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또 이념 회오리 바람이 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당연한 예측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의 주목을 끄는 글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동국대에서 철학을 하는 홍윤기 교수의 글입니다. 이 분은 길지는 않지만, 황장엽 선생의 철학 사상을 배우려고 노력했고, 그 때 황선생을 만난 느낌을 글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홍교수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앞서 가는 분이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황선생이 북한을 떠나 정치적 망명을 떠난 후의 모습은 한국의 극우주의자들과 닮은꼴이어서, 저는 그 분의 사상을 배워 봐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규범적 관심" (normative concern)이야말로 지식에 이르게 하는 첩경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defectors가 전해주는 사회적 구성 (social construction)에 대한 접근법을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즉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북한의 탈북자들이 전해주는 북한의 실상이란 북한의 전체 그림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며, 이런 경험에 대한 증언과 기록이란 북한 방문자나 북한연구자들의 구성과 완전히 일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이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역사학도나 사회학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데 말씀이죠.
홍교수의 글을 읽고 난후 이런 저런 생각에 교보문고에 황장엽을 검색했더니 이 분의 책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의 회고록을 포함해서 말씀이죠. 앞으로 최소한 이분의 회고록 정도는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공주의와 북한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이라는 social constructio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이는 당연한 귀결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료수집에 늘 한계를 느낍니다. 한국에 있으면 바로 서점이나 도서관에 달려 갈 수 있을 터인데, 그래서 일주일이면 황선생의 책을 대략 섭렵할 수 있을 터인데 아쉬운 점이 많군요. 캐나다에 사는 이점은 영어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만큼의 단점이 있군요.
아래의 홍교수의 글은 황선생을 상당히 empathic하게 적고 있어서 황선생을 좋아하지 않은 분들은 불평을 하실 수 있는 기조입니다. 그래서 황선생을 알자고 일찍이 고민하신 분의 글이라서 황선생을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introduction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두 조직이 대립이나 갈등 관계에 있을 때, 한 쪽 조직을 떠나 다른 조직으로 넘어간 사람들에겐 즉 다시 말해서 defectors에겐 어쩌면 태생적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황선생처럼 말씀이죠.
황선생처럼 김일성 부자세습의 이론적 근거와 정당성 (legitimicy)를 제공했던 사람이, 그것도 노동당 비서를 했던 사람이 남한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으니 그가 이른바 민주세력보다는 반공을 국시로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날개밑으로 갔다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홍교수가 지적했듯이, 그의 민주적 이념은 많이 낡았고, 자유로운 사상적 날개를 달아 포스트 모던적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역으로 남한의 자유사상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그의 쓸쓸한 말로는 탈북자의 한계이고 또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합니다.
제가 아래의 글을 퍼올린 것은 황선생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며, 또 옹호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북한에서 평생을 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을 설파하던 고위직 공산주의자가 그것을 다버리고 정치적 망명을 택한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님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분이 세상을 떠났고,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적 사상가이자 정치적 이론가인 그 분을 남북이라는 분단된 경험을 하는 한국인으로서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극복해 나가야 것이기에 이해를 하자는 취집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프리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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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철학, 수령절대주의 아닌데 김일성 부자가..."
내가 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생과 철학'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9118&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
지난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기념을 맞아 평양에서 열병식이 진행되려던 무렵, 서울에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사망소식이 급히 타전됐다. 평소 황장엽 전 비서와 자주 만나 '인간중심철학' 토론모임을 가졌던 홍윤기 동국대 철학과 교수는 이 소식을 접한 직후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왔다. 홍 교수는 황 전 비서의 죽음을 계기로 철학가로서 또한 사상가로서의 '그의 생과 철학' 특히 '인간중심철학'에 대해 정리했다. <편집자말>
▲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2008년 9월 25일 서울 여의도 렉싱턴 호텔에서 열린 자유선진당 정책간담회에 참석,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 남소연 이회창 황장엽
"남한 형제들과 협력하여 북한 독재체제를 반드시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여 '5년'을 기약하고 결행한 '남행(南行)'이었다. 그러나 "북한 독재정권의 무장해제"나 "북한 통치자의 파멸" 같이 꼭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채 13년이 지났고, 정말 공교로운 날에 황장엽 선생은 돌아가셨다.
북에서 살았던 칠십 평생의 자기 삶 모두를 송두리째 압살한 그 세습 독재가 3대째 후계자를 사열대 위에 세워 열병식을 받도록 한 그 날, 그 시각 직전, 휴전선 지척에 있는 서울에서 지켜보는 이도, 지켜볼 사이도 없이 황장엽 선생은 홀로 고요히 타계하셨다. 아마 임종을 혼자 맞는 그 심정은 평소대로 평정스러우면서도 회환으로 출렁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선생의 죽음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바로 나 자신을 뼈아프게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만나서가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로, 지난 2002년 여름 무렵 전년도부터 거의 1년간 선생과 정기적으로 만나 진행했던 '인간중심철학' 토론 모임을 슬며시 끝낸 뒤 후일을 기약했음에도 거의 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탓이었다.
