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 사태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서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원래는 종파로서의 만민교회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써 보려고 했는데 게시판 자체가 즉흥적인 자유게시판이라 이번에 쓴 즉흥적인 글은 운동과 반운동의 성격을 짚어 보았습니다. Ross님의 “이단은 이단이다”라는 동어반복적 말씀에도 할 말씀이 있는데 다음으로 미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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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거리 교역자 협의회의 반동적 성격과 운동의 변증법
-아프리카
개념이란 우리가 어떤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도구 (heuristic devices)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개념이 그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언제나 폐기처분시킬 필요가 있겠지요. 이단논쟁이나 이단사냥은 어쩌면 우리가 현실사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또 다른 형태의 “종교적 현상”이랄 수 있습니다. 정치 모리배들도 자기들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 온갖 추잡스런 짓을 다할진데, 어느 조직이든 자기 가 하는 일들에 정당함 (legitimacy)과 진정성 (authenticity)을 추구합니다. 하물며 자신의 종교적 순수함 (purity)를 지키기 위한 이단사냥의 정당성 추구야 오죽하겠습니까?
여러가지 사회적 반응이란 복잡한 현상을 분류하면, 우리는 두 가지 현상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운동과 반동운동 (movements and countermovements)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개념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가치 판단을 유보하고 그 현상 자체를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글은 그러한 개념적 문제를 심심풀이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색깔이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1. 이단은 언제든지 생산될 수 있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사회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의견이 자주 맞지 않을 수 있는데 집단과 집단 간의 완벽한 의견 조정이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불일치는 집단의 규모만큼 반드시 힘의 불균형을 초래합니다. 강자는 권력을 발휘하는 사냥꾼 (hunters)이 되며, 약자는 쫓기는 도망자 (fugitives)가 됩니다. 전자를 우리는 정통이라 하며 후자를 우리는 이단이라 합니다. 이런 이단과 정통의 문제는 기독교의 문제뿐 아니라 유교나 이슬람 등에서도 빈번히 나타났습니다. 특히 형이상학적 신념을 근간으로 삼는 종교의 경우는 정통이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도 없기 때문에 힘이 센 집단이 정통이 되며 힘이 약한 집단이 이단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류의 정통/ 이단의 짝패는 역설적으로 자기 순수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비학문적이며 전염병처럼 편견이 만연하게 하며, 사회에 폭력과 해를 불러 올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아무리 검증하기 힘든 형이상학적 종교 신념이라고 하더라도 깊은 혜안과 논리적 추론을 통한 구축은 다른 신념보다 보다 설득력을 갖추기 때문에 주류 담론이 될 수 있겠지요.
2. 반공주의와 사회개혁운동
종교적 신념체계처럼 정치적 신념 역시 차분히 앉아서 말로 하자는 식이 안되는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데, 이러한 것을 우리는 polemic arguments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리 좋고 선한 의도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아예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 토론이나 논리적 합의란 불가능하지요.
한국과 같이 남북이 갈라지고, 전쟁을 치르고, 좌익/우익에 의해 테러와 반테러를 반복해서경험한 상황에서 말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한국 전쟁 후, 모든 정치적 담론은 반공주의였습니다. 한 때의 사회적 개혁운동 (419 혁명—좀 쎈 말이긴 하지만)은 박정희 군부의 군사 쿠데타에 의해 망가지고 반공이 국시가 되었습니다. 그 후 모든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개혁운동은 좌익 빨갱이로 몰려 인혁당 사건처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연좌제에 걸려 아예 생활의 출구도 막히곤 하였지요.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는 전형적인 운동과 반동주의의 변증법에 의해 고통을 겪었고 또 그런 와중에도 변화를 몰고 오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운동이 항상 선하고 반동이 항상 악하다고 생각하질 않습니다. 남쪽이 친일청산을 했든 못했든 소련의 등을 업고 진군한 김일성 정권은 저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정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사회를 말아 먹거나 파국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탈린의 소련이 그렇고 나찌의 히틀러가 그렇습니다. 좌파는 개혁적이며, 우파는 수구 꼴통이라는 등식은 사회의 역동성, 그리고 그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개인이나 집단의 역동성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남한국 사회의 문제는 북조선의 공산주의의 경험으로 사회 개혁적인 모든 운동을 좌익 빨갱이로 몰고 갔다는 것이지요. 운동과 반동이 너무나 선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저같이 온건 중도 우파적인 사람조차 빨갱이로 몰리는 판에 건설적인 대화란 현재의 남북 분단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3. 종교에서의 운동과 반동
