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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 _ 안세현 (캘거리 문협)
민기가 여섯 살 되던 어느 겨울날 어머니 손에 붙들려서 가기 싫은 목욕탕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민기는 목욕탕에 가는 게 싫어졌다. 아니 목욕이 싫다기 보다 여탕에 들어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지방 출장이 잦아 민기를 목욕탕에 데리고 가는 것은 당연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가기 싫어하는 민기를 끌고서 동네 어귀에 있는 목욕탕으로 갔다.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민기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여느 때처럼 목욕탕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지만 속 옷을 벗을 때는 창피하여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집에서 끌려 나올 때부터 소변이 마려운 것을 참고 있었던지 라 옷을 벗자마자 탈의실 입구에 있는 화장실로 줄달음 치다가 민기는 무엇에 놀란 듯 그 자리에 얼어 붙어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목욕탕 안으로 들어오는 희정이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희정이는 어릴 적부터 소꿉놀이를 하고 지내는 이웃집 여자 아이였다. 소꿉놀이 하면서 민기가 기분이 좋을 때면 아빠와 엄마,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였지만 민기가 기분이 나쁠 때면 왕과 시녀, 의사와 간호사, 주인과 하녀로 역할을 바꾸어 희정이를 구박하기가 일수였다.
민기는 소변이 급해 바짝 긴장되어 있었던 그곳을 미처 가릴 사이도 없이, 개구리가 뱀을 만난 듯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희정이도 많이 놀란 듯 했다. 웃는 듯 마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밖으로 뛰쳐 나갔다. 며칠 후 길 앞에 있는 골목에서 희정이와 만난 민기는 희정이에게 으름장을 놓아 다른 아이들에게 비밀을 지켜 준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희정이가 이사 갈 때까지 희정이의 기분에 따라 왕자와 공주가 되었다가도 이내 마님과 하인, 여왕과 신하로 역할이 뒤바뀌는 것을 감내해야 했었다.
민기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봄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는 줄도 모르고 교실 안의 아이들은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물결치고 있었다. 이유인즉, 반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인 민철이의 아버지가 해외 출장을 다녀 오다가 성인 잡지를 한 권 사 오셨는데 그 녀석이 아버지 몰래 그 책을 학교로 가져온 것이었다.
한창 사춘기가 시작되었던 아이들에게 서양 여자들의 벌거벗은 사진은 걸리버가 난장이 나라에서 겪은 것보다도,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것보다도 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었다.
반에서 주먹으로 짱이었던 민기는 힘으로 아이들을 제압하고 그 책을 자기 책상위로 가져와 아이들과 함께 괴성과 감탄사를 지르며 책을 보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었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들어와 무슨 일인가 보려고 민기 주위로 와서는 그것이 성인 집지인줄 알고는 운동장에서 시간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셨던 담임 선생님이 “뭣들하고 있는 거야!” 하고 고함을 치실 때까지 민기의 책상 주위는 아수라장이었다. 아이들은 후다닥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아이들에게 가려서 선생님을 보지 못하였던 민기는 미처 책을 감추기도 전에 옆에까지 오신 선생님에게 그만 책을 뺏기고 말았다. 민기는 변명할 틈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교단으로 끌려 나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향긋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담임 선생님 뒤에는 연 노란 원피스를 입고 소녀 같은 앳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남학교인지라 가끔씩 찾아오는 어머니들 외엔 여자를 구경할 수가 없었던 민기는 꿈을 꾸는 듯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입고 있는 노란색 원피스는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있었고,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민기는 순간 그녀가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선녀 같아 보여 그 상황이 더욱 부끄러웠다. 선생님에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몇 대 맞았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교단 위에 있는 저 성인잡지를 그녀가 발견하지 못하기를 마음속으로 빌 뿐이었다. 그분은 새로 오신 교생선생님이었다.
그 후 민기는 그녀만 보게 되면 본능적으로 숨고 있었고 그녀의 수업시간만 되면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공범자인 반 친구들이 자기들은 아무 잘못도 안 했다는 듯 넉살 좋게 그 선생님에게 질문도 하고 이야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울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운명의 장난이려니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3개월 후 그 선생님이 교생 실습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고 나서야. 민기는 자유가 있는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리고 교생선생님을 위하여 지은 시를 전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녀를 연상시키는 개나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민기가 캘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동네에 와서 장사한지 그럭저럭 한 3년이 되가는가 보다. 이제는 50대에 들어서인지 흰머리가 제법 많아졌다. 민기는 가게 안팎을 거닐 때마다 여기 저기 나뒹굴어 다니는 빈 병을 치우는 일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한군데에 그것들을 모으는 일도, 모아서 차는 일도 바쁜 시간을 쪼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옆 마을 엘리자베스 할머니가 매일 와서 가게 밖에 나뒹구는 빈 병을 주워 가는 게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게 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들은 해결할 수가 없어 궁리 끝에 매니저로 일하는 주디에게 빈 병을 모아 판 돈에다가 그 돈만큼 민기가 따로 모은 돈을 보태서 크리스마스 파티와 직원들에게 선물을 하자고 하였더니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빈 병을 모으는 큰 통을 사서 가게 밖에 놓고 빈 병과 빈 깡통만 넣어 달라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직원들도 비교적 협조적이었고 가게 손님들도 호응을 한데다가 날씨까지 더워서 금새 큰 통이 빈 병들로 차 올랐다.
