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중공업산업 정책의 달성 뒤에는 1973 – 1987년 까지 어려운 가정형편에 있었던 초등학교 졸업자나 중고등학교 졸업자중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공업고등학교에서 교육을 시켜 2급 기능사 합격자를 양산하여 77여만명의 공고 졸업 2급 기능사들을 배출 하였고 또한 대기업에서 육성한 기능사를 합쳐 200만명의 2급 기능사들이 중공업 산업현장에서 피땀흘려 이룩한 노력의 결실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경의적인 경제 성장이 원동력이 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士農工商의 전통적인 인식과 사회구조의 틀을 깨기위한 혁명적인 조치로서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인문학을 전공한 엘리트 집단인 “士”들 보다도 대다수가 저소득층 농촌 출신인2급 기능사들이 더 나은 경제적 혜택을 보게 만들어 새로운 중산층 800만명 (200만명의 기능공과 그들의 가족) 을 탄생시키고 전통적인 인식과 사회구조의 틀을 단시간에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서 중공업 산업 정책을 성공시켰다는 주장이 있어 아래에 퍼 욌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조선일보에서 퍼온글
공고생 77만명이 대한민국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 1세대 기능공 생애 10년 추적(1972~1987년 졸업)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전 오원철 경제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필수조건으로 건의한 게 있었습니다. 1년에 5만명의 기능공이 배출돼야 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현실은 터무니없었습니다. 1971년 기준 5만명은 고사하고 대한민국 전체 기능공을 다 합해 봐야 5000명도 채 안 됐습니다. 우리가 5000년 역사의 농경국가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실이었죠. 1년에 1만명도 아니고 5만명의 기능공 배출? 상식으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표였습니다. 그래서 혁명적 조치가 필요했던 거죠.”
지난 11월 11일 오후 서울 신촌 연세대 캠퍼스 내 상남경영관에서 만난 호주국립대 김형아 교수는 대한민국 성장사의 가장 경이로운 대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수천 년 농경국가에서 단기간에 중화학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산업국가로 탈바꿈했을까. 사실 김 교수가 들려주는 얘기는 경이롭지만은 않다. 2006년 자신이 펴낸 저서 ‘박정희, 양날의 선택’이라는 제목처럼 정반대의 그늘이 드리워진 대한민국 산업혁명의 기적 뒤에는 100만명 가까운 젊은이들의 개인적 성취와 영광뿐 아니라 그들의 희생과 비애,












김형아 교수는 1970~1980년대 이른바 ‘산업전사(産業戰士)’로 불린 대한민국 1세대 남성 기능공들의 성장사를 2000년대 초부터 추적 분석해 오고 있다. 단순한 그들의 역사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역사다. 그들이 일군 대한민국 성장사를 내년 하반기에 연세대 류석춘 교수(사회학)와 공동 출간할 예정이다. ‘박정희, 양날의 선택’처럼 해외에서 영문으로 먼저 출간될 이번 저서의 잠정적인 제목은 ‘한국의 산업노동자들, 산업전사에서 노동귀족까지(1972~2012)’다. 최근 이 저서에 포함될 연구성과를 국내 학자들과 토론하기 위해 방한한 김 교수는 자신이 10년 넘도록 창원과 울산 등을 오가며 이제 성공적인 중산층 가장이 된 수십 명 기능공들의 생애를 추적해온 이유부터 설명했다.
“제가 ‘박정희, 양날의 선택’에서 연구한 것은 위에서 아래로 들여다본 박정희 중화학공업 정책과 리더십이었습니다. 이번 연구에서는 그걸 아래서 위로, 즉 ‘그래스루츠(grass roots•풀뿌리)’를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사를 분석하는 일이지요. 비슷한 시각의 연구를 해온 기존의 노동학자들이나 대한민국 산업혁명에 대한 연구들은 우리 노동자들을 유신정책 밑에서 억압을 받은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닭장 같은 데 갇힌 여성 반숙련공들의 얘기만 나옵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대한민국 산업혁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외국 학자들은 한국 같은 자그마한 나라에서 중화학공업을 성공시키고 산업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한데 그들이 누구이며,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부터 던집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성공사는 이들 기능공들의 존재와 실력이 웅변한다. 1970년대 초 중화학공업을 시작할 때 박정희 정권의 목표는 100분의 1㎜ 이하로 쇠를 깎을 수 있는 기능공 양성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기능공들은 100분의 1㎜가 아니라 3500분의 1㎜ 이하로 쇠를 깎는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것도 엄청난 수의 기능공들이 이런 정밀 작업을 해내고 있다. 실력이나 양에서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이룬 셈이다.
1970년대 초반 우리 노동 시장이 무(無)에 가까웠다는 것은 김형아 교수가 이번 연구의 부분 주제로 2011년 류석춘 교수와 함께 쓴 ‘1970년대 기능공 양성과 아산 정주영’이라는 논문을 보면 잘 분석돼 있다. 예컨대 중화학공업을 시작한 1973년 신규로 노동 시장에 진출한 58만명의 학력을 분석하면 1960년생 97만명 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28만명과 1957년생 89만명 중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14만명, 그리고 1954년생 76만명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16만명의 인력으로 구성돼 있었다. 요컨대 노동 시장 신규 진입자의 과반수가 초졸 정도의 학력이었다는 말이다. 숙련된 기능공들이 없으면 공염불에 그치고 말 중화학공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혁명적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혁명의 시작은 바로 박정희 정권이 사활을 건 ‘특수’ 공업고등학교(이하 공고)의 육성이었고, 이를 위해 대대적인 교육제도의 개혁이 뒤따랐다. 김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공고 육성은 기계공고, 시범공고, 특성화공고 등 엘리트 공고를 특별 지정하거나 신설해 예산을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 중 1973~1979년까지 19개가 탄생한 기계공고는 쇠를 100분의 1㎜ 이하로 깎을 수 있는 정밀가공사를 양성하는 학교로 정밀기계•배관•금속•전기•용접•공업계측 등의 전공이 설치돼 있었다. 성동기계공고, 서울기계공고, 부산기계공고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 공고의 학비면제 장학생 비율이 15% 수준이었던 반면 이들 기계공고는 50% 이상의 학생들이 학비면제 혜택을 받는 등 파격적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재학 중 정밀가공사 2급 자격증을 취득하면 연간 10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학금을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