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싸르니아인데
넌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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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작고하신 우리 모친께서는 자기 출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효령대군 (킹 태종의 둘째 아들)의 직계 몇 대 손이라는 걸 족보까지 언급하며 설명하시곤 했다.
나는 사실 그런 종류의 이야기에 자부심은 커녕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곤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대 조 할아버지가 효령대군이었건 마포 경강나루에서 삥을 뜯던 양아치였건 그런 게 21 세기를 살고 있는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 모친님뿐 아니라 나이 좀 드신 대한민국 어르신들 중 많은 분들이 조선시대 누구누구의 몇 대 손이라는 말들을 자랑삼아 하는 걸 본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라는 생각 이전에 그런 말들이 과연 사실일까 거짓일까, 아니, 그 이전에 그런 말을 하는 본인들은 과연 자기의 실제 족보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기나 할까 하는 의문이 들곤한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이 왕족과 사대부를 합쳐 전체 인구의 몇 퍼센트를 차지했는지 확인해 보면 현대인들의 조상타령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인지가 바로 드러난다.
자료들을 찾아보니 대체로 전체 인구의 1.9 퍼센트, 즉 100 명 중 두 명 만이 이 계급에 속했었다는 통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삼대 이상 관리로 출사한 적이 없는 무늬만 양반인 사람들을 포함해 사대부 인구를 아무리 늘려 잡아도 전체 인구의 9 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는 공노비 사노비 등 천민들이었다고 한다. 흔히 ‘상놈’이라고 부르는, 농업에 종사하는 양민계급만 해도 조선시대에서는 준수한 계급에 속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람 백 명 중 아흔 여덟 명은 “당신의 조상은 누구였으며 어떤 일에 종사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네, 우리 조상은 어느 양반 지주가 소유하고 있는 배추밭에 거름을 주려고 똥지게를 지고 다니던 소작농이였습니다.”
라든가
“우리 집안 X 대 조 할머니께서는 아침마다 주인집 아씨마님에게 세숫물을 떠다바치던 몸종 겸 부엌데기 식모였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정상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외국의 경우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 않다.
캐나다에서 학교도 다니고 직장생활도 하면서 만났던 인도계 사람들. 그 중 학교와 전문직 분야에는 힌디계가 많은데, 실례를 무릅쓰고 재미삼아 당신이 어느 카스트 출신이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 아홉 명이 브라만 출신이라고 대답했다.
조금 정직해 보이는 나머지 한 명만이 '조금 양보해' 크샤트리아 출신이라고 대답했다. 네 개의 카스트 계급 + 불가촉천민을 포함하여 인도 전체 인구 중 브라만이 차지하는 비율 역시 3 퍼센트를 넘지 않는데 어찌된 셈인지 캐나다에 사는 인도 사람들은 거의 전부 자기가 브라만 출신이라고 하니 좀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오는 25 일 호적상 생신을 맞이하는 예수 선생의 경우는 어떨까?
예수 선생의 가문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가문 역시 뜨르르 삐까번쩍하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 선생은 다윗왕가의 자손이다. 비록 중간에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서 나사렛이란 돋보잡 보리깡촌에서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목수 집안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27 대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유명한 솔로몬 왕이요. 28 대 선조는 킹 데이빗이다.
출생지를 아예 나사렛 대신 베들레헴으로 바꾸려고 한 흔적도 보인다. 호적신고를 하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번듯한 여관 하나 잡을 돈도 빽도 없어 마굿간에서 출산을 할 수 밖에 없는 기구한 팔자의 어머니를 두긴 했지만 본적은 엄연히 다윗왕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이다.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은 마태오나 루가가 예수족보기록에 예수가 분명히 다윗의 자손이라고 스스로 기록했으면서도 다윗의 27 대손 요셉은 예수의 생부가 아니라고 적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보다 수 십 년 전에 먼저 태어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 의 어머니 아티아 처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신의 성령(Holy Spirit)으로 잉태했다. 따라서 예수는 다윗과 생물학적으로 혈족관계가 아니다. 만일 다윗 가문이 마리아와 예수를 상대로 베들레헴 가정법원에 친생자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면 마리아 모자는 영락없이 패소했을 것이다.
