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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핍박과 교회의 승리_6 (간략한 기독교 역사)
2세기 후반에 교회는 잠시 평화의 시기를 누렸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은 야만족의 침입에 대항하다 보니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세기에 들어서서 상황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로마 제국 내에서의 내전과 야만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은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셉티미우스 황제(Septimius Severus)는 ‘종교 통일 정책’을 사용했다.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태양신을 섬기라고 요구했을 때, 유대인과 기독교인만이 종교혼합정책을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두 종교에 대하여 박해하기 시작했다. 203년에 일어난 퍼페투아(Perpetua)에 대한 박해가 유명하다. 그녀가 체포되었을 때, 아버지는 신앙을 포기해서 목숨을 보존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만물이 각자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은 의미 없는 것처럼, 그녀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이 이름을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원형경기장에서 황소에 받혀서 넘어졌을 때,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묶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흐트러진 머리는 애통함을 상징하는데, 순교하는 오늘은 기쁜 날이기 때문에 머리를 묶어야 한다고 요청한 것이다. 결국 군인의 칼에 순교했다. 데시우스(Decius) 황제 때에 교회는 또 다른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심각한 경제적 위기 가운데 황제가 된 데시우스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의 회복’을 정책으로 삼았다. 그래서, 로마의 신에게 예배하지 않는 사람을 반역자로 여겼다. 이때의 박해는 순교자를 만들어 내는 정책이 아니라 배교자(背敎子, apostate)를 만들어내는 정책 때문에 발생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 순교하는 것에 대하여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의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이런 로마제국의 종교정책과 순교를 준비하지 못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으로 인해서 교회 안에는 “신앙고백자”와 “배교자”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데시우스 박해로 말미암아 박해가 끝난 후에, 교회 안에서는 ‘배교자’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마치 한국교회가 해방 후에 일제의 신사참배의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데시우스 박해 이후로 배교자를 처리하는 문제는 서방교회 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4세기가 되었을 때, 교회는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심각한 박해를 만나게 되었다. 4세기 당시에 로마 제국은 4부분으로 나누어져서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막시미안(Maximian), 갈레리우스(Galerius),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Constantinus Chlorus)가 각각 지배하고 있었다. 4사람 가운데 갈레리우스 만이 기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 295년에 얼마의 기독교인들이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갈레리우스는 이것을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하고 군대에서 기독교인을 추방하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안을 설득하여 303년에 로마 제국 안에서 모든 책임의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쫓아내고 교회 건물과 책을 모두 없애 버렸다. 처음에는 순교자가 없었지만, 점차 상황이 악화되어 순교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를 잡아 들이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하였다. 결국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최고의 권력자가 되기를 원했던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하여 끊임없는 박해를 시행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질병이 생겨나게 되었을 때, 이것은 기독교에 대하여 대항한 갈레리우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 되어서 311년 4월 30에 기독교 박해에 대한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으로 인해서 기독교를 향한 로마제국의 박해는 끝나게 되었고, 감옥문이 열리게 되었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5일 후에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아직 박해는 완전하게 끝나지 않았다. 리시니우스(Licinius), 맥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 콘스탄틴(Constantine), 그리고 막센티우스(Maxentius)의 지배로 로마제국은 갈라져 있었다. 맥시미누스 다이아 만이 기독교를 박해했다. 콘스탄틴이 골(Gaul) 지방(지금의 프랑스 지역)의 군사들을 모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막센티우스의 본거지인 로마로 진격해 갔다. 콘스탄틴이 진격하기 전날 해질 무렵 “호크 시그노 빈세스(Hoc Signo Vinces)”라는 글자와 함께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다. 이 글자의 뜻은 “이 표적으로 너는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병사들의 방패 위에 상징을 새기고 싸움에 나가서 결국 승리를 하였다. 313년에 콘스탄틴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가 끝났다고 선포하였다. 결국 콘스탄틴은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모든 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십자가를 앞세운 콘스탄틴의 승리와 기나긴 박해가 끝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 들게 되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2/18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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