당시 그 모임을 같이 하던 '사회와 철학 연구회' 멤버들과 선생의 인간중심철학을 주제로 연구서를 내기로 했었다. 하지만 나만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뒤 나온 선생의 저작들을 두 차례에 걸쳐 전달받으면서도 나는 그 분의 집필물 궤적을 제 시간에 쫓아가지 못했다.
자기 철학을 가로채인 철학자의 공화국
그 분을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이 바로 어제 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로서는 그 분을 만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단지 선생이 주체사상의 창시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관심이라면 정치학자들의 정치공학적 분석으로도 충분하였다.
1997년 2월 선생이 일본 일정을 마무리하고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귀환하던 중 돌연 베이징의 주중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을 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북한 체제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영달과 명예를 이룬 분이 무슨 문제가 있어서 가족 하나 데려오지 않은 채 단신으로 '남조선'에 올까?
주석의 배려로 주체사상을 정립한 계관사상가, 북한 최고 권력자 김정일의 대학 스승, 북한 최고 권력자 집안과 바로 사돈관계에 있었다(선생의 장남 경모씨는 바로 오늘 후계자로서 북한군으로부터 첫 공식 사열을 받은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생질과 결혼했었다). 선생의 남행으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는 알아보지 않아도 분명할 것이다.
나는 선생이 대한민국에 와서 처음 단행본으로 간행한 당신의 회고록(<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한울, 1999. 2.) 초판1쇄를 거의 현미경 대고 보듯이 면밀하게 읽었었다.
다른 독자가 그 책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선생의 책 안에는 '나는 철학한다'고 자신을 생각하는 이라면 가슴 저리게 공감할 수 있는 절실함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항상 '나는 철학하는 사람', '나는 철학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자신이 있을 자리와 자기가 할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단순히 철학과 교수나 철학적 교양인이 아니라 어떤 장소나 인간을 앞에 놓고도 실제로 자신이 철학한 대로 살아야 한다고 자신을 교육시켜 왔으며, 또 그렇게 자기가 철학한 결과를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살았다.
다시 말해서 황장엽 선생은 주석이나 지도자 동지의 사상적 주문에 충실한 이데올로기 심부름꾼이나 계급 혁명가이기 이전에 스스로가 철학하는 사람이었다. 선생의 회고록 전면에는 이렇게 자기가 혼신을 다해 철학하여 창안한 주체사상을 최고 권력자에게 헌납하면서 느껴야 했던 모멸감과 권력자 앞에서 그것을 숨기면서 살아야 했던 안쓰러움이 절절이 흐른다.
자기의 사상과 글과 이름을 통째로 가로채였다는 것은 독자적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던 이로서는 견딜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김정일은 "수령관을 중심으로 하여 김정일을 내세우지 않고 내 개인의 철학 이론을 선전한 것이 잘못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라는 과업"을 당의 문서정리실에 주었다. 문제의 문건은 1996년 7월 26일에 김정일의 명의로 발표된 <주체철학은 독창적인 혁명철학이다>라는 문헌이었다.
이 문헌에서 선생은 주체철학이 본래 수령절대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 철학이라는 내용을 삽입해 모스크바 국제토론회에서 발표했는데, 이것이 당내에서 문제되면서 서서히 자신을 조여들었다고 술회했다.
즉 선생이 자기의 사상, 그것을 표현한 글, 그리고 자기 이름을 가로채인 것보다 더 견디지 못했던 것은 자기의 사상 자체가 수령중심주의로 왜곡되면서 체제의 실상을 기만하는 데 도용된다는 사실이었다.
선생은 여전히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어느 면에서는 대단히 고전적인 철학자였다. 이 점에서 선생의 수령과 그 수령의 후계자는 선생이 내심 감추고 있던 이런 철학적 신념과 철학자로서의 자기정체성에 대해서는 못내 무감각했던 셈이다.