마태오나 루가 같은 복음서 저자들은 무슨 의도로 이런 모순된 의미의 족보를 제작했을까?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를 왕의 자손하고는 그 격과 차원이 다른 ‘신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왕가의 자손’ 이기도 해야한다는 세속적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욕심도 많지..)
하비 콕스나 마커스 J. 보그 같은 자유주의 계열 신학자들이 쓴 책을 읽어보면 그들조차 하나같이 ‘예수 족보 이야기’가 이후에 다가 올 세 세계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화해 및 결합과 같은) 을 예고하기 위한 전주곡의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데, 나는 머리가 나빠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아니 구전의 전달자들이 그렇게 예지가 출중한 사상가들이었다고? 정말???
신의 아들인 동시에 왕가의 자손 이라는 이야기의 은유적 의미가 무엇이든, 그 은유적 의미에 대해 현대 신학자들이 무슨 구라를 어떻게 풀어대고 있든, 싸르니아가 보기에 복음서 저자들은 욕심이 조금 지나쳤던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신의 아들인 동시에 왕가의 자손이기도 해야 한다는, 즉 ‘꿩도 먹고 알도 먹자’ 는 욕심으로,, 반대 방향으로 뛰어 달아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한다는 심정으로,, 족보를 황급히 제작하다보니까 죽도밥도 아니게 된 이상한 족보책이 탄생한 건 아닐까?
만일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 족보에서 다윗왕 족보 이야기를 과감하게 빼 버리고 “그의 가문이 비천했으며 그의 출생배경은 그보다 더 참담했다”고 정직하게 기록했다면 오늘 기독교경전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암튼 예수 선생 생신이 다가오면 이런 저런 생각이 떠 올라서 한 부분 씩 써 보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건 두가지 이유에서 꼭 그렇지 않을 수 있을거 같습니다. 첫째, 남자들인 경우, 왕족과 평민/천민계급간의 reproductive success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칭기스칸과 그 남성친척들로 부터 유래한 사람들이 아시아 특정지역에 8% 정도라고 하는 것 처럼요.) 두번째는 대체로 "조상이 누구냐"라는 질문에는 시간지정을 안하기 때문에, 조상중 가장 출세한 사람을 댈 가능성이 많죠. ㅋ
물론 클립보드님 말씀대로, 조상에 대한 "뻥"이 아주 큰 역할을 할것 같기는 합니다. 예수선생님의 팔로워들도 이런뻥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속물들이었다는 사실에 더 정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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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복음서에 왜 예수선생족보가 들어가 있는건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이상해요.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해서 맘잡고 성경을 읽었는데 마태오복음 보다가 포복졸도를 할 뻔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태오복음 1 장 1 절부터 17 절까지가 예수의 족보를 나열한 장인데, 맨 마지막에 느닷없이 요셉의 아버지가 요셉을 낳은 게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는 겁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어제에 와서야 마태오복음 1 장부터 17 장을 쓴 사람은 예수가 비합법적 임신을 통해 탄생했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근데 느닷없이 여자 이름이 족보에 혼자만 등장하면 이상하니까 앞에다가 다말, 라합, 밧세바 등 세 여자를 일부러 끼워넣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아시다시피 이 세 여자 모두 ‘비정상적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마리아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는지 연구해 볼만한 대목같아요. 마태오복음 1 장 18 절부터는 전혀 딴 사람이 딴 시대에 쓴 게 아닐까하는 느낌도 들었어요.
18 절부터 25 절까지는 17 절까지의 그 이상한 족보 이야기를 토대로 그 유명한 동정녀탄생기록이 이어집니다. 창세기도 그렇지만 뭔가 문투와 분위기가 다른 두 쳅터를 연결된 쳅터인것처럼 자연스러운 듯 이어붙일때 성서에서 단골로 쓰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 경위는 이러하니라……”
17 절과 18 절 사이에도 영락없이 예의 그 문장이 등장하는군요.
