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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이후의 변화에 대한 교회의 두가지 반응
간략한 기독교 역사_8
콘스탄틴 이후의 변화에 대한 교회의 두가지 반응 - 어용신학과 수도원 운동 (캘거리 성결교회 한 호 목사)

1. 관변(官邊) 신학자 유세비우스
콘스탄틴 황제의 등장 이후로 기독교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기독교 신학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세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초대 교회와 신약 속에서는 복음이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므로 특히 부유한 자들은 이를 받아 들이기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하지만 “부의 가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로 받아 들여졌다. 둘째로, 당시에 건축되고 있던 화려한 예배당의 모습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물들과 여기서 비롯된 예배 의식의 결과, 마치 세속 귀족층과 비슷한 종교 귀족층이 발전하게 되었으므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 사이의 간격은 넓어져만 갔다.
세째는, 주님께서 곧 다시 재림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실 것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주제가 상실되었다.
그 이유는 콘스탄틴과 그 후계자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이 ‘유세비우스’라는 사람이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교회사’를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은 후대 기독교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만약에 이 책이 씌여지지 않았다면, 고대 교회사 자료의 대부분이 소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회사’라는 책을 로마 제국의 마지막 목표가 기독교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즉, 신앙과 로마 제국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콘스탄틴 이후에 진행되는 새로운 상황은 복음의 진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황제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런 유세비우스의 신학에 대하여 ‘어용 신학’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2. 수도원 운동의 탄생
콘스탄틴 이후로 누리게 되는 교회의 번영을 모든 사람이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유세비우스와는 달리 새로운 상황을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타락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좁은 문은 이제 너무나 넓어져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기독교인의 생활과 세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외부로 드러난 특권과 권위를 찾아 몰려드는 것만 같아 보였다.
즉, 가라지들이 너무도 빨리 자라나 알곡들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교회가 세상 권력과 손을 잡고 사치와 허식이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되며 사회 전체가 좁은 문을 넓은 길로 만들고자 할 때 어떻게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자기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남겨둔 채 인간 사회에서 벗어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육체와 정욕을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수도 생활’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큰 도시들의 교회에 수천명의 세례 지원자들에 의해 에워싸여 있을 때에 또 다른 수천명은 고독 속에서 축복을 찾고자 하였다. 수도 운동의 발전을 위한 무대는 사막, 그중에서도 이집트의 사막이었다. 처음 수도사들이 원했던 것은 다른 인간들을 떠나 고독을 찾는 것이었다.
따라서 각종 소음들과 활동들로 가득찬 사회생활은 수도사들의 목표를 방해하는 것이기에 사막을 찾게 되었다. 수도 운동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초기 수도운동의 대표자가 ‘안토니’(Anthony)라는 사람이다.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재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복음서의 강해를 듣고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10),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 6:34)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여동생은 교회에 맡긴 후 사막을 향해 떠났다.
콘스탄틴 시대 이전에도 사막을 찾는 사람이 있었지만, 콘스탄틴 통치 때부터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어떤 여행자는 도시보다 사막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또 이집트에만도 2만명의 여자들과 만명의 남자들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수도사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대부분의 감독들이나 교회 지도자들보다 성결(聖潔)하므로, 공식적 교회 지도자 대신에 자기들이 올바른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사들 대부분은 무지하였고 열광주의로 쉽게 흘렀으므로, 이들은 결국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수도자들을 조정하였던, 보다 교육받고 권력있고 교활한 인물들에 의해 이용되었다.
혼자서 하던 수도 생활을 공동생활 즉 수도원 운동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파코미우스(Pachomius)’라는 사람이다. 그는 원래 기독교를 알지 못했지만, 군대 생활의 어려운 상황에 있었을 때 그를 위로했던 기독교인들의 사랑에 감격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였다. 처음에는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규율이 너무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째 다시 수도원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규율을 더 강화하였다.
이런 엄격한 규율 때문에 수도원의 조직이 정비되면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수도생활의 이상(理想)을 일반화시킨 사람은 ‘투우르의 마틴(Martin of Tours)’라는 사람이다. ‘성 마틴의 생애(Life of St. Martin)’이라는 책은 서유럽에서 가장 넓리 읽혀졌으며 서방 교회 수도원의 모습을 결정 짓는 가장 중요한 영향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남겨져 있다. 군인이었던 마틴은 친구들과 함께 아미엔(Amiens)이라는 도시에 들어가면서 그 입구에 선 헐벗고 병든 거지를 만났다.
당시 돈이 없었던 마틴은 자기의 외투를 벗어 반으로 잘라 그 한 쪽을 거지에게 주었다. 마틴은 꿈 속에서 그 외투 반쪽을 걸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은 마틴에게 ‘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에게 베푼 것은 곧 나에게 베푼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는다. 이 사건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채플(Chapel)”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 이유는 마틴의 것이라고 전해지는 외투 조각이 한 조그만 교회에 걸려 있었는데 바로 이 외투, 즉 라틴어로 카펠라(Capella)로부터 작은 교회들을 “채플”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러한 교회에서 섬기는 목회자들을 “채플린(Chaplains)”이라고 부르게 된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3/4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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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등록일: 200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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