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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처럼, 남한에서는 반공주의가 가장 중요한 이념적 기반이었습니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뿐 아니라, 심지어 중등교과서에까지 힘을 발휘했습니다. 순수문학의 이름으로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반공주의는 “그 내용의 경직성보다는 그 무내용성으로 무소불의의 위력을 떨쳤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공주의의 위력으로 한국 현대문학사는 반공주의 문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른바 우파적 이념을 가진 문학인들이 문단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 박목월, 박종화, 모윤숙, 김광섭 등등이 순수문학의 기치를 들고 반공이념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런데 “반공주의 이념을 공고히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반공주의는 “타자 배제의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문단의 어르신네들이 하신 짓이란 자기들의 보수 반동적 이념과 어울리지 않는 문학을 철저히 배제하려 했다는 것이고, 자기들만의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한국문인협회]같은 조직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죠. 이들이 추구한 “타자 배제”의 원리는 달리 말해 “우리끼리” 수용하는 논리의 다른 이름인데, 이들이 추구한 애매한 등식, 즉 “민족적=전통적=한국적=토속적” 문학만을 추구하고 사회비판적 문학을 배제했다는 것이지요. 결국은 그들의 논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반공 독재 권력 하에서 “순수문학”의 이름을 걸고, 현실 긍정과 체제 순응의 “이념”을 공고히 하는데 매진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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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공주의 이념이 왜 무서우냐 하면,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자기들의 보수 반동적 이념에 맞지 않은 모든 것은 뽈갱이적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타자를 악마로 만드는 데 손쉬운 방법은 타자를 일원화시키는 것입니다. 가령, 제가 좀 비판적인 글을 썼다고 합시다. 그러면 쉽게 친북좌파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타자 배재의 원리는 체제 순응이었고, 이들이 한 짓은 문학적 상상력을 죽이는 가장 치졸한 이념적인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은유” (metaphor)입니다. 상반된 대상들이 묶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유가 시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에 시는 가장 은유적인 문학군에 드는 것입니다. 문학이 은유적 혁신을 잃어 버릴 때, 남는 것이라고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구닥다리 뼈다구만 남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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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반문하실 것입니다. 반공보수주의자 이문열은 대단하지 않느냐고요. 그렇죠. 이문열 대단합니다. 그의 글 자체만으로는 어쩌면 가장 문학적인 면을 구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사회적 활동은 적어도 문학적 상상력과 전혀 무관한 짓을 벌였죠. 진정으로 큰 문학인은 이념의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것이지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위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한국 현대 문학사를 보면, 말은 “순수문학”이었지 뚜껑을 열면, “순수신앙”의 기치를 든 보수 교회 목회자들이 박통, 전통 때 조찬기도회에서 이들의 안수무강을 하나님께 빌고 또 빌었듯이, 이른바 순수문학인들은 한국의 독재를 공고히 하는데 엄청난 이념적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굉장히 힘들죠. 이른바 글깨나 쓰고 문학깨나 한다는 양반들은 비록 순수문학을 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체제 순응을 할 때는 보수반동적인 순수문학을 하니 정치권과 부딪힐 일이 없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가 바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민주화된 이후 사회 개혁의 새 바람이 불고 자기들이 쌓아 놓은 이념의 성이 흔들리자, 갑자기 당황해진 이들은 이념을 들고 나옵니다. 뽈갱이적이다 등등이죠. 대표적인 인간이 이문열이라 하는 것은 삼척동자 (초딩)도 다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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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맑스 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이념도 물질적 조건에 기초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사회적 발언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맑스 들먹거린다고 혹시 뽈짓 하실 분도 있을 터이지만, 캐나다에서 기초 교양강좌인 “사회학 개론” 책 제 1장에서 비판 사회이론의 선구자로 맑스 선생을 들고 있으니 심히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순수문학 이념 군상들은 사실 그 시대의 반공주의라는 타자 배제의 논리를 자기 권력을 누릴 대로 누렸다가, 갑자가 민주적 비판적 의식을 가진 문학인들이 나타나자 뒤로 넘어진 것이죠. 저는 문학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한국 문학사에서 양심있는 보수는 [문학과 지성사]에서 선도적인 진보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좋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우리가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은 타자 배제의 이런바 “순수문학”의 이데올로그들이 만들어 준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내면화시키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동엽이나 김수영 같은 훌률한 문학인에 익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남북 분단이라는 약소국인 한국이 겪은 비극입니다. 누구의 탓이 아닙니다. 역사적 연쇄가 가져온 귀결이라 할 수 있겠죠. 실례가 많았습니다. 너무 오래 노닌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올림










어제 여기서 민초님의 글을 읽고 그곳에 언급된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미국 의회보고서를 찾아 읽고 다시 들어와 보니 그 글이 없어졌네요. 대신 내사랑아프리카님의 글을 읽고 몇자 적어봅니다.