뭐,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고 제 직감이 그렇다는 겁니다.
집안 이야기하면, 저야 자랑할 것도 없고, 제 부친은 우리 집이 “김해김가”라서 김유신의 후손이라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서 종친들과 김수로왕릉 방문해서 사진찍고 뭐 짓는데 돈도 거둬냈다고 자랑하시고, 한번은 이른바 문중에서 낸 문중 가계도 책도 사오시고,우리 집 족보도 소중하게 보관하셨습니다. 그 족보에 적힌 제이름 보여주시면서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제 삼촌도 족보 들춰내면서 우리가 무오사화 때 돌아가신 김일손의 몇대손이며, 이러이런 과정을 겪어 어느 곳에 집안이 주로 정착했다구요. 우리 집안 제사가 아닌, 집안의 가장 큰 행사인 묘사 때 따라가면 각 묘소에서 묘사지내는데 며칠이 걸리더군요. 지금도 벌초하는 것이 문중의 집안 일이죠 . 이번에 한국 갔을 때, 제 모친과 난생 처음으로 김수로왕릉과 부인릉(김해허씨)을 다녀왔습니다. 구지봉도 올랐구요. 그래서 삼국유사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김해김가들은 김해허씨와 결혼을 법적으로 못합니다.
한국의 조선사회에서는 피의 전승이 아니라 제사를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손에 아들이 없으면 둘째의 큰아들을 양자로 삼거나 그것도 안되면 씨받이로 했죠. 한국 사회에서 장자가 얼마나 크냐 하면, 저희 집에서 제사 지낼 때, 할아버지, 제 부친, 그 다음에 서열이 저였습니다. 그 다음, 큰 삼촌, 작은삼촌이 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상에 술 따를 때도 그래서 삼촌들보다 제가 서열이 먼저라서 장남으로서 엄청 우쭐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클립보드님이,
“‘예수 족보 이야기’가 이후에 다가 올 세 세계관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화해 및 결합과 같은) 을 예고하기 위한 전주곡의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데, 나는 머리가 나빠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아니 구전의 전달자들이 그렇게 예지가 출중한 사상가들이었다고? 정말???”
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잘 이해가 됩니다.
당시 1세기 기준으로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한국인보다 해외교포가 더 많았다는 것이죠. 상상이나 되나여? 당시 기준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5-6백만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히랍어를 네이티브 랭귀지로 사용했구요. 그리고 마태복음은 바로 이 히랍어를 사용하는 \"마태공동체\"(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성서가 완전히 순혈주의로 쓰여진 것도 아니구요. 유대인들은 예수 이전에 강요된 다문화를 경험한 민족이었습니다. [The First Christmas]는 제 집에 없는 줄 아는데, 다른 책 찾다가 발견해서 예수의 가계도 챕터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트 어만도 이 두 저자들처럼, 마태복음이 어떤 사실성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예수에 와서 구원의 섭리가 성취된 된 것을 가정하고 저자가 이 책을 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전주가 아니라 당시 시점으로 현재상황이었습니다. 다문화유대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요!!!
우리 집 가계도는 \'진주 강가\', 전주 이씨, 평양 조씨, 김해 김씨, 평산 신씨, 해주 오씨 등으로 구성되어 있군요.
진주 강가는 진주 하씨와 동본이라 옛날에는 결혼을 못 했는데, 지금은 동본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지 않나요? 다만 부모양계혈족 8 촌이내만 혼인이 금지되어 있구요.
김일손의 후손이시군요. 얼마 전에 읽기를 마친 역사평전 연산군편에서 마침 그 분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의 제자이자 성종 재임시 사초기록을 담당하던 사관이었지요.
연산군 당시 일어난 사화는 무오사화 갑자사화인데 김일손은 무오사화 때 사형을 당했구요.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주도했다기 보다는 그의 조모 인수대비와 훈구대신들이 사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기획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
연산군에 대한 기록은 흥미진지한 부분이 많고, 잘못 알려지거나 반정세력에 의해 날조된 것들도 많아서 이야기거리가 많습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진 것이 기원후 약 80-85년 사이라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기문이 아니잖습니까? 이미 이 복음서가 쓰여진 때는 기독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이 형성된 초기니까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당연히 수용했어야 했겠죠. 위의 저자들도 추측하긴 했지만요.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닐 때만해도 주선교 대상이 이방인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흩어진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하는군요. 바울의 활동이 초기니까 그럴만도 합니다.
