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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에서 인정하는 손정도 목사 2부
상해에서 의정원 의장으로 활동 하시던 손 목사님은 박은식 선생과 함께 대한교육회를 조직하여 박은식 선생이 회장으로 손 목사는 서무로서 안창호 선생과 함께 흥사단 극동임시위원부를 조직하였다.
1921년 만주 길림으로 간 손 목사는 그곳을 중심으로 농민합작회사를 설립해 독립운동 투쟁 기반 과 민족의 대동단결에 총력을 다 했다. 그리고 1922년에는 김구 선생과 함께 대한 노병회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 했다. 그러는 한편 그분은 교회를 세워 동포들을 신앙으로 뭉치게 하셨고 학교를 세워 교육운동도 했다. 동생 손경도 명의로 농토 50향을 사서 농업공사를 만들어 경영했다.
김일성을 만난 것도 이 시기였다. 김일성 회고록을 보면 4장의 대부분을 손정도 목사에 대한 회상이 많은데 국부(國父), 생명의 은인, 친아버지, 친아들 이라는 표현을 쓰며 손 목사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나타냈다. 회고록을 몇 구절 인용한다.
-감옥을 나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마항에 있는 손정도 목사님 댁이었다. 일곱 달 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준 목사님 일가에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목사님은 자기 자식이 감옥에서 나온 것처럼 기뻐하며 나를 맞이했다.-
“목사님께서 후원을 잘해 주신 덕에 저는 감옥살이를 한결 헐하게 했습니다. 저 때문에 옥리들에게 돈도 많이 찔러 주셨다는데 그 신세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은혜를 일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김일성 회고록은 손 목사가 임시정부를 떠나 길림으로 가게 된 배경도 설명하고 있다.
“일부 인사들이 이승만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을 때 신채호가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도 평소부터 이승만의 위임통치론 과 자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완용 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신채호 선생의 말씀-
“신채호는 성미가 면도날 같고 주장이 무쇠 쪽 같은 사람이었다. 그가 이승만을 이완용 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탄핵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통쾌감을 금할 수 없었다. 신채호의 말은 민심을 대변한 것이었다. 단재(신채호의 호)의 심정이자 곧 내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신채호와 함께 임시정부를 떠났다.” –손정도 목사의 말씀-
김일성 회고록은 목사님의 장녀 손진실 과 윤치창과의 혼사문제도 기록하고 있다.”
“당시 목사님은 맏딸 손진실 과 윤치창과의 혼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길림의 독립운동자들은 누구나 그 혼사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목사님 자신도 딸이 배우자를 잘못 골랐다고 못마땅해 하였다. 딸이 윤치창에게 시집가게 되면 집안 망신이라 생각하였다. 윤치창 집안이 친일파 이기 때문이다.
손 모사가 딸을 설복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독립군 보수파들이 윤치창을 억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목사님은 내게 의향을 물었다. 나는 어른들의 혼사에 간섭 하는 것이 주제 넘는 일 같아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희들끼리 눈이 맞아 연애하는 걸 떼놓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본인들 의향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후 독립군 보수파들을 설득해 윤치창을 풀어주도록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강철 같은 의지로 일본 경찰의 고문을 이겨내며 조국 독립과 복음 전파에 힘쓰던 목사님도 딸의 혼사문제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가 보다.
조국 독립과 복음 전파를 위해 애 쓰시던 손 목사는 1931년 2월19일 조국 독립을 못 보고 세상을 뜬다.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위궤양이었다.
그러나 당시 만주 교포들 사이에서는 손정도 목사가 일본정부에 의해 암살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유는 입원 직전 손 목사의 병세가 생명이 위독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입원 했던 동양병원이 일본인 소유라는 점이다. 일본은 살아있는 사람을 세균실험으로 쓸 정도로 악독했는데 암살을 하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손 목사가 애국지사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경찰이 한시도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은 요시찰 인물로서 별세하자 마자 길림 주재 일본 총영사는 본국 외무대신에게 ‘불령선인 손정도 사망’을 전보로 알릴 정도였다.
손 목사의 장례는 봉천회관에서 기독교식으로 엄수되었으나 일본경찰의 방해로 고작 40여명의 조문객이 모였다 한다.
“생전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 속에 에워 쌓여 애국의 혼으로 그들을 열심히 교화시키던 목사님일진대 고인과의 작별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국부(國父)가 죽어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경찰이 입회하는 식장에서 눈물인들 제대로 흘리며 통곡인들 제대로 하였겠는가.
나는 멀리 길림 쪽 하늘을 향하여 눈물을 하염없이 뿌리며 간도 땅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손 목사님을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이 나라 아버지들의 영령을 지키고 원한을 씻기 위해 기어이 나라를 찾고야 말리라는 맹세를 굳게 다지었다.”-김일성 회고록에서-
손 목사의 유해는 동포들에 의해 길림성 북산에 묻혔다 1996년 9월11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묘지 임정요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평양을 방문 했을 때 김일성은 기도를 요청했고 기도가 끝나자 김일성은‘아멘’하고 화답했다. 손 목사는 청년 김일성에게 나눠준 사랑이 훗날 빌리 그래함 목사를 통해 백발의 김일성에게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손 목사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분의 넋은 살아있어 후손들을 통해 남북 통일의 초석이 되고 있다. 외손자인 재미동포 이덕유씨는 북한과 합작해 손정도 목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손 목사의 손자, 손원일 제독의 아들인 손명원 쌍룡 사장도 방북해 남북교류의 밑거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참고:
박은식(1859-1925): 독립운동가 겸 사학자. 장지연, 신채호 와 함께 황성신보 창간. 대한 매일신보 주필로서 애국사상을 고취.
신채호(1880-1936) 사학자, 독립운동가로서 단군이래 최고의 역사학자, 근대사의 영웅.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 땅 찾기를 통해 부를 세습하며 기득권을 즐길 때 신채호 선생의 아들 신수범 씨는 아버지가 신채호 라는 걸 증명할 길이 없어 사생아로 살아야 했다는 게 우리의 서글픈 현실을 말해준다.
참고서적: 한국 교회사, 김일성 회고록.

기사 등록일: 2008-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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