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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왜 무신론이 확산되고 있나?
작성자 늘봄     게시물번호 9120 작성일 2016-05-24 06:46 조회수 2880
근래에 무신론이 확산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현대과학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남으로 인식의 혁명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글을 몸학연구소(http://freeview.org)에서 퍼왔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초자연주의를 신봉하던 신앙을 버리고, 자연주의를 더 친밀하게 이해하고 이것을 실천하면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과 종교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도 역사적 예수를 나의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삽니다. 초자연적인 신을 이분법적으로 숭배하는 보상심리의 종교는 저에게 그다지 삶의 힘과 지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가 오랜 세월동안 사용해 왔던 신앙과 언어들을 새롭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신론이나 무신론 어느 한 쪽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유신론자가 무신론자를 정죄할 필요도 없고, 무신론자가 유신론자를 비아냥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처럼 믿지않으면 징벌과 지옥을 면치 못한다는 위협은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또한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적 신자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해서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함을 환영하는 가정과사회와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의미이고 책임입니다.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1.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의 구분

저는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를 사실로서 믿지 않으며 이 점엔 대해선 비판적인 입장입니다(물론 문학을 비롯해 예술로서 의미를 향유하는 건 적극 찬성). 여기서는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naturalism 그리고 <신비주의>mysticism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한 구분을 해보고자 합니다.

<초자연주의>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과학>과 결코 양립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신비주의>는 자연과학과 양립 가능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양자는 다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그 점에선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도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는 자연을 벗어난 초자연적 실체나 원인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러한 초자연적 원인이나 존재가 간헐적이라도 자연의 인과적 빕칙을 깨고서 자연 속에 개입할 수 있다고 보는 사조를 의미합니다.

만일 과학이 <초자연주의>를 인정한다고 할 경우, 그 어떤 사건에 대한 해명에 있어 그 원인적 설명을 초자연적인 원인이나 존재로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과학적 설명 자체를 아예 봉쇄시키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연세계가 존재하는 가장 궁극적인 원인, 그러니까 적어도 <제1원인>의 자리는 결국 초자연적 존재에게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와 달리 <자연주의>naturalism는 자연 속에서 얼마든지 자연에 대한 설명과 그 근거들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기에 이것은 자연과학의 탐구 방식에 적합한 사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이라는 학문 영역은 근본적으로 <초자연주의>에 기초되어 있지 않다고 봐야하며, 과학이 과학으로서 자리매김 되려면 과학이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는 서로 결코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일 초자연주의를 인정해버리면 자연주의는 그저 초자연주의에 대한 보조 역할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핵심 본질은 어디까지나 초자연주의에 있을 뿐이죠. 자연의 질서의 최종 원인자의 자리는 결국 <초자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니까요.

만일 기존의 보수 혹은 복음주의 기독교가 주장하는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처럼 자연의 인과적 질서의 궁극적 원인을 결국은 신 존재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근본적으로 해명 불가능한 원인에 둔다고 한다면, 자연의 인과적 질서를 탐구하는 일은 그런 초자연적 존재(혹은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믿음 신앙으로만 귀결될 것이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연의 인과적 질서를 곧바로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비행기의 발명으로 확인된 하늘을 날겠다는 믿음도 결국엔 그것이 가능한 자연의 인과적 질서들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함께 포함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가 제임스 랜드(James Randi) 같은 이들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혹세무민하는 주술과 마법을 마치 사실인냥 호도하는 이들을 신랄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런 주술적인 연출에 잘 속는 이들이 주로 초자연주의를 사실로서 믿는 사람들(여기엔 종교인들이 많겠죠)인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 제임스 랜디 동영상 참조 링크)
https://youtu.be/nkVEbqThODc

2. 자연과학의 <합리주의>와 <신비주의>

어떤 면에서 과학의 합리주의는 신비주의와 동전의 양면일 뿐입니다. 이제는 이 점에 대해 다시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일단은 <과학 이전의 시대>와 <과학 이후의 시대>를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적어도 이 점에서 가능하면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합리주의>를 보다 명확하게 구분해 볼 것을 제안해보는 것입니다.