한국인들이 성(family name)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 부터인데 국가에 공을 세우거나 하여튼 남 보다 뭔가 특별나면 임금님이 성을 하사 해서 성이 일반화 되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그 전 까지는 모르지요...
해주 오가도 고려 중엽에 익명의 조상이 국가에 공을 세워 성을 하사 받은건데 선친 말씀으로는 우리가 정말 시조의 후손인지 아니면 임진왜란이나 그런 혼란기에 남의 족보 슬쩍 한건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돌아가신 조상님은 말씀이 없고...
그래도 뭐 족보에서 그렇다고 하면 그걸 믿어야지... 라는 말씀. 아니라는 증거도 없으니.
김일손의 사초가 빌미가 되어서 무오사화는 士禍라고도 쓰고 史禍라고도 씁니다. 史草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니까요.
연산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역사적 인물 재평가 하는게 유행 같은데 아무리 재평가 해도 연산군은 나올게 없는 사람에요. 군약신강인 조선시대에 하고 싶은 대로 왕 노릇한 유일한 왕이지만 그의 왕권강화의 목적이 무엇이냐? 왕권강화해서 한 짓이 사치 방종, 주지육림 속에서 살다 폐위 된거 밖에 없어요. 왕실의 물품을 조달하는 내수사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얼마나 사치 방종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연산군 행적에는 반정군에 의해 왜곡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을 강간했다는 거... 당시 다른 기록들을 보면 조작된 것 같은데 반정군이 쿠데타를 정당화 하기 위해 왜곡 과장한거지요.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중에서 유순정 정도가 대의 때문에 반정을 생각했고 박원종이나 성희안은 대의명분 보다는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이유 때문에 반정을 계획했다고 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고 연산군은 나쁜 놈입니다. 왕이면 왕으로서 주제파악을 하고 왕으로서의 분수를 지켜야 하는데 그런 건 전혀 없었으니까요.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에서 촉발되긴 했지만, 정작 가장 문제가 된 대목은 아무래도 김일손의 사초 내용 중 세조와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를 간접적으로 폭로한 부분일 겁니다. 세조는 영화 \'관상\'에서 개새끼처럼 묘사한 것과는 달리 (아, 그 영화에서는 왕이 되기 전 수양대군 시절만 묘사하고 있지만......) 장점도 많은 인물이었는데, 특이한 취향이 있는지 며느리들과의 관계가 영 수상쩍었던 것 같습니다. 김일손 사초에서 등장한 부분은 의경세자 (일찍 즉은 세조의 장남)의 후궁 권씨와의 문제지만, 제가 정작 의심하고 있는 상대는 의경세자의 본부인인 청주 한씨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연산군 비극의 씨를 뿌린 그 장본인 인수대비가 되는 인물이지요.
암튼 조선시대 역사 중에서는 계유정란부터 연산군 폐출 시기까지가 제일 흥미진진한데, 언제 기회가 되면 이야기 시작해 볼까요?
초기에는 국방에도 신경을 쓰고 민생에도 신경을 썼는데 무오사화 지나면서 부터 정상 궤도를 벗어난 행동을 시작했어요. 사초문제는 정상회담 대화록 까는 국정원장 남재준이란 놈도 능지처참 깜인데 사초는 왕도 못 보는겁니다.
연산군도 어렵게 사초를 보는데 technically 사초를 안 본겁니다. 왜냐면 그 때 사초담당 당상관이 이극돈일텐데 연산군이 사초 보자고 난리를 피우니까 타협안을 내세우지요. "왕이 사초를 보는 건 국법 위반이라 못 본다. 그러나 자꾸 고집을 피우시니 보고싶은 부분만 발췌하겠다." 그러니까 보긴 봤어도 원본을 못 보고 발췌본을 본건데...