어떤 분류 (classification)와 유형 (typology)도 현실적으로 재현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고 유형화시키는 것은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 개념적 실재를 현실과 등치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ideal type). 아주 거칠게 이야기 하면, 종파나 신종교는 기성 종교에 신물을 느끼고 새로운 영성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기성 종교에 성이 차질 않는다는 것이지요. 1950-60년대를 풍미한 박태선 장로의 전도관과 신앙촌 역시 새로운 영성은 영성이지요. 치병 (질병고치기)을 집단화시키는 것이 바로 이 전도관 운동이었으며, 조용기 목사의 삼박사의 구원은 기성의 무속이나 유교, 그리고 정통파 기독교 교리주의가 주지 못한 종교적 상품을 잘 공급해서 성공한 사례이며, 이재록 목사의 만민교회도 주술성과 전통적인 기독교를 조합한 새로운 종교 상품을 공급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성 사회나 종교에서 볼 때, 이렇게 나타난 종교적 영성이나 상품이 위협이 된다고 간주해서 이것을 반대하는 반동운동 (countermovements)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럼 철저한 반공주의에 입각한 “문선명 선생”의 통일교회 운동은 반동 운동이 아닌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종교는 정치적으로는 반동적 형태를 보였지만 종교적 형태로는 기존에 없는 새로운 것을 제공하였습니다. 합동 결혼도 그런 형태일 수도 있지만, “통일” (unification)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통일교의 목적은 분열된 종교의 통일, 동과 서의 통일, 가족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종교적 영성 또는 상품을 제공했고, 이것은 기성 기독교에 위협으로 다가와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강력한 반이단운동으로서의 반통일교 운동으로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학자나 인사는 통일교의 사주를 받거나 통일교의 영향에 있는 것이라고 간주되었습니다.
4. 캘거리에서의 교역자 협의회의 반이단운동
캘거리 교역자 협의회의 반이단 운동은 전형적인 반동 운동 (countermovements)입니다. 힘센 자가 약자를 누르려는 모습이지요. 물론 이런 반동 운동에 정당화 (legitimation)를 주게 된 계기는 만민중앙교회의 엠비씨 당사 점거 사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재록 목사의 라스 베가스에서의 겜블링 소문도 일조를 했구요. 그래서 이런 사회적 사건은 종교적 신념을 떠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즉 만민교회는 종교적 신념이나 행위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적 규범 (social norms)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반만민교회 정서 (anti-Manmin Church sentiments)에 불이 더 지펴지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만민교회의 엠비씨 점거 이전에 이재록 목사가 소속된 성결교단에 의해 이단 판정을 받았고, 또 한기총에 의해서 그것이 더 증폭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민교회 사건은 종교적 신념의 일탈과 사회적 규범의 위반 두 가지 다를 어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논하는 것은 그 진위를 밝히자는 것이 아니라 만민교회의 종교 활동과 사회적 활동이 일반 사회와 기성종교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며, 그것이 만민교회을 억압하는 족쇄가 일부분 되었다는 것이지요. 한편으론 우리는 또 다른 면도 보아야 합니다. 시간에 쫓기고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하는 통속적 저널리즘, 유언비어 (rumors)에 의한 사태의 증폭 (amplification), 이단사냥꾼들의 큰 역할, 별 생각없이 이런 담화를 즐기는 일반대중들이 엮어 만든 현상이 바로 반만민교회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캘거리 교역자 협의회의 목회적 문제점은 전혀 자신들은 연구를 하지 않고 한기총이 때려낸 것들을 그대로 베껴 사용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일선 목회자로서 심각하게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캘거리 만민교회에 문의한 바로는 캘거리 교역자 협의회 소속 목회자 어느 한 분도 그리고 단 한번도 만민교회에 연락을 취해서 자료를 보자거나 문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바 진리 싸움을 하신다는 분들의 목회적 진지함과 지적 정직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한기총이 사용한 것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 부모가 나쁘면, 자식도 나쁘다는 연좌제를 걸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이를 테면 캘거리에서의 이단사냥 한기총 지부인 교역자협의회란 말씀이죠.