① 과학 이전 -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가 미분화된 혼재 상태

② 과학 시대 - 근대 자연주의 과학의 등장으로 초자연주의 믿음과는 충돌함

③ 과학 이후 - 자연주의적 과학과 신비주의 요소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 가능함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신비주의>mysticism는 고대로부터 현대에까지 있어온 것이지만, 이것은 과학의 온갖 합리적 해명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모름과 물음의 영역들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초자연주의와는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합리적 신비주의>라고도 명명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선 다음의 언급도 덧붙여 두는 바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합리주의>rationalism는 신비주의와 동전의 양면에 해당한다고 했을 때, 쉽게 말해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차원의 <신비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우리가 성취하지 못한 <미지의 합리주의>인 것이며, 그나마 우리가 성취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합리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 <노출된 신비주의>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신비는 늘 해명을 기다린다. 그것은 인간에 내재한 근원적 호기심과 설명 욕구에 기인할 것이다. "

따라서 신비를 신비로만 남겨두려는 것도 신비에 대한 반역이자, 인간 지성의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합리적 해명을 열망합니다.

다만 인간의 합리적 분석 이후에도 항상 이를 빠져나가는 미완의 모호성 또한 여전히 남아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과학지상주의적 태도 역시 온당치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신비는 도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과학이 <자연주의>를 채택하는 것은, <신비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초자연주의>를 제거하면서 이를 합리적 해명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 시대로의 전환 및 과학의 형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신비는 여전히 남습니다. 다만 초자연주의적 요소들은 현대에선 상상적인 판타지 문학에서나 유용하게 써먹을 순 있어도 이를 현대인들의 지성의 신념으로 지니기엔 매우 불통스런 요인만 될 뿐입니다.

만일 과학의 세계관이 초자연주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결국은 과학 자체를 훼손시키게 된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가 과학과 지성적 소통이 가능하고자 한다면 결국 <합리적 신비주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성격의 종교들은,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는 지성과도 충돌만 일으키는 매우 불통스런 영역으로 그리고 폐쇄적 믿음의 자족적인 그룹들로만 남게 될 것인데, 이는 분명한 종교 퇴행의 징후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과학의 합리주의라는 것도 적어도 이전보다 더 나은 경험으로서의 시행착오와 관련된 <상대적 의미의 합리주의>인 거지 불변적인 <절대적 의미의 합리주의>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는 과학의 전개와 역사에서도 보듯이 항상 모험과 진화의 과정에 있는 일종의 <실험 합리주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으로 봅니다.

3.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의 구분
- 궁극적 원인을 초자연에 두는 입장과 인식 한계 너머의 경험까지 인정하는 입장의 차이


물론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에 대해 써놓은 기존 백과사전 개념 정의에선 이러한 구분들이 모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적어도 지금까지 축적된 과학적 성과들의 충돌 여부가 관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자연의 사건을 놓고 그 궁극적인 결정적 원인을 초자연적 실체(혹은 존재)에 둔다면 초자연주의 사조인 것이며 이는 과학의 자연주의와는 충돌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병에 걸린 궁극적 원인이 세균이나 바이러스라는 걸 부정하고 마귀나 귀신이 들려서 그렇다고 보는 것이나, 신이 죽은 사람도 살아날 수 있게 한다면서 시체를 모셔놓고 기도하는 사례 등등 이런 경우들이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비주의는 과학과 충돌하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인식 밖의 영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관련해서는 불가지주의에 더 가까운 사조입니다. 신비주의(mysticism)의 어원 자체가 그러합니다.

mystery는 어원적으로 고대 그리스어인 μυστήριον(무스테이온)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눈을 감거나 입을 닫는다’는 의미인데, 쉽게 말해 <감각에 대한 차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신비>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도 입으로도 형언하기 힘든 영역이자 그러한 성격의 것에 해당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주술적인 마법 같은 것이 신비에 속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선 이미 동서양의 신비사상을 정리한 바 있는 월터 스테이스(Walter T. Stace) 교수에 따르면, 신비사상이 아닌 것으로 주술적인 것, 심령 현상, 투시력 등 이러한 것들은 신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감각 측정 인지를 벗어나 근본적으로 정의내리기 힘든 영역을 의미할 뿐이라는 거죠.

바로 이 점에서 저의 입장은 <세계 안의 합리주의>를 <노출된 신비주의>로 보는 것이고, 그리고 <세계 너머의 신비주의>를 <미지의 합리주의>로 보는 가운데 양자를 본질상 연결된 하나로서 본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둘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라기보다 동전의 양면처럼 유한자인 인간은 적어도 그때까지의 유한한 세계가 성취해놓은 최선의 합리적 방식들(여기엔 과학의 설명들도 포함 가능)로서 무한의 신비를 기술(description)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거죠.

