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법륜스님 즉문즉설 모임에 갔습니다. 다운타운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들어갔다가 10분 정도 헤매다가 잘 조직된 자원봉사자들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6시 20분 정도에 홀에 들어간 것 같은데 400석이라고 하는 강당엔 이미 꽉차서 자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자리가 없어서 계단에 앉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캘거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에 놀랐습니다. 법륜 스님의 인지도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씨엔드림의 후원을 통해서 미리 홍보가 잘된 이유도 있겠지만, 교민들의 열의가 바로 그 이유일 것입니다.
제가 이 강연을 놓치지 않을려고 한 것은 "즉문즉설"이라는 아이디어가 굉장히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불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는 고원한 종교였다면, 구룡사등의 예에서 보듯이 불교가 대중 속으로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즉문즉설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투브에 나온 제목들에서 보듯이 사람들의 일상, 욕망, 좌절, 희망, 고통 등등의 구체적 질문에 법륜스님의 입답을 통해서 좌중이 울고 웃는 난장, 어제하신 스님의 표현을 빌면 "야단법석"의 대화의 향연이 펼쳐진 셈입니다.
검색해 보니, 법륜 스님은 조계종에 승적이 있는 분도 아니더군요. 어쩌면 제도권에서 보면, 법륜은 이단아라고 볼 수 있는 분입니다. 조계종이나 태고종같은 제도권적 조직이 아닌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분이 평신도 법륜이고 또 정토회라고 봅니다. 제가 아래 글에서 지적했듯이 정토회는 제도권이 아닌 하나의 사회운동(social movement)이라는 생각이 들구요. 약 3시간에 걸친 대화의 장에서 조계종 소속인 캘거리의 "서래사"를 한번도 언급하시지 않은 것을 보고, 저의 이러한 생각은 불교라는 측면에서는 "sectarian movement"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social movement"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여기 사족같은 것을 붙인 것은 저와 생각을 달리하는 분들이 지적해 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을 첨가한 것은 다소 의도적인 면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총 9명 또는 10명으로 기억하는데, 한분 외에는 사전 질문자들일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이것은 즉문즉설의 역동감이 떨어진 이유이기도 하구요. 사전 질문도 별로 걸려내지 못하고 기존의 질문들과 거의 오버렙된 듯 하구요. 질문의 내용은 나는 게으른데, 어쩌면 좋겠나? 연애실패했는데 조언달라. 50대의 여성으로 삶의 회의와 좌절을 느낀다. 'Spiritual' 한 면에 조언을 달라, 고부갈등, 딸이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스님의 유투브 강연 모두 봤는데 남편사망후 찾아온 마음의 아픔과 육체적 고통해결법, 새남자친구와 연애의 지속비결에 대한 것, 그리고 불교인 아내를 교회로 데려가는데 필요한 조언 등입니다. 저는 스님의 촌철살인같은 "즉설"과 농담(다소 거칠긴 했지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느낌이었고, 마치 공연이 펼쳐지듯 좌중이 하나되는 강당의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서툰 질문을 아름답고 깊이 있고, 의미있는 질문으로 만들어 가는 즉설은 법륜스님이 아니고서는 힘들 것입니다. 개떡같은 질문도 찰떡보다 더한 철학적 대답으로 나오니까요. 어떻게 저런 질문에 저렇게 깊은 답변이 나올까 하는 청중들의 감탄사를 몸으로 감지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신성한 "야단법석"의 장에 토를 달면 누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인기가 있는 분들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구요. 개신교의 장경동 목사도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불교 폄훼 발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포뮬라, 즉 "싸가지없는 장경동, 싸가지있는 법륜"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싸기지론"은 강준만교수가 유명한데 나중에 기회되면 한마디 하고 싶은 개념입니다.
그런데 질문자 중에 웃음거리가 된 간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의 질문에 저는 주목했습니다. 어쩌면, 제가 판단컨대, 질문 중에 가장 훌륭한 질문이었고, 이민자들이 경험하는 질문이었는데, 스님은 그 질문(사전질문)을 완전히 오해를 하셔서 동문서답을 하시는 것같았습니다. 질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간호학을 공부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에게 무엇인가 spiritual 한 말을 해서 위로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질문자는 이민 1.5세인 것같아서 한국말이 좀 짧아서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구요. 그런데 법륜스님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직 질문자는 깊이 있게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환자들에게 종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본인이 종교를 체험해서 그 종교가 좋은지 이야기 해 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여성은 무안만 당하다가 자리에 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질문자와 법륜스님간의 문화적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유럽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주류"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이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요즘 제도권 교회에서도 "religiosity"라는 말 대신에 "spirituality"말이 대세입니다. 보수복음주의 교회에서도 이 말을 빈번히 사용합니다. 사실, 이것들은 개념은 달라도 의미는 별로 다르지 않은데 요즘 사람들이 제도권을 싫어하다 보니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질문자는 "I am not religious but spiritual"의 문제를 물은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제가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에 직면한 환자에게 의미있는 말을 해야겠는데, 좀 spiritual 한 것이 없을까요?"라는 질문이었다는 것이죠.
사실, 이 질문은 법륜스님의 강연에 참석한 사람 모두에게 하는 질문일 수 있습니다. 절에 나가지도 않고 교회도 안나가는데 왜 법륜의 메시지를 듣고 싶은가요? 심리적인 문제는 심리학자나 요즘 인기있는 상담치료상담자도 많아서 상담 받으면 되는데, 삭발하고 승복입은 이른바 "제도적" 종교인의 메시지--법륜스님이 탈제도적 인물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안봅니다--에 왜 귀를 기울이는가요? 법륜스님의 강연 대부분은 불교사상을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을 기초로 해서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깨달음을 주는 형태가 법륜의 즉문즉설입니다. 서래사의 규모나 정토회모임의 규모를 비교해서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은 바로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무언인가 의미있는 메시지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 저는 봤습니다. 온 사람들 중에는 개신교도나 천주교도도 제법 있는 것 같았고, 당연히 종교가 없는 분들도 꽤 있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역설입니다. 나는 종교적이지 않은데, 삭발에 승복입은 종교적/제도적 인물에게 카리스마적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말씀입니다. 역시 메시지는 권위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 산다고 하지만, 권위에의 귀속은 시대를 넘어 영원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결국 영성의 제도화은 힘이 "쎄"다는 겁니다. 도통은 언제나 통하나 봅니다.
"스님, 연애를 어떻게 하면 잘 할까요?"
두손모아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