이런 힘의 불균형은 씨엔드림 사태에서도 연결됩니다. 교역자 협의회가 13교회로 구성되어 있지만, 꽤나 크고 주류로 보이며, 교역자님들 역시 그렇게 판단하는 듯 보입니다. 예전에도 교역자 협의회는 천주교도 이단이다 성명서 발표를 시도했으며, 전 교민신문에 실은 서울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의 시무언 칼럼도 이단 칼럼이라 하여 문제 삼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는 씨엔드림과 같이 동일하게 교회광고 배포금지를 해서 권력을 맘껏 휘두른 셈이지요. 그러한 전역사가 바로 씨엔드림 광고 중단 교회 배포 금지로 반복해서 나타난 것이니 새로울 것은 전혀 없고 놀랄 것도 없습니다. 이분들은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책을 한권이라도 읽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또 최삼경 목사를 위시한 한기총과 통합측 장로교단의 힘의 우위의 담론의 결과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캘거리 사회에서 씨엔드림이 캘거리 헤럴드 정도의 큰 규모라면 교역자 협의회에서 어떻게 대응했을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은 가두시위나 성명서 발표하는 것으로 그쳤겠지요. 주류 신문에 광고 안내면 손해니까요. 제 가치판단적인 사족을 붙이자면, 이것은 약자와 함께 해야 하는 종교 지도자의 모습과 다른 모습입니다. 이제 섬김을 받는 모습보다는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이심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판단컨대 진정한 리더쉽입니다.
5. 끝말
종교적 현상은 결코 독립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정치적이건, 인종차별적인 것이건, 지역적 분규이건,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종교적 분규와 같이 언제든지 뿜어낼 수 용광로를 품고 있습니다. 연애하다가 원수도 안됩니까? 그런 가능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캐나다에서도 있지만, 단일 민족을 자랑하는 한국 사회엔 어쩌면 다문화 사회라고 하는 캐나다보다 더 깊은 갈등의 골이 패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반공주의와 반이단운동은 그런 골을 보여 주는 한국 문화의 일부이며, 캐나다의 다문화에 통합되지 않은 섬 (enclave)로서의 한국 이민사회는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그런 갈등을 다시 재현드라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을 신물난다라고 냉소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고 객관화시킬 수 있는 자료로 삼는다면 우리는 보다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요.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현상의 일부니까요.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내탓이오”라는 말과 비슷한 말을 유명한 이단 비판가, 반 발런 (van Baalen)도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Cults are the unpaid bills of the Church” (그의 1956년 The Chaos of the Cults에서). 교회가 제 기능을 못하면 이른바 비정통 종교가 그 자리를 치고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기성사회와 기독교가 몰몬교를 픽박하지 않았다면, 이 종교가 그렇게 크게 성장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이 억압을 피해서 캔사스와 유타로 가서 그들만의 든든한 종교 기반을 세울 기회를 핍박이 제공해 주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순교와 로마 제국의 핍박에 의한 순교사의 전통을, Joseph Smith의 순교와 그 추종자들의 핍박이라는 찬란한 순교사를 후손들은 자랑스런 전통으로 갖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몰몬교회는 초기 기독교와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그런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기성 사회 (로마제국과 빌라도)와 기성종교 (유대교와 황제 종교)가 만들어 주듯, Smith의 몰몬교회도 기성 사회와 기독교가 만들어 준 합작품의 일부이지요. 이단은 박멸되는 것이 아니라 숨는 것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몰몬교회는 잘하면 불교보다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상으로 운동과 반동의 문제를 두서없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날수도 있습니다. 그런면에서는 저 개인적으로 수궁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한기총에서 그 교회를 목표로 삼아 글을 지어내 그쪽으로 몰아 이단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을겁니다. 김기동목사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성경에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하며 그들말들 들으면 그럴싸하고 틀린것이 없습니다. 아니 모든 종교가 그렇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목회자들을 신뢰하고 목회자들은 그 교리,교단,연합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중에서는 이단연구전문가가 있습니다. 물론 이들중 완벽하지는 사람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태것 따라왔듯이 따가 가는거구요. 그것은 아닌데 라는 판별은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거나 탈퇴해 그 이단교회를 믿는것입니다. 오해던 이단이던 아니었던 그것은 우리가,그들이 판별해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문제성 있는 교회들은 대부분 은사를 내세워 활동하고 있습니다. \"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같으니라 \" 잠언 25:14 이단이다 아니다 은사다 아니다 표적이다 아니다 신비주의다 아니다. 그런 혼란이 있을것을 안 성경은 고린도전서에 분명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14장은 배우도록 노력해라라는 이야기는 없고 차라리 하지말라라는것이 문맥상 대부분 차지합니다. 이런혼란이 있을줄알고 하지말라는데 굳이 하는이유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