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종교란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내 사랑 아프리카 님과 에포케 님이 토론하고 있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여기에 따로 글을 올리는 것은 두 분의 생각과 차별을 두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일뿐입니다.
역사적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느냐 아니냐 의 논쟁은 종교단체들은 물론 출판사들과 언론기관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논제거리입니다.
미국의 '예수 세미나' 학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살아있던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라는 사람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숭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무슨 말을 했고(Jesus' Saying), 예수가 어떻게 행동했는지(Jesus' Action)를 탐구하는 것이 '예수 세미나'의 목적입니다. 복음서들의 원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는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처음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고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복음서들은 무엇이었을까를 연구합니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네 복음서는 수많은 사본들 중에 하나일뿐입니다. 이 사본들을 기본자료로 해서 2000년 전의 갈릴리 예수의 말과 행동을 찾아가는 것이 역사적 예수의 탐구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말과 행동을 찾는 목적과 의미는 교회가 역사적 예수 위에 이분법적 교리를 더덕더덕 덧칠하여 만든 '교리적 예수'를 해방시키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적어도 1700년 동안 교회의 권위와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 교리적 예수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자율과 잠재력과 가능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존엄성 즉 영혼을 무시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예수가 실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천당-지옥 축복-징벌의 이분법적 예수는 교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는 교회가 창작한 상업품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거룩한 생명이라고 확신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소중하게 존중한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장터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식탁에 둘어 앉아 함께 먹고 마시며 실제로 살아있었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살았던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인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또는 중개인 이라고 억지주장을 늘어놓지도 않았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 역사적 예수를 되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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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가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 대한 글을 올린 이유가 보수/근본주의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슈바이쩌가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 것이 예수는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바트 어만이 [Did Jesus Exist?]를 쓴 이유 역시 보수/근본주의자들을 위한 것임은 더욱 아닙니다. 늘봄님께서 위의 글을 쓰신 것도 분명히 밝히셨듯이 역사적 예수는 실재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먼저, 어만으로 돌아가서 말씀드리자면, 어만 역시 역사적 예수는 실재하다는 전제를 하고 그 동안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는 아예 역사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학문성과 관련해서 논의대상조차 아니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글과 관련해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수는 실재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어만이 명명한 “신화추종자들”(mythicists)이 예수는 실재하지 않았다는 주장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전제는 “all religions at heart are the same”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는 종교 주창자나 영웅은 역사적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지나치면 예수는 사실 태양신(sun-god)의 일종이라고 보고 심지어는 인도의 신인 Krishna가 Christ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에서 찾는 지점까지 비약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단군의 단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부족인 단지파와 발음이 비슷해서 우리는 단지파 자손이라고 하는 주장과 별 다르지 않습니다. 몰 역사적인 이해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참 재밌는 사실은 영지주의와 현대판 영지주의적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예수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와관련해서 Philip Jenkins는 이렇게 말합니다. “…, the canonical gospels enjoy one immense advantage over the Gnostic texts in that orthodox Christians at least believed that Jesus had lived and died in a real historical setting, and that it was possible to describe these events in objective terms, For Gnostics, by contrast, Christ not so much a historical personage as a reality within the believer.” (Jenkins, Hidden Gospels, 2001, p. 103). 영지주의자들에겐 예수가 역사적 인물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는 마음속의 실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현대 영지주의자들은 사복음서 추종자들을 문자주의라고 비판하는데, 그 근거로 사복음서 추종자들이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며, 팔레스틴에서 태어난 역사적 예수의 uniquness를 믿기 때문이라는 웃지못할 발언까지 하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경향성은 신화학자들(mythologists)인 멀치아 엘리아데, 조셉 캠벨, 칼 융 등에게도 나타납니다. 이들의 경우는 몰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비역사적(ahistorica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이들에게는 반역사적(antihistorical) 한 면도 많이 보여줍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또는 보수반동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저의 속견이지만, 저는 이들이 공히 historicity에 관심이 없어서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 이 세사람에 대한 좋은 책은 Robert Ellwood의 [The Politics of Myth: A Study of C. G. Jung, Mircea Eliade, and Joseph Campbell] 를 강추합니다. 종교학자 엘우드는 보수반동적인 이 세사람의 신화학 거장들을 내리까고 있습니다. Nazi Symphasizer로서의 융에 대해서는 Richard Noll의 [The Jung Cult: Origins of a Charismatic Movement]가 엄청 좋습니다. 파시스트적인 엘리아데에 대해서는 Nancy Harrowitz가 편집한 [Tainted Greatness: Antisemitism and Cultural Heros]에 수록된 Adrianna Berger의 "Mircea Eliade: Romanian Fascism and the History of Religions in the United States," pp. 51-74 참조)
제가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영지주의 문헌인 나그 함마디는 이른바 사복음서에 비교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새로운 정보를 거의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물론 the Gospel of Philip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나그 함마디 문헌에 포함되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서(이 복음서의 파편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1945년의 나그 함마디가 아니라 1894년 카이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는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영지주의 문헌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보지만, 그 많은 영지주의 문헌도 사복음서만큼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없습니다. 도마 복음서의 Sayings도 당연히 중요하죠. 어쨌든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역사성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적인 신화추종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이것은 아주 독특한 현상이라 저의 개인적인 공부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봄님께서 “예수가 실제 인물이었는지 아닌지를 논쟁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천당-지옥 축복-징벌의 이분법적 예수는 교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로 말씀하신 것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글을 올린 것은 Tom Harpur나 Timothy Freke & Peter Gandy같은 사람들의 주장 때문입니다. " In Christianity, however, the myth was eventually literalized. Jesus was historicized." (Harpur, The Pagan Christ, 2004, p. 39). “We have become convinced that the story of Jesus is not the biography of an historical Messiah, but a myth based on perennial pagan stories. Christianity was not a new and unique revelation but actually a Jewish adaptation of the ancient pagan Mystery religion.” (Freke and Gandy, The Jesus Mysteries, 2000, p. 3). 저는 역사적 예수가 실재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역사학적으로도 중요하며 신앙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성을 말했을 때는 그것이 unique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독특성은 단순한 허구에 기반한 신화와 매우 다른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팔레스탄인의 기후, 지형,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난 예수는 허구에 기반한 그리스 로마 신화나 힌두교의 수많은 신의 이야기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역사적으로 유일하게 존재한 Historical Buddha와 수많은 비역사적 붇다와 보살은 분명히 다릅니다. 천당 지옥의 문제는 지난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서서히 진화해 온것이며,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사복음서에서의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것입니다. 늘봄님께서 역사적 예수를 항상 강조하시면서 이런 말씀하시니까 당혹스럽군요. 역설적이게도 늘봄님의 마지막 단락의 말씀은 역사적 예수를 말씀하시지만 신앙의 그리스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은 저의 속견때문인가요? 모든 신학적 진술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변증법 속에서 탄생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역사적 예수가 없는 신앙의 그리스도로 가면 현대판 영주주의로 빠지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탐 하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화와 역사에 대한 것를 쓰다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프리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