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론토 유니온 역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은 페어몬트 로얄 요크 호텔이다.
사진은 내가 4 년 전 쯤 찍은 건데,
프론트카운터 직원(중국계)이 ‘탁 트인 뷰’를 가진 룸을 찾기 위해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이 사진을 꺼내 보고서야 다시 깨닫게 됐다.
거의 모든 룸이 고층빌딩들에 가로막힌 뷰 였을텐데, ‘탁트인 시티뷰’를 달라는 나의 요청을 받은 직원은 한참동안 키보드를 두드려댔었다.
과거 CP 계열이었던 이 호텔은 원래부터 열차승객들을 위해 지은 숙소다.
역세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역과 연결되어 있다.
역에서는 밖으로 나갈 필요없이 지하 PATH를 통해 호텔로 도보이동이 가능하다.
1929 년에 오픈했으니 올해로 96 년 된 유서깊은 숙소다.
5성급이라 가격이 저렴하진 않지만, 오랜 기차여행 후에 우버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라 처음부터 이 호텔로 예약했다.
토론토 다운타운 4성급 호텔들은 가격이 전혀 4성급답지 않으므로 웬만하면 몇 십 불 더 주고 그냥 페어몬트로 가는 게 맘편하다.
UP Express도 가까워서 공항으로 이동하기도 편리하다.
스탠다드 킹사이즈는 방도 크지 않고 보기에도 평범하다.
요즘 변두리 모텔에도 다 있는 스마트 TV도 없다.
고풍스런 호텔이라 그런지 역시 고풍스러워 보이는 구형 LG TV가 침대앞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카핏와 메트리스가 고급이라는 건 걸어보고 누워보니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메니티는 르라보 ROSE 31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 숙소에서 가장 싸구려 방이긴 하지만,
역시 족보가 있는 싸구려 방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19 세기 말부터 20 세기 초에 지어진 페어몬트 호텔들 중에는 역사적 사연이 얽힌 영가가 떠 돈다는 (haunted) 소문이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토론토에 있는 페어몬트 로얄 요크 호텔도 그 중 하나다.
망설이다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 호텔을 예약할 때 나 혼자 중얼거린 말이 있었다.
I am feeling a ‘cosmic pull’ to the hotel (우주적인 기운이 나를 이 호텔로 이끌고 있구나..)
그래서 이 호텔에 숙박을 하게 된 것인데,
숙박 첫 날 밤 꿈을 꾸었다.
애들이 생일때 머리 위에 쓰는 금박지로 만든 왕관 같은 걸 쓴 웬 할머니가 몹시 화가난듯한 얼굴로 나타나 딱 두 마디를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내일 중으로 토론토를 떠나라. 곧 비행기가 뒤집혀 땅에 내릴 것이니..”
“그 두 명은 반드시 죽는다”
다음 날 아침 아침산책을 위해 로비로 내려갔다.
거리에는 거센 바람과 함께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토론토를 비롯한 온타리오 주 전역에 폭설경보가 발효중이었다.
산책을 포기하고 호텔로 다시 들어왔다.
엘리자베스 2 세 (2022 년 9 월 8 일 사망) 부부가 이 호텔에 2 박 3 일 동안 묵었던 모양인지 부부의 서명이 담긴 방명록이 한 쪽에 전시되어 있었다.
하긴 캐나다 각 도시의 페어몬트 호텔들에는 거의 예외없이 엘리자베스 2 세가 숙박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토론토를 상징하는 이 호텔이야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자베스 2 세란 3 년 전 한국 대통령 부부가 일으켰던 조문사기사건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그 여왕을 말한다. 생전에 기가 세기로 유명했던 여왕 귀신의 강력한 저주를 받았는지 그 사기꾼 부부는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젯밤 꿈에 나타난 왕관 쓴 할머니의 조언대로 하루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 비행기는 1 시간 30 분 간 출발이 지연됐는데, 폭설로 도로가 엉망이 된 바람에 퍼스트오피서(부기장)가 공항에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역대급 겨울폭풍이 밀어닥치기 수 시간 전에 토론토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배가 뒤집혔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비행기가 뒤집혔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구사일생의 위기를 겪은 델타항공 부상 승객들이 빨리 쾌유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