물론 그것이 세계 안에 언표된다면 그때의 그것들은 더 이상 신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신비 자체는 항상 저 너머의 요소들을 지칭하는 것일테지만 그것이 진화하는 이 현실세계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있어서는 저 너머의 것들도 결국은 합리주의라는 제약된 기술(description)로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지점도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끝으로 영어에서 paranormal 이라는 용어도 있는데 이는 문맥과 맥락에 따라 초자연도 신비도 모두 지칭할 수 있기도 합니다. 적어도 normal 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한 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늘상 말씀드리는 것 중의 하나는,

종교도 진화하지 않으면 퇴행하거나 소멸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인간의 의식이 성장하는 만큼 신에 대한 신앙 혹은 무신론에 대한 이해도 깊고 넓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신관도 마찬가지로 진화할 것으로 봅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들만 천국에 들여보내고 안믿으면 지옥 심판하겠다는 그런 신은 없습니다. 현재로선 신의 자격으로도 함량 미달일 뿐입니다. 이러한 대전환기에서 종교 역시 진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순간의 선택이 지구 문명의 미래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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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아프리카  |  2016-05-2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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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봄님, 글은 잘 읽었는데요. 제가 볼 때, 늘봄님은 종교에 대한 이해보다는 늘봄님의 신학적 입장이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늘봄님이 성서를 은유적으로 봐야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늘봄님은 은유의 신학보다는 과학적 환원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문자주의자”로 보이구요. 위의 글을 보면, 전혀 종교와 상관이 없는 늘봄님의 신학적 speculation이라는 생각이 들고, 종교현상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이것이 방해되질 않나 생각합니다.

종교와 과학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문제입니다. 종교적 이야기가 허구적일 수도 있고,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과학적 사실을 엮어서 만든 것일 수도 있지만, 그 행간을 엮어 나가는 이야기 꾸미기 능력은 진화된 인간이 갖는 특성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종교에 빠지는 것은 종교가 지시하는 과학적 지식이 위대하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고리를 하나 하나 엮어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가 “신화”(myth)가 되어서 그것이 자신의 삶에 “의미있는”(meaningful) 차원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천국이나 지옥같은 것 안믿고, 기독교근본주의 신앙 따위는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보지만, 그 근본주의 신앙 속에서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인간의 힘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지질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지질학의 지형을 따라서 우리의 삶의 경험을 엮어서 나온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교과서를 읽기보다는 소설을 더 읽기를 좋아하고, 다큐보다는 영화보기를 더 좋아 합니다. 저는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마지막회만 일부러 안봤지만, 사람들은 태양의 후예의 이야기를 원하지 거기 나온 휴대전화가 터진다고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통적 기독교도 잘 진화해 왔거든요! 진보교회는 스토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스토리가 없는 종교는 그닥 힘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감히 판단컨대, 늘봄님은 새로운 문자주의자(new literalist)입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

내사랑아프리카  |  2016-05-2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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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테제는 별로 신빙성이 없어 댓글 안답니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인문사회과학자 치고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종교연구의 태도로서 “방법론적 무신론”(methodological atheism)을 제창했습니다. 이것은 신을 믿는 종교가 있다 하더라도 신의 존재 유무는 사회과학적 연구의 출발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교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는 이 말이 좀 쎄다고 해서 “방법론적 불가지론”(mythological agnosticism)을 제안하였습니다.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신의 존재 연구는 괄호를 치고(판단을 중지하고) 종교를 연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인문사회과학은 그냥 그런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표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이 말에는 불교의 열반사상이나 힌두교의 연기론의 실재도 포함한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불교도의 주장이고, 힌두교에서 아트만이 있고, 윤회가 있고, 그래서 연기법은 실재하다고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신의 존재유무, 삼사라의 유무, 니르바나의 유무에는 종교 연구와 상관이 없고 그러한 특정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의 주장에 만 관심을 기울이면 됩니다.

종교를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이 무신론자든, 싸이언톨로지 소속이든, 몰몬교도든, 불가지론자든, 힌두교도든, 불교도든 누구나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학을 안해서 박근혜같은 무지막지한 정치를 비판하지 못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 못하듯, 종교 역시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평신도든, 종교에 관심이 없든 누구든지 진술할 수 있습니다.

“신없는 종교가 가능하다.” 이 말 자체가 웃기는 이야깁니다. 이것은 비교종교학 개론 ABC입니다. 종교현상은 일신론, 무신론, 단일신론, 일원론 등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없는 종교는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신없는 종교는 분명히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특정 종교적 세계관이 그러한 종교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체계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의미체계가 “의미있는”(meaningful) 한 그 종교는 살고, 그렇지 않은 이상 그런 종교는 사라져 버립니다. 별들이 생성되고 죽듯이, 종교도 생성, 발전, 소멸 또는 변형의 길을 걷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서로의 만남이 meaningful하면 지속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이죠. 세계종교들은 시간의 테스트(test of time)를 거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오래 갈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런 종교적 지형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6-05-2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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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윗 글은 퍼오신 글이었군요. 그러면 글쓴이의 이름이나 아디는 있을텐데요.