사초를 둘러싼 연산군과 신하 사이의 줄다리기가 상세히 기록된 걸로 봐서 무오사화의 사초는 조의제문으로 봐야 할겁니다. 그 부분을 연산군이 집중적으로 보고자 햇으니까.
물론 조선시대 지배계급에서 간통사고가 많고 그중에는 근친 사이의 간통도 많으니까 세조와 인빈한씨도 그렇게 추론할 수는 있겠지만 추론은 추론이지요.
연산군이 정조처럼 용의주도한 인물이라면 자신이 망가지지 않으면서 복수를 멋지게 했을텐데... 가정입니다.
성종이 오래 살았으면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도 가정이구요.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참 허망하고 쓸데없는 일입니다.
인빈이 아니라 수빈 아닌가요? (다른 인빈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인빈은 선조의 후궁이자 신성군의 모후였던 김씨만이 기억납니다) 수빈은 청주 한씨 한확의 막내 딸인가, 암튼 한확에게는 딸이 일곱인가 여섯이 있었는데 제일 막내 아니면 끝에서 둘째로 조선시대 왕가여자들 중에서는 가장 똑똑했다고 하지요. 오죽하면 계유정란의 책사는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한명회라면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수양대군의 며느리인 바로 이 여자라는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세조와 수빈의 관계는 간통이라기보다는 서로 통하는 뚸어난 재사들 사이에서 느끼는 동질감같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다만 그 관계가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이다보니 서로간의 특별한 총애와 존경이 그런 해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구요. 뭐, 암튼 근거는 없습니다.
김일손의 스승이라는 점필재 김종직 생가에는 2009 년에 가려다가,, 밀양에는 갔는데 친일작곡가 박시춘 생가와 영남루만 돌아보고 나온 기억이 나네요.. 실은 유명하다는 돼지국밥집 찾다가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김종직 생가에 못 간거지요.
오는 인터넷을 통해서 김일손이 정여창과 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여창 생가는 경남함양 지곡면 개평에 있습니다. http://hanulh.egloos.com/2793164
이 고택에 한 때 제 친척이 세들어 살아서 저도 6개월 정도 더부살이 해서 기억에 선합니다. 이곳에서 드라마 토지 촬영도 하였습니다. 이 고택은 배산임수를 확실이 갖춘 아름다운 곳이고, 이 고택 앞에 일제 때 설립된 지곡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일본 신사도 이 학교에 있었습니다. 이 마을 이름을 개평이라 하는데 정씨 집안의 집성촌이었습니다. 사진에는 제대로 반양되지 않았는데 제 어릴 때만 해도 정씨 집안의 위용이 대단했습니다. 저희 집안이야 뭐, 자랑할 것이 없는 아주 몰락한 집안이었죠.
제 진주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이 함양분이셨는데, 항상 함양 자랑을 하셨습니다. \"좌안동 우함양\"이라고...저는 그 때 첨으로 좌안동우함양이라는 말을 알았습니다. 나중에 함양에 서원도 엄청 많다는 것을요. 함양엔 최치원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심었다는 상림숲이 엄청 유명하죠. http://blog.daum.net/bjv/5
지금은 상림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군요. 천령문화제라는 것도 해마다 있었는데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에서 큰 연중 행사였조. 옆으로 엄청 새는군요. 헐~ 갑자기 제 추억이 서린 곳 진주와 함양이 생각나서리...
남명선생은 "마당도 쓸 줄 모르는 자들이 주둥이만 살아서 떠든다" 유학자들의 공리공론을 비판했는데 남명학파가 광해군때 몰락한 후로 영영 폐족이 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광해군 때 북인들, 그중에 대북을 보면 노무현 정권 때 열린우리당 생각이 나요. 지나친 말이 될지는 몰라도 이이첨 같은 자들이 광해군 망쳤듯이 노무현, 열린우리당 망친 것은 노빠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언니는 세종대왕 서자인 계양군의 부인이니 한확이 권력을 따라 가는 후각은 몹시 발달한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