1.
한국 현대문학사가 반공주의문학사라고 한다면 과언일 것 같습니다.
많은 문인들이 정치 혹은 권력에 기대거나 순응하면서 문단을 이끌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만, 순수문학의 이름으로 반공이념을 공고히하고 타자 배제의 논리로 사회비판적 문학을 배제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마다 사회현상이 반영되거나 유행처럼 주류로 흘러가는 사조가 있듯이 주류가 혹은 대다수가 민족적, 전통적, 한국적, 토속적 문학만을 추구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비판의 문구와 표현이 들어가야만 사회비판적 글이 되는것은 아닌것처럼, 그리고 은유가 문학의 큰 요소중의 하나인 것처럼, 감추어지고 문학적으로 비유되는 것처럼, 여전히 사회비판적인 문학의 부류들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대비와 논쟁이 있어왔다는 것은 그리고 70년대인가 한창 왕성하게 큰 줄기를 이루었던 민족문학이 순순문학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는 점들이 그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수도 있겠구요.
2.
왜곡되고 권력도구화되었던 반공주의 이념 자체와 비판적인 글이나 의견을 쉽게 친북이니 좌파니 하고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철저히 반대합니다.
그러나 타자배제의 원리가 곧 체재순응이며 상상력을 죽이는 이념적인 일이라는 단언은 ‘문학은 은유다.’라는 결론처럼 위험한 것 아닐까요? 문학의 정의가 무엇이던간에 문학은 이념을 포함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역사와 사회 등 주변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주변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엮어내는 하나의 산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은유만이 문학의 전부가 아니므로 은유적 혁신을 잃는다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여전히 문학의 범주에 머물수 있기도 할 것이구요.
3.
이문열의 작품들. 대단했죠. 글쓰기나 책읽기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에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작가의 사회활동이 반드시 그의 작품의 성향과 일치해야만 하는 법은 없을거구요, 음악가나 미술가들의 성향도 일생을 지나며 환경과 사회와 개인적인 신념의 변화 등을 이유로 변해갈 수 있듯이, 그도 변했겠지요. 그것을 변절이니 하면서 너무 이념적으로 몰아갈 필요성이나 당위성은 없다고 봅니다. 작가의 평가는 이문열이든 그 누구든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겠습니까? 작품이 그의 온전한 모든 것을 투영한 결과물일테니 말이죠.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보수반동의 순순문학이다 뭐다 거창하게 갈라놀 필요없이 그저 그들의 작품을 읽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공유해보고 느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어째든 모든 것은 독자들의 몫일테니까요.
4.
칼 맑스의 잣대로 순수문학의 이념이 민주적, 비판적 문학의 등장으로 타격을 입는다고 보는것이 다가 아닐겁니다. 적어도 그의 의견대로 한 시대 혹은 한 사회의 문학을 평가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문학이라는 예술의 한 축을 잘 이해해보는 여러 척도의 하나일 뿐이지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은 사회, 권력, 정치 등이 변해가는 중에도 여전히 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국어교과서를 통해 만났던 작가들이 이념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가였다고, 그래서 다른 훌륭한 작가들에 익숙치 못했다고 그것이 비극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분단된 조국이 갖는 역사적, 지정학적 취약성과 산업의 급격한 발달과 생계에 급급한 척박했던 그간의 삶이 일반 모두에게 문학에로의 접근을 방해하고 있었던 점이 더욱 비극일겁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와중에도 교과서에 담기지 않았던 더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 그리고 명확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글들을 여전히 많이 읽혀 왔고, 읽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공계 출신인 제자신조차도 70년대를 풍미했던 소위 참여문학, 민족문학이라고 구분지어지는 많은 작가와 작품들에 심취해 있었고, 제 선배들도 그래 왔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문학에 뭐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독자도 아니고, 더더욱이 작가도 아니지만, 그래도 작품을 읽어주는 한 독자로서 오히려 문학답지 못한 작품들에 화가 납니다. 소설같지 않은 소설, 시같지 않은 시 뭐 그런 것들 말이죠. 물론 제가 대단해서 이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구요, 화가가 아니더라도 그림을 감상하고 평해볼 수 있듯이, 글들도 읽고 평해볼 수 있는것이긴 한데, 이야기거리라고 다 소설이 될 수 없고 짧게 줄 바꿔가며 썼다고 다 시가 될수는 없는 것일텐데 하는 불만이 항상 더 큽니다.
아무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순수문학에 굳이 이념성을 결부시켜야 할까하는 생각이 치들어 두서없이 몇 자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