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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컬럼 5부 – 수행관(3) -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
글 : 캘거리 서래사 법사 정진형(혜국)


지난 4부에서 수행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법인 ‘멈추고-보기’의 기본 방법과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이번 5부에서는 그 들여다 보는 주체이자 대상인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지를 중심으로 설명 드리고자 한다.


‘응무소주이생기심’ (머무르는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

필자는 종종 불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을 포괄하는 경전구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에 주저 없이 금강경 제4장 ‘묘행무주분’의 유명한 구절인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以生起心)을 든다. 금강경은 한국불교의 최대종파인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며, 바로 이 구절은 모든 불교 수행과 실천의 핵심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이란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그 마음을 일으키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상적인 인간인 지녀야 할 근본 태도로 항상 강조되는 ‘무주상보시’, 즉 ‘바라지 않고 베풀라’라는 실천덕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한 일을 행할 때나, 기도 및 수행을 행할 때도 어떠한 의지나 의욕을 앞세우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대가나 보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반드시 실망이나 서운함이라고 하는 정서적 무력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즉, ‘응무소주이생기심’이란 모든 일에 마음을 비운 ‘무심(無心)’의 상태로 임할 것을 강조하는 경구로서, 인간의 선입견이나 가치 판단이 얼마나 많은 잘못과 오해를 초래하게 하는가를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의 실천을 위해서 한국불교에서 가장 강조되는 수행법중의 하나로 화두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 수행법을 들 수가 있다.


화두수행법 - 언어의 활동의 불필요하고 그릇된 습관을 멈추게 하려는 것

화두(話頭)라는 것은 선종, 즉 참선 즉, 명상의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전통에서 명상의 재료로 삼을 것으로 제시되는 가장 핵심적인 어구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두는 직설적으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경전의 말씀과는 달리, 흔히 수행자들이 범하게 되는 언어적 논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처방된 반논리적(反論理的)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화두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1천 700가지의 공안이 있다고도 하는데, 보통 선사(禪師)의 행적이나 가르침,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문답 등에서 그 힌트를 얻어서 짧고 간략한 문구로 요약되어서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화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무자(無字) 화두’를 드는데, 그것은 잘못된 관념이나 망상이 없음을 직설적으로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니 만큼 선종의 가장 대표적인 화두의 하나로 매우 중시되는 것이다. 또한 이 화두를 조주무자(趙州無字)라고도 하는데, 이는 당(唐)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조주선사(趙州禪師)의 일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는 “무(無)”라고 대답하였고, 또 그 스님이 또 묻기를 “위로는 모든 부처님과 아래로는 개미 •벌레까지도 뭇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개에게는 어째서 없습니까?”라고 하자 조주는 “유(有)”라고 대답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얼핏 보기에는 논리적 모순에 빠져 일관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사실 개인의 불성 유무를 놓고 따져 묻는, 즉 사소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견해를 타파하고자 하는 조주선사의 깊은 뜻이 담겨진 것이다.
즉, 화두라는 것은 수행자들의 작은 분별을 멈추게 함으로써 보다 큰 세계를 직접적으로 보게 하고자 하는 스승의 처방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하여 실제로도 많은 선사들이 화두를 끊임없이 참구(參究), 즉 집중하여 모든 의심의 고리를 풀어서 참된 깨달음을 얻었고, 현재에도 많은 수행자들과 신도들이 ‘없는 가운데 묘한 것이 있다’고 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리를 깨치기 위하여 이러한 화두 수행을 실천해오고 있는 것이다.


염불 - ‘불성’(부처의 본성)이라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 지향

제 1부에서 말씀 드렸듯이 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다. 그러나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신의 존재는 인간들의 불완전한 일면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창조신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여타 신적인 존재들은 우리들의 다양한 욕구와 열망이 반영된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는 어떠한 인격적 형태를 갖추어 드러나는 신이란 존재는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인간의 완전한 깨달음 보다 낮은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완벽한 인격체에게 좀 더 근접하기 위해서 신이나 그들의 초능력마저도 거부하고, 직접적인 깨달음을 위해서 염불(念佛)이라는 수행법을 실행해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염불의 수행법은 신(神)적 존재에 대한 희구(希求)라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가 완벽한 인격체가 되어 세속적 집착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를 실천하고자 하는 핵심적불교 수행법인 것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응무소주이생기심’의 실천법, 화두수행법, 염불수행법등은 어찌 보면 현실적 인간의 모습을 부정하는 듯 한 이미지를 준다.
특히 그 수행을 직접 실천을 해나가다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현실적인 자기 모습과 실제 수행에서 요구하는 수준과의 격차를 절실히 느끼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화가 잘나거나 탐욕을 잘내는 사람은 화두를 잡으려고 해도 제대로 안될 수 있고, 또한 자발적인 노력이 익숙치 않거나 자발적인 수행의 힘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실천법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수행의 최종 목표는 자기 스스로 실천하여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스스로 부처가 되려는 자력문(自力門)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처음에 부정되었던 나 자신과 저 멀리에만 있다고 생각되던 피안(彼岸)의 길도 모두 평등 원만한 진리로 깨달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실체가 없다’고 한 교의는, 모든 세상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헛된 자아’를 극복하는 세계관의 ‘환골탈태(換骨奪胎)’을 통하여 진정한 세상의 진리를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라고 하는 역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기사 등록일: 2007-12-28
혜국 | 2007-12-28 0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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