어쨌든, 늘봄님의 위의 스케치 글을 보면, 1960년대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재현되는 듯하는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무신론이든, 무신론적 기독교든 앞으로도 계속 간헐적으로 등장할 것이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1960년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현상의 prototype입니다. 그 땐 정말 상상력의 "해방기" 그리고 "해방구"였거든요.

watchdog  |  2016-05-2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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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소리지만, 전 다른 신은 하나도 안 믿지만 밥신을 믿습니다. 직접 밥신을 체험한 적이 있거든요. 무슨 검사한다고 밥을 3끼 굶었더니 머리가 핑 돌면서 죽을 것 같더란 말이죠.

예전에 신앙심이 깊은 친구가 저에게 한 번은 "형,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야" 라고 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 근데 밥 못 먹으면 죽는 건 확실해."

Foodist religion을 가진 사람으로써 저는 일요일에 맛있는 요리를 하고, 바이블 대신 cookbook을 읽으며, 요즘은 가드닝을 하면서 식구들과 먹을 야채들을 키웁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6-05-2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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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지만, 모든 개념은 배타적 의미를 갖고 있어야 제대로 기능합니다. 와치독님의 밥은 종교는 아니고 그냥 밥입니다. ㅋ

늘봄  |  2016-05-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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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dog 님의 '사는 이야기'를 들으니 신선함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소위 종교인들은 '믿는 이야기'를 '사는 이야기'로 전환해야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건강해집니다. 워치독 님의 이야기처럼 천도교 선구자들은 베짜는 여인, 어린이, 음식, 등등 삼라만상을 한울님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어느 신학자는 '밥은 하느님이다' 고 고백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숨쉬고 생각하고 말하는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이 하느님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이야기'입니다.

내사랑아프리카  |  2016-05-24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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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한, "밥은 하늘이다"는 것은 시인 김지하의 시에서 나온 것이고, 한국에서 저도 많이 불렀던 노래죠. 아마 그 일본신학자도 김지하 시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MaQiaSGFFo

시인 김지하는 민중신학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나중에 이상하게 또라이 짓 하는 것으로 변했지만요. 신학의 안테나 서남동 선생께서 외국의 어느 모임에 참석했는데, 다들 김지하를 거론하고 서양인들이 김지하의 시를 영어로 음송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한국에 돌아 온 후 부랴부랴 김지하의 시를 읽기 시작했고, 민중신학적 작업을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밥상 공동체"라는 말은 박재순 선생이 처음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제가 알고 있는 한, 박봉랑 선생 지도하에 신학석사논문으로 칼 바르트의 의인론(justification)을 썼고, 박사논문으로 본회퍼의 비종교화에 대해서 썼습니다. 이 "비종교화" 개념은 신학적 개념이라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밥상 공동체가 지시하듯, 밥 역시 사회적인 것이며, 그 밥을 나누는 것은 좋은 종교적 주제가 될 수 있죠. 종교는 하느님의 은유나 상징일 수도 있고, 인간 생존에 대한 것일 수 있죠.

민중신학의 신학적 작업이 일전에 부족하다고 어떤 글도 퍼오시고 또 주장하셨는데, 민중신학은 종교의 사회성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에서 가장 멋진 신학 작업을 했죠. 그런 면에서 그 몸연구소사람들보다 훨 앞서 있다고 보구요. 집에서 밥먹는 것보다 나눔의 사회적인 밥은 중요하며, 공동체로서의 종교에서 밥의 신화, 상징, 의례는 어떤 형태든 기본입니다. 민중신학의 한계는 바로 종교 중에서 의례화가 매우 약했습니다. 민중신학은 상황신학이었고, 그 시대에 제대로 응답한 한국적 신학이라는 면에서 그 역사적 내용만 보더라도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천도교사상이나 김용복 선생의 민중의 사회 전기, 서남동 선생의 두이야기의 합류, 안명무 선생의 오클로스의 발견 등등 주옥같은 사상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죠.

동학에 대해서는 제 친구가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의 신관의 변화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손병희 때 와서 지나치게 초월적 신관보다 내재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죽 추적하지 못했지만, 그런 신관의 내재화로 초기의 동학운동의 활력을 잃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천도교 본부를 저는 두 번 방문해서 초기 자료를 많이 복사본으로 사왔었는데, 천도교 지금은 별로 한국사회에서 역할을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원불교와 비교해서 그 갈림길을 비교해도 좋을 것 같군요.

* 막 퍼오고 막 섞어도 좋지만, 각각의 운동이 갖는 역사적 맥락과 다름과 같음을 깊이 성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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