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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탄절은 예수선생께서 탄생하신 날이라고 합니다.
근데,,,,,, 조금 이상한 게 있습니다.
예수선생의image를 재창조해 기독교를 글로벌 상품으로 제작했던 바울은 이상하게도 그의 탄생 이야기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라는 인물의 역사적 행적에 대해 거의 관심을 표명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선생의 고향이라든가, 그가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골고다언덕 같은 곳에 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선생의 무덤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선생이 언제 어떻게 탄생했느냐 하는 문제가 바울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바울은 왜 예수선생의 탄생 이야기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재창조한 예수선생을 역사적 인물로서 전파할 의도가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예수선생의 아이디(출생증명서와 생활기록부) 부터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을텐데 전혀 그런 노력을 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직접 쓴 편지인 갈라디아서에서‘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도 3 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을 쓴 후대의 기록자는 갈라디아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을 만났다고 거짓말 기록을 한 셈입니다.
이제는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의하는 것이지만,,,,,,
바울시대에 예수의 동정녀 탄생 신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그런 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부활 이야기 역시 예수-바울 시대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데, 후대에 마치 부활 이야기가 원래 있었던 거처럼 이야기를 꾸며 놓은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지만 지금 부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예수선생 생신으로 그 주제를 제한하고 부활 이야기는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생일잔치에 와서 초상난 이야기하는 건 어울리지 않습니다.
싸르니아가 작년 성탄절 무렵에 ‘성서’를 열심히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습니다.
기독교경전 (일부 오만한 기독교인들이 신약이라고 부르는) 본문 중에 가끔 등장하는 “그 경위는 이러하니라~” 라는 문장을 조심해야겠구나,,, 하는 것 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스토리 두 개를 앞뒤가 맞도록 연결시키려 할 때 기독교경전에서는 항상 “그 경위는 이러하니라~” 라고 하는 접속문장이 삽입됩니다.
크리스마스니까 마태오복음을 예로들자면, 그 문서의 1 장 17 절과 18 절 사이에도 "그 경위는 이러하니라~" 라고 하는 수상쩍은 접속문장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마태오복음 1 장 1 절부터 17 절에서는 예수의 족보를 나열했습니다.누구는 누구를 낳고 누구는 누구를 낳고 계속 이어지다가 그 장 맨 마지막에 느닷없이 요셉의 아버지가 요셉을 낳은 게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고 써 놓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게 아니라 ‘며느리의 남편을 낳았다’니 이게 무슨 희안한 어법인가 !! 하고 순간적으로, 그리고 새삼스럽게 놀랐었습니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무렵 이 절을 읽으면서 싸르니아는 마태오복음 1 장부터 17 장을 쓴 사람이 예수선생께서 혼외 임신을 통해 탄생했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일 거라고 추정했습니다.
혼외 임신은 고대유대율법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당연히 비합법 임신인데, 비합법 임신이 동정녀 임신으로 둔갑하게 된 계기가 단순히 히브리어 ‘젊은 여자 (almah)’를 ‘그리스어 처녀(parthenos)’로 잘못 번역한 데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잘못 번역했다면 우연한 오역이 아니라 의도적인 오역이었을 것 입니다.
예수선생의 족보에 처지가 비슷비슷한 여인 세 사람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느닷없이 마리아라는 여자 이름만 족보 맨 마지막에 혼자 등장하면 어색하고 이상하니까 앞에다가 다말, 라합, 밧세바 등 세 여자를 일부러 끼워넣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번개처럼 함께 떠 올랐습니다.
(싸르니아는 혹시 천재가 아닐까요??)
공교롭게도 세 여자 모두 ‘비정상적 여인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섹스해서 임신하는 바람에 예수선생의 조상이 됐습니다. 라합은 거리의 여자 출신입니다. 밧세바는 남편이 소속된 군대의 통수권자인 킹 데이빗과 적절치 로멘스를 벌였습니다. 로멘스로 끝난 게 아니라, 밧세바의 남편이 죽임을 당하는 치정살인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싸르니아의 추측이 맞을 겁니다. 마태오복음의 필자는 '비합법적 임산부' 마리아에게 집중되는 독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세 여자를 족보에 함께 등장시켰을 것 입니다. (물론 제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불행한 처지’ 였던 세 여인을 등장시키는 것을 통해 낮은 처지로 강람하신 예수선생의 슬픈 image 를 감동적인 방향으로 극대화 시키는데 까지 성공했습니다. 불행함과 불쌍함을 위대함으로 멋지게 승화시킨 것 입니다. 마태오복음의 필자가 놀라운 예지력과 문학감각을 갖춘 타고난 대문호가 아니라면 이런 성공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18 절부터25 절까지는 앞의 1 장부터 17 절까지의 그 이상한 족보 이야기를 토대로 너무도 유명한 동정녀 탄생스토리가 이어집니다.
전혀 주제가 각각 다른 두 이야기, 즉 1 절부터 17 절까지의 족보 이야기와18 절부터 이어지는 동정녀탄생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 위해 18 절 부터의 이야기를 쓴 필자는 예의 다음과 같은 접속문장을 17절과 18 절 사이에 끼워 넣은 것 같습니다.
“그 경위는 이러하니라……”
이 접속문장 덕분에 오늘도 사람들은 예수선생의 조상 이야기와 탄생 이야기를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의 기독교를 각본-연출한 바울은 예수선생의 탄생스토리를 전혀 몰랐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예수선생의 탄생스토리를 몰랐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건, 어쨌건,,
싸르니아는 여전히 예수선생의 생신을 즐겁게 축하합니다.
중요한 것은,
Do not stay so blind.
그래야 여전히 성탄절을 즐겁게 측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해피 하누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