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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황제_간략한 기독교 역사 7
글 : 캘거리 성결교회 한호 목사 1000년이 넘도록 기독교에서 기억되는 인물이 ‘콘스탄틴’이라는 황제이다. 그의 영향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새로운 단계와 모습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로마의 옛 영광을 복원시키고자 꿈꾸었다. 이전의 황제들인 데시우스와 디오클레티안과의 다른 차이점은 그들은 이교의 복구를 통해 그 목적을 이루려 했던 데 반해, 콘스탄틴은 기독교 토대 위에서 이를 성취시키고자 했다는 점이다. 콘스탄틴의 회심에 대한 정확한 성격을 두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콘스탄틴의 회심, 혹은 개종은 다른 기독교 신자들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을 거쳐 교회의 가르침을 학습하고 터득하여 이것이 생활 속에서 나타날 때에만 세례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신앙을 생활의 전 영역에서 수행하고자 할 때에는 다름 아닌 감독들이 안내자가 되고 목자가 되었다. 콘스탄틴의 경우는 이와 매우 달랐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는 기독교 교사들이나 감독들의 통솔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기독교 신자들은 황제의 시종들의 일부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자기의 신앙 생활을 독자적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감독들 중의 감독”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교회 생활에 간섭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또한 그의 개종한 후에도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참여할 수 없는 이교도인의 제사에 참석하였으며, 감독 중에 아무도 이를 정죄한 이가 없었다. 그 이유는 황제가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그가 기독교를 선호하는 정책을 수행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능력을 항상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외형상으로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임종 시에야 세례를 받았다. 따라서 그가 행동으로 나타낸 기독교를 선호하는 정책이나 칙령들은 기독교에 우호적, 혹은 호감을 가진 인물의 행동에 불과하며, 신앙적 결단을 내린 신자의 행동으로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물은 비록 교회의 충고나 후원까지도 받을 수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감독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모호한 상황이 그의 임종시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진실로 믿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해가 곧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기독교 신자들의 경험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 하나님은 그가 신자들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한 그를 도울 매우 강력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콘스탄틴은 그의 정치 생애 대부분을 통하여 정복되지 않은 태양과 기독교 하나님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또한, 그는 역사상에 영원히 남을 ‘새로운 로마’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콘스탄틴의 도시’를 의미하는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이름하고자 하였다. 이 곳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다리가 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수도를 마련한 콘스탄틴의 결정은 매우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후 얼마 안되어 로마시를 포함한 제국의 서방 영토가 야만족들에게 점령되기 때문이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이 천년 이상 로마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 수도가 옛날 ‘비잔티움’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동로마 제국”은 또한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리워졌다. 콘스탄티노플의 설립은 “새로운 로마”를 건설한다는 발상 자체가 대부분 이교도들로 이루어져 있던 옛 로마의 귀족 집안들이 갖고 있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다. 또한 새로운 수도를 치장하기 위해 이방종교 신전들로부터 각종 조각들과 장식품들을 몰수해왔으므로 이는 이방종교를 보다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새롭고 장려한 교회당들의 건물은 이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틴은 거의 그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이방종교의 대사제로서 기능을 다 수행하였다. 또한 그의 사후 그를 계승하였던 세 아들은 그를 신으로 선포했던 원로원의 움직임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교의 약화와 쇠퇴를 이룬 장본인이었던 콘스탄틴이 이교신들의 하나가 되는 역사적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한 가장 직접적 결과는 “교회에 대한 박해의 종식”이다. 두 번째로,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기독교 예배가 황실의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황제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던 향불이 기독교회 내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평상복을 입고 의식을 주관하던 목회자들이 보다 사치스런 예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주로 황제에게 표해졌던 바, 경의를 표시하는 여러 몸짓들이 기독교 예배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당시의 성가대들이 발전하기 시작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행진에 무게를 더해 주기 위함이었다. 결국 일반 회중들은 예배에 있어서 보다 수동적 역할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기사 등록일: 200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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