주의는 21세기 과학시대에 큰 모순이고 몰상식한 행위이다. 이 이 두 학자는 지난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저서들에서 기존 종교들에 도전하는 메세지를 발표했다. [기독교가 만든 그런] ‘예수는 없다’고 한국기독교교회의 거듭남을 촉구한 종교학자 오강남 박사와 도킨스와 히친스는 무작정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교리적으로 만들어진 예수와 초자연적이고 유신론적이고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인 하나님은 이제 설득력과 효력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경고한 것이다. 100여년 전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내세주의의 기독교교회에 도전했던 것과 동일하다. 21세기에 기독교는 현대 예언자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캐나다는 오래 전부터 복합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실천해 왔다. 이제 캐나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 다시 말해, ‘다원주의’(Pluralism) 시대에 들어갔다. 다원주의는 여러 종교들이 진리와 구원에 대해서 각자의 고유한 신앙을 동등하게 서로 존중하며, 모든 종교들은 동일해야 한다든지 획일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캐나다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원주의에 따르면 나의 길 만이 유일한 길이 될 수 없고, 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들 보다 가장 우월하다고 억지주장을 늘어 놓을 수도 없다. 성서적으로 다원주의는 역사적 예수의 정신이다.
캐나다가 지향해온 복합문화주의는 다양한 문화들과 종교들과 전통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합문화주의의 약점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체들을 존중한다면서도 여전히 너는 너 이고 나는 나 라는 개체주의(Individualism)를 넘어서지 못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는 함께 산다고 하지만 이 땅에 이미 정착한 사람들과 새 이민자 사이에 문화적-경제적-정치적 갈등이 남아 있으며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복합문화주의가 넘어서야 할 장벽은 뉴톤의 세계관(Newtonian Worldview)이다. 즉 많은 개체의 부품들로 이루어진 시계처럼 잘 돌아갈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시계의 한 개체가 고장이 나면 그 개체를 제거해 버리고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하면 된다는 것이 뉴톤의 세계관이다. 모든 문화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복합문화주의이지만, 기득권을 갖인 문화가 연약한 문화를 희생시키지 않고 끝까지 돌보지 못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상호문화주의와 다원주의는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고, 너의 정신과 문화의 뿌리는 나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어느 한 개체의 문화와 종교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제거해 버릴 수 없고, 연약한 개체들이 건강해져야 전체가 건강해 질 수있다는 상호문화주의와 다원주의는 우주는 한 몸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세계관 (Einsteinian Worldview)을 기초로 한다. 한 개체를 희생시키고 전체가 건강할 수 없다. 즉 인류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호의존관계 속에 하나의 생명의 망(the Web of Life)을 이루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원초적으로 성서의 전체적인 사상은 개체주의가 아니다.
전 세계에 192개의 나라들이 있고, 캐나다에는 200개 이상의 민족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지구촌은 그다지 크지 않다. 마치 집 마당처럼 작아졌다. 하루 안에 세계 어느 곳에든 갈 수 있고, 세계는 하루의 문화권 안에 있다. 이제는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민족들의 경쟁과 전쟁의 시대는 끝이 났다. 나의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자신만을 보호함으로써 더 안전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부족주의는오늘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이런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트럼프와 한국의 황교안, 전광훈 그리고 일본의 아베와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단지 생존의 두려움과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내고 있을뿐이다.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공용하고, 종교들이 상호존중하고, 인종과 종교와 성적본능을 넘어서서 서로 결혼하고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도래했다. 민족의 정체성은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서 우주적(universal) 이어야 하며, 만인을 포용하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지난 1700년 인류 역사의 대부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교회 기독교의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와 제국주의로 인해서 동서양의 세계와 지구촌의 북반부와 남반부는 분리되었다. 따라서 오늘도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테러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빈부차이와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성적본능차별과 계급주의가 여전히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세계복음화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을 깨달아 참된 인간이 되는 길을 탐구하고, 사심없이 조건없는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갈릴리 해변을 걸었던 예수는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다원주의자 즉 상호문화주의자였으며, 이 예수가 가장 반대했던 것은 제국주의와 배타주의와 우월주의였다.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켜서 자신의 종교가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는 비상식적인 야욕을 버려야 한다. 이 헛된 꿈이 중단되지 않는 한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대신에 시기와 멸시와 불화와 분열과 전쟁과 테러 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불평등의 불의는 극심해질뿐이다.
기독교인들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인류역사의 발전에 많은 일들을 공헌한 것에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힌두교, 불교, 유대교, 원주민들의 종교들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해서 독특하게 공헌한 것을 감사하고 존경해야 한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것은 나의 신앙과 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과 종교를 존중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들을 존중하고 심층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나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나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는 길이다.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우월주의와 배타주의와 제국주의를 버리는 것이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 속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꿈이었고, 현대기독교인들의 새로운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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