선생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나는 선생이 북한에서 이룬 그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 남행을 택한 절실한 동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면에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고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 이름으로 나의 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의 자유 또는 철학함의 자유에의 열망이었다고 내심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한국 현대철학 최후의 사상가적 철학자
▲ 10월 10일 오전 생을 마감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남소연 황장엽
그러나 탈북자라는 지위를 감수하면서 이렇게 철학의 자유를 열망하면서 찾아든 대한민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과연 성공적이었는지는, 그리고 행복했는지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선생을 마주하면서 나는, 독일 관념론을 후광으로 짊어지고, 코민테른의 사상적 승리에 고무받아, 이 세계는 위대한 사상으로 개조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상가적 철학가를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 철학자라면 세계사가 흘러가는 거대한 추이를 유장하게 내다볼 수 있어야 하며, 당장 우리 앞에 닥친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정확하게 방향을 가리켜야 하고, 자기 자신과 주변의 중생들에게 개념과 확신을 제시해야 했다.
그 분은 여전히 세계관에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한 위대한 인생관을 따라 사회역사관을 피력했다. 그 분 주위에 둘러앉았던 '남조선'의 소장철학자들은 책에서만 봤고 새로이 해석해내기에 바빴던 그런 사상가적 철학가가 실제로 삶의 아픔을 온몸에 걺어진 채, 오직 철학하면서 당신의 거대한 사상적 비전을 시연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는 헤겔 시대의 베를린 대학과 소련 시대의 모스크바 대학 철학 세미나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철학을 배우던 시절에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내 사라진 고전적 사상가를 목격했다.
우리는 선생을 통해 본래 공산주의를 내걸었던 북한의 혁명세대가 수령절대주의를 중심으로 봉건적 계급주의로 사상적 퇴행을 거듭하면서 그것이 북한 인민의 삶에 어떤 파탄을 야기했는지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우파들이 남한판 독재를 위해 홍보했던 반공용 북한비판보다 훨씬 흉포했고 공포스러웠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북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생이 그 체제 안에서 구상하고 기대했던 것들이 그 체제 밖으로 나왔을 때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도 목격할 수 있었다.
선생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를 적절하게 개조했다고 생각하면서 그 유물론을 극복한 '인간중심철학'을 정립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있었던 우리는 이미 '인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해체되어 욕망 그 자체가 광적으로 엉키는 탈현대의 담론에 사상적 세례를 받아 인간중심주의에 간단하게 설득되지 않았다.
우리는 수령의 사회가 수백만에 달하는 인민을 기아에 빠트리고 수만 명의 정치범을 무고하게 척살하여 이미 붕괴 일보 직전에 있다는 선생의 전언을 진지하게 경청하였지만, 북한 체제 안에서 내려진 선생의 절박함이 체제 밖에서는 국제정치와 남한정세의 복잡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선생은 전세계가 북한의 존재를 혐오해도, 단지 혐오감만으로는 대북 정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주 기초적인 국제기회주의도 납득하기 곤란해하셨다.
북한 정권이 살아남지 못 하도록 경제적 재생의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북한의 체제권력 안에 포박된 북한인민에 접근하려면 북한 정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우회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안하지 못했다.
북한 정권이 자기들이 망할 자살적 전쟁은 절대 일으키지 못 한다는 점은 납득시켰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북한 정권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북한의 민주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방안은 언제나 애매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역사적 확신과 북한의 자생적 민주화의 전망
▲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지난 28일 열린 당대표자회에 참가한 모습이 북한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됐다. ⓒ 로이터=뉴시스 김정은
새로운 상황에서도 선생이 굴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사상적 노작들을 계속 쏟아낸 것은 아마 북한 체제 밖에서 자신이 부딪쳐야 했던 당혹스런 현실에서도 자신을 부여안는 필사적 자기항쟁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의 책들과 특히 북한 탈북자 동지들과 더불어 가다듬은 북한 민주화 전략에서 물론 표면에 가장 강조한 것은 남한 정부와 동포의 역할이다. 하지만 북한의 해방은커녕 남한으로 건너온 탈북자들에 대한 대한민국의 미숙한 처우와 단견에 대해서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섭섭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러면서 선생이 외세나 남조선의 도움이 아니라 북한 인민에 의한 북한 자생의 민주화를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나 이제 북한의 자생적 민주화는 물론, 국내외 여러 군데서 그렇게 바라는 이른바 '북한의 급변사태'에서 북한 충격을 완충시킬 유일한 유력자가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떨어진 것을 목격했다.
"민주 북한의 꿈은 갔는가?"
이례적으로 전세계에 중계된 평양의 사열식은 이 물음에 별로 희망적인 답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20년 전 나는 베를린에서 똑똑히 경험했다. 건국 40주년을 가장 화려하게 끝낸 한 독재 국가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단 하룻밤새에 사라지는 것을….
이제 이승의 일은 살아있는 자의 몫이 되었다.
돌아가신 분이 이제는 편안히 쉬시기를, 그 회한을 삭히시기를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동국대 철학과 교수입니다.
2010.10.11 09:43 ⓒ 2010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