그 다음날 아침 빈 병이 가득 찬 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엘리자베스 할머니가 그녀 특유의 다리를 절면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한다. 민기도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그녀는 이 빈 병들을 가져가도 괜찮겠냐고 물어 보았다. 민기는 순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얼떨결에 “예스” 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기쁜 표정으로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야!” 하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흰 천으로 만든 큰 자루에 하루 종일 직원들과 손님들이 모았던 빈 병을 다 쓸어 담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갔다. 그리고 그녀는 매일 그렇게 빈 병을 치워갔다.
쥬디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해 준 민기를 원망하면서 크리스마스 파티 약속은 어떻게 할거냐고 투덜거렸다. 민기가 모든 파티 비용을 내기로 하고 그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 여간 후회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모아놓은 빈 병을 가져가는 그녀가 얄밉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한달 쯤 전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았고 쥬디가 빈 병을 파는 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민기는 다행이다 싶기도 하여 그녀를 잊어가고 있었다. 제법 큼지막한 유리병 안에는 빈 병을 팔아서 모은 돈이 점점 그 높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직원들도 쌓여가는 돈을 보면서 신이 났던지 더 열심히 빈 병을 모았다. 그러던 중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곳에서였다.
지역 경찰서에서 매년 주최하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 골프대회에 초청된 민기는 지역 여러 동네에서 온 사람들과 골프를 치게 되었다. 골프가 끝난 후 각 두 팀씩 여덟 명이 원행 테이블에 둘러 앉아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식사가 끝날 무렵 경찰서장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기부금을 낸 많은 사람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호명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레자베스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그녀는 연단으로 안내되었다. 민기는 휠체어를 타고 나오는 그녀를 보면서 조금 놀랐다. 예전의 환한 미소는 여전하였지만 한달 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서장은 그녀를 이렇게 소개 하였다. 암 투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빈 병을 모아서 그 돈으로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데 헌신적으로 봉사하였으며 한달 전 의사의 권고로 다시 입원 할 때까지 거의 매일 심장병 어린이들을 방문하여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엘리자베스에게 감사한다고 하면서 감사패를 주었다. 그리고는 감사패를 받은 엘리자베스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주위는 한 순간 엄숙하여졌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제임스를 불렀다. 민기의 캐나다 이름도 제임스였지만 동명이인이려니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다시 제임스 킴을 부르며 민기가 운영하는 가게 이름도 함께 불렀다. 민기는 그때서야 그녀가 자기를 부르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민기를 주시하였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있는 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 하였다. “제가 심장병 어린이를 위한 돈을 모금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져 빈 병을 모을 때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제임스는 나를 돕기 위하여 일부러 큰 통을 마련하여 가게 앞에 놓아주고 손님들과 직원들로 하여금 빈 병을 모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여 모아놓은 빈 병들을 아낌없이 저에게 매일 가져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제임스에게 고마움을 느꼈으며 심장병 어린이들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제 많은 어린이들이 제임스를 보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가 우리마을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제임스에게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민기는 둘러 앉은 많은 사람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민기에게 박수를 치면서 미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어 어디엔가 숨고 싶었다.
나머지 행사가 끝난 후 민기는 엘리자 베스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신이 그녀를 지켜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침묵이 흘렀다. 민기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 자리를 황급히 빠져 나와 차를 몰았다. 그리고 민기는 40년 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어떻게 민기의 마음을 알았는지 떠나면서 보내준 교생선생님의 엽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민기야!

우리는 인간이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실수를 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일을 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정말 부끄러운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내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거슬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앞으로 양심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자.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선생님도 그 잡지를 보고 싶었단다. 안녕!


선생님과의 이 약속은 민기가 세상을 살면서 받았던 많은 유혹을 뿌리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차가 이윽고 마을 입구에 위치한 긴 터널을 지나갈 때 민기는 생각했다. 희정이 앞에서 발가벗은 채 서 있었던 것도, 예쁜 선생님 앞에서 성인잡지를 보다가 들킨 일도 그 당시에는 부끄러웠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무도 그를 책망하려 하지 않고 민기의 행동에 오히려 박수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민기는 가슴속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터널은 점점 어두워 지면서 작아지고 있었다. 작아진 터널은 쥐가 드나들 만큼 작은 구멍으로 바뀌어갔다. 민기는 그 작은 구멍 속으로 남아있는 양심을 손으로 감싼 채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하면서….

기사 등록일: 200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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