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는 인간의 존엄성을 폄하하는 종교체제가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창작한 믿음체계의 이분법적 교리와 전통에 철저히 반대했다. 예수는 순종하고 복종하는 믿음이 있어야 하느님의 보호와 축복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짓과 은폐로 민중들이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탄식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괴상하게도 오늘 교회는 1세기에 예수가 그렇게도 처절하게 항거했던 내세적이고 유신론적이고 이분법적인 믿음체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이제는 더 이상 잘 되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만들어진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가까운 미래에 파산할 위기를 맞고 있다. 원초적으로 초대 교회는 그런 믿음체계를 계승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정신에서 태동했다. 예수는 종교적 교리와 제도를 창설하지 않았으며, 오직 참된 인간이 되어 사람답게 사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자신이 몸소 살아 내였다. 따라서 예수의 기독교는 ‘책(경전)의 종교’ 혹은 ‘교리적 믿음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되며 오로지 ‘현세적 삶의 종교’가 되어야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죽지 않는다. 오늘 교회가 급속도로 고령화되어 시들시들 죽어가는 가장 큰 원인은 원래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역사적 예수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교회가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예수를 신봉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다시 생기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은 내세적 구원의 믿음,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믿음을 아낌없이 폐기 처분하고, 예수가 실천한 개방된 밥상과 무상치유의 우주적이고 통합적인 현세적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 뿐이다. 이제 믿음에 대해서 그만 말하고,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예수가 탄생하기 전부터, 세계를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식민지들은 황제를 하느님의 아들(the Son of God), 구세주(the Saviour), 평화의 왕자(the Prince of Peace), 주님(the Lord)으로 숭배해야만 했다. 이 호칭들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누구도 이 호칭을 사용하면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역사적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들은 혹독한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황제의 호칭들을 모두 예수에게 부쳤다. 그렇다고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가 초자연적인 하느님으로 믿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한반도에서도 있었다. 외세들이 한반도를 수탈하고, 농민들이 빈곤과 질병으로 참담하게 살아갈 때에 봉기한 동학혁명의 정신은 경천애인이었다. 다시 말해,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하느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을 희생시키는 종교체제와 믿음체계는 생존의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에게 그런대로 통용이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불량신학과 믿음은 설득력과 신뢰를 잃고 무용지물이 되었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이란, 인간을 통제하고 탄압하고 멋대로 조정하는 성상의 자리에 앉은 존재가 아니다. 동학 혁명가들은 선언하기를, 배고픈 농민들이 먹어야 하는 밥(쌀)이 곧 하느님이라고 했다. 곧이어 시작된,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은 혹독한 식민지 생활을 하면서 일본제국의 황제를 하느님(천황)으로 강제적으로 섬겨야 했다. 이때에 한국민들이 일본제국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제국의 천황을 한국민의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었다. 원초적으로, 기독교가 탄생한 동기와 목적은, 예수를 천황이나 하느님(신성)으로 신봉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많은 교회들은 아직도 기독교는 예수를 천황으로 숭상하고, 세계를 소위 복음화(기독교화)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오직 한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빠져있다. 지구촌에 200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들과 그 보다 더 많은 다양한 언어들과 문화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 다원주의 상호복합문화 세계에서 이러한 부족적이고 이기적인 주장은 불가능하며 대단히 비상식적이고 몰상식한 행태이다. 예수는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른 종교들을 모두 말살하는 차별적인 배타주의와 우월주의를 가르치지 않았다.
21세기에 고대 성서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현대 기독교인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 성서의 이야기들이 각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가 하나님이고, 예수가 동정녀에서 탄생했고, 예수가 물 위를 걸었고, 예수가 몸으로 부활했다는 기록들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했으며, 이러한 기록들이 21세기의 기독교인인 내 자신과 불교인,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원주민, 무종교인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다시 말해, 성서에 기록된 기적들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다. 온 인류가 기독교 성서의 기적들을 인정해야 천당으로 올라가고 인정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분법적 믿음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말이 되지 못하고 심지어 왕따를 당하는 유치한 말로 인식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오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며 쇠퇴해가고 있는 원인을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솔직하게 반성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교리를 입술로 관념적으로 인정하는 것 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우주적인 정신이 21세기의 삶의 지혜가 되어 온 인류가 평등하게 정의롭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일이다. 오늘 우주진화 세계관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성서의 초자연적인 기적 이야기들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며, 상층의 하늘 밖 천당과 중간층의 인간세상과 하층의 지옥이라는 고대인들의 삼층세계관을 수용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더 큰 사랑과 특별한 보호와 축복을 내려 준다는 부족적이고 이분법적이고 이기적인 믿음은 예수가 철저히 반대했던 성전종교의 가식과 은폐의 행태였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컴퓨터 과학이 일상생활의 삶의 방식이 된 21세기의 지구촌은 하나의 생명의 망을 이루는 한 몸이다. 어느 한 개체를 무시하고 전체가 생존할 수 없다. 오늘 인류사회는 종교와 정치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진하는 용기와 새로운 물결에 대해 솔직하고 상식적이고 상호 관계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새로운 변화에 벌벌 떨며 옴짝달짝하지 않고 쾌쾌묵은 과거의 패러다임을 부등켜 안고 있는 편협하고 옹졸한 지도자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권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어떤 종교이든 교파이든 자신들 만이 진실하고 나머지 모두는 더러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믿음의 권위는 예수의 현세적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더욱이 사람들을 지옥행과 천당행으로 분리하는 이분법적 교회의 권위는 인류에게 절대적으로 불필요하다.
세상은 온갖 도전과 아우성과 고통과 실망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피부로 느끼고 직접 체험하고 있다. 오늘 기독교 교회는 온 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정직하고 상식적이고 용감한 지도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최성철,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