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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의 등장 이후 나타난 교회의 또다른 반응-도나티즘 (Donatism)
글 : 한호목사 (캘거리 성결교회) 콘스탄틴의 등장은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불만 때문에 사막으로 들어가서 수도 운동의 길을 택한 그룹이 있고, 당시의 기존 교회가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선포하고 오직 자기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그룹이 등장하였다. 이 그룹이 ‘도나투스주의자들(Donatists)’이라고 불리운다. 이런 그룹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박해가 진행될 때에는 신앙을 버렸으나 박해가 끝난 후에 다시 기독교 공동체로 돌아오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처리 문제에 있다. 이미 3세기에 교회가 한번 겪은 내용이지만, 또다시 교회에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의 문제로 한국 교회가 분열된 것과 비슷한 문제였다. 박해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고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성경까지 넘겨주며 로마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방신에게 예배한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한때 이방신전에는 넘쳐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콘스탄틴의 등장 이후로, 고백자들은 이방신에게 예배한 사람 뿐만 아니라 로마 당국에 성경을 넘겨 준 사람까지도 변절자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중요한 자리였던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직에 ‘카이실리안(Caecilian)’이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엄격한 그룹은 ‘마조리누스(Majorinus)’를 감독으로 선출했다. 이 선거 과정 가운데 양편 모두 각종 음모와 술수를 동원하였으므로 양측은 모두 상대편의 선거가 무효라고 주장할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조리누스가 곧 사망하자, 후임으로 ‘도나투스(Donatus)’를 선출하였고 그가 거의 50년동안 지도자였기 때문에 ‘도나투스주의(Donatists)’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도나투스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신학적, 정치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박해 때에 신앙을 포기한 자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카이실리안’에게 안수했던 세명의 감독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경을 관원에게 넘겨준 변절자이기 때문에 ‘카이실리안’의 성직 임명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카이실리안’이 임명한 성직자들도 가짜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성례전(聖禮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카이실리안’을 지지하는 측은 감독이 변절자라 하더라도 그가 행한 성직 임명 자체는 계속 유효하다고 응답하였다. 그리고 성례전(聖禮典)은 인간의 자격과 가치 여부에 좌우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성례전을 집전하는 목회자들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으므로 그 효과성에 관한 의심을 해소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학적 이유’이다. ‘카이실리안’을 지지하는 세력은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로마화된 계층의 지주들과 상인들, 장교들이었으며, 이들은 로마와의 접촉을 통해 많은 이익을 얻는 계층이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중요하였다. 반면에 ‘도나투스파’는 북 아프리카의 서쪽 농경지대에 우세하였는데, 이 지역은 카르타고지역 보다는 덜 로마화 되어 있었고 조상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 세력으로 보았다. 콘스탄틴의 등장 이전에는 교회 내의 갈등과 긴장이 심하지 않았었는데, 콘스탄틴의 등장으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훌륭한 로마 시민인 동시에 충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로마화된 계층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카이실리안’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로마 제국을 싫어했던 사람들은 이것을 교회가 부패해가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카이실리안’을 반대하였다. 이것이 ‘정치적 이유’이다. 북 아프리카 교회의 분열 때문에 나머지 교회는 고민에 빠졌다. 한 사람만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고자 했던 콘스탄틴은 오직 ‘카이실리안’과 그를 지지하는 신자들만 인정하도록 했다. 콘스탄틴은 성직자들에게 대한 면세 조치와 같은 법률을 만들었고, 그래서 북 아프리카에서는 ‘카이실리안’과 연결된 사람만이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도나투스’ 측은 분열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도나투스주의 운동은 콘스탄틴 이후에 발생한 새로운 상황들에 대한 반응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질서를 환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사막으로 갔으며, ‘도나투스파’는 로마 제국의 동지로 변한 교회의 존재를 거부해 버렸다. 이들이 “교회의 본질”과 “성례전의 유효성”에 관해 던진 신학적인 질문들은 다른 기독교 신자들, 특히 성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깊이 씨름하게 만들었다. ※ 이 연재는 Justo Gozalez가 쓴 “The Story of Christianity”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짧은 지면에 방대한 교회역사를 담을 수 없기 때문에, 간결한 문체로 최근의 사건까지 다룬 이 책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CN드림 2005년 3/11일자에 실렸던 글입니다. Copyright 2000-2005 CNDream. All rights Reserved

기사 등